은퇴 후, 하루를 서두르지 않게 된 이유
아침 여섯 시,
알람 소리에 눈을 뜨던 시간이 있었다.
부시시한 몸으로 화장실로 향해
양치와 세수를 마치고
헬스장에서 사십 분을 채웠다.
출근용 옷으로 단장을 하고
주차장에 세워 둔 영국차에 시동을 걸었다.
익숙한 음악과 함께
도시는 늘 같은 속도로 흘러갔다.
그 시절의 나는
나름 괜찮은 아파트에 살았고
일에 대한 자부심도 분명했다.
부족함 없는 삶이라 믿었다.
지금의 아침은 다르다.
눈을 뜨면
낯선 도시의 공기를 먼저 마신다.
러닝화를 신고 골목을 달리고
작은 원룸에서 소박한 아침을 차린다.
버스를 탈지,
걸을지를 잠시 고민하며
하루의 속도를 정한다.
가진 것은 분명 줄었지만
하나 늘어난 것이 있다.
아내의 미소와
마음에 깔린 평안함이다.
나는 파이어족이다.
은퇴한 지 어느덧 2년을 향해 간다.
인생에 파이어라는 단어는
처음부터 계획에 없었다.
다만 아내의 호흡에
나의 방향을 맞추다 보니
어느새 이 길 위에 서 있었다.
지금까지
일곱 개 나라, 열두 개 도시를 지났다.
이 생활의 장단점도
이제는 몸이 먼저 안다.
현재 우리가 머무는 곳은 크로아티아.
도착한 지 이 주가 지났다.
새 도시에 오면
우리는 늘 같은 것으로 하루를 연다.
마켓과 교통편을 확인하는 일이다.
숙소 근처의
스투데낙 마켓은
도보 이 분 거리였지만
장보기엔 조금 아쉬웠다.
한국의 편의점을 닮았고
물가는 살짝 높았다.
조금 더 걸어
콘줌 마켓을 찾았다.
채소와 고기, 생활용품까지
웬만한 것은 모두 있었다.
양파 일 킬로그램에
영점 오구 유로.
돼지 목살 오백육십 그램에
사 점 팔구 유로.
유럽이라는 말이
괜히 붙어 있던 것은 아니었다.
두브로브니크 패스는
여행의 리듬을 한결 가볍게 했다.
버스와 박물관, 성벽까지
하루를 묶어 주는 티켓이었다.
성벽 투어는
이 도시를 이해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계단을 오르며
잠시 고소공포증이 올라왔지만
풍경이 그것을 눌러 주었다.
겨울의 두브로브니크는
햇빛이 부드러웠다.
여름이었다면
아마 오래 걷지 못했을 것이다.
성벽 위에서 내려다본
주황빛 지붕들 사이로
시간이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가장 높은 민체타 요새에서
우리는 말없이 서 있었다.
왕좌의 게임 촬영지라는 설명보다
지금 이 순간이 더 중요했다.
서로를 바라보며
그저 웃었다.
아마 이것이
은퇴 이후에 알게 된
가장 확실한 행복일 것이다.
더 빨리 가지 않아도
충분히 깊어질 수 있다는 것.
- 낭만봉지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