꺾이지 않는 믿음의 경계, ‘나의 생울’은 이어진다

아버지가 남긴 그림에서 배운 ‘사랑의 정의’

by 낭만봉지 김봉석

울타리란 참 묘한 존재다.

담장처럼 단단한 벽을 세워 세상을 단절하지 않으면서도, 풀과 나뭇가지를 엮어 소박한 경계를 만든다. 바람이 스며드는 틈을 그대로 두면서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것, 그것은 어딘가 따뜻한 사람의 마음을 닮았다.

울타리는 누군가를 막기 위해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지켜야 할 것을 감싸고, 넘어서면 위험한 경계를 알려준다. 마치 "나는 여기서 너를 기다린다"라고 속삭이는 듯한 믿음을 품고 있다.


나를 지켜준 살아있는 울타리, '생울(生垣)'


삶을 돌아보니 우리가 서 있는 자리마다 울타리가 있었다.

학교, 직장, 그리고 수많은 관계 속에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세우며 살아간다.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되고 깊은 울타리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곁에 있었다.


어린 시절, 나의 부모님은 우리를 위해 몸으로 둘러쳐진 하나의 ‘생울(生垣, 산나무로 만든 울타리)’이었다. 흙에 뿌리내린 나무처럼 그들은 제자리를 지켰고, 우리가 자라는 동안 한 번도 우리 주변을 떠나지 않았다.

걸음마를 떼던 날, 작은 발이 흔들려도 뒤에서 살짝 받쳐주고 넘어지기 직전이면 누구보다 먼저 손을 내밀던 사람들. 세상의 날카로운 바람이 불어올 때면 그 바람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우리 뒤편에서 조용히 넓어지는 울타리가 되어주었다.


그 울타리는 늘 살아 있었다.

숨 쉬고, 우리를 보고, 때로는 우리보다 먼저 아프면서도 반드시 다시 일어나 자리를 지켜주었다.

아이들 (130.0 x 162.2 한지+수간채색) / 1977년 (故) 김성규 화백 作. 언제나 우리 뒤에서 든든한 생울이 되어주셨던 부모님.


기댔던 울타리에서, 누군가를 지키는 울타리로


어른이 된 어느 날 문득 깨닫는다.

그 생울이 더 이상 부모님만의 역할이 아님을 말이다. 기댔던 울타리 안에서 벗어나 이제는 나 스스로 누군가의 울타리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낯설고 때로는 두렵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것은 삶의 가장 자연스러운 순환이다.


누군가의 뒤를 지켜주고,

서툰 걸음을 받아주고,

찬바람을 막아주는 일을 하다 보면 뭉클한 깨달음이 찾아온다.


"아, 이건 내가 어릴 때 받았던 그 마음이구나."


생울은 그렇게 세대를 건너 이어진다.

한 세대가 온몸으로 막아낸 바람은 다음 세대를 감싸는 온기가 되고, 지난 시절의 낡은 울타리는 다른 누군가의 삶을 지켜주는 넉넉한 그늘이 된다.


울타리는 경계가 아니라 다정한 '이음'이다


울타리는 단절의 경계가 아니다. 함께 살아가기 위한 가장 다정한 방식이다.

우리는 그 생울 속에서 자라 다시 누군가의 생울이 되어가는 존재들이다.

이 이어짐이야말로 가장 조용하지만 가장 단단한 사랑의 형태일 것이다.

나의 부모님이 그러하셨듯, 나 또한 누군가의 울타리가 되어간다.

(故) 김성규 화백 作, 평생 흔들림 없는 '생울'이 되어주셨던 아버지의 삶.


머나먼 타국 땅,

노트북 화면 속에 평생 화가이자 미술 선생님으로 사셨던 아버지가 남기신 그림 한 점이 보였다.

그림 속에는 서툰 듯하면서도 강인한 필치로 그려진 물고기, '익투스'가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아버지가 생전에 소중히 여기며 정갈하게 적어 내려간 사랑의 정의가 담겨 있다.


"사랑은 깨어 있고 혼수상태로 잠들지 아니한다. 어려워도 피로를 느끼지 않고 기운이 소진해도 쓰러지지 않으며 공포를 느껴도 요동하지 아니한다."


아버지는 알고 계셨던 것이다.

누군가의 울타리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곁을 지키는 일이 아니라, 어떤 거센 풍랑 속에서도 눈을 뜨고 깨어 자식을 지켜내는 일임을. 기운이 소진되어도 차마 쓰러질 수 없고, 공포 앞에서도 결코 요동해서는 안 되는 숭고한 소명임을 말이다.


이제 나는 아버지가 남겨주신 이 '사랑의 선언'을 가슴에 품고 다시 길을 나선다.

척박한 땅에 뿌리내리고 거친 바람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우리를 지켜준 아버지라는 이름의 거대한 '생울'.

그 단단한 사랑 안에서 자란 아이는 이제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어깨를 내어주는 새로운 울타리가 되어간다.

이것은 끝이 없는 사랑의 대물림이자, 세상을 지탱하는 가장 조용하고도 단단한 사랑의 형태다.

나의 생울은 그렇게, 아버지의 기도와 나의 다짐을 먹고 오늘도 쉼 없이 이어진다.


- 낭만봉지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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