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브로브니크 루페 박물관에서 만난 생존의 지혜
사전에 온라인으로 구입한 패스권으로
입장할 수 있는 박물관은 모두 열세 곳.
하루에 한 곳씩만 둘러봐도
열흘이 훌쩍 넘는 일정이지만,
한 달을 머무는 우리에겐
날씨와 마음을 살피며
천천히 걸을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어느 나라든
그들만의 삶의 방식이 있고,
그 흔적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
나는 늘 박물관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우리가 찾은 곳은
두브로브니크의 거대한 곳간,
루페(Rupe) 민족지학 박물관이었다.
올드타운에서도
조금 높은 지대에 자리한 이곳은
멀리서도 단단한 기운이 느껴졌다.
파란색 철문은
문이라기보다 방패에 가까웠고,
알고 보니 이 건물은
과거 곡물을 저장하던
거대한 국가 창고였다.
두브로브니크 패스의 QR코드를 찍고
안으로 들어서자
건물은 총 네 개의 층으로
차분히 펼쳐졌다.
나무 계단을 따라
위로 오를수록
창문 너머의 올드타운은
조금씩 또렷해졌고,
이 도시는 위와 아래가
서로를 지탱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1층은 해양 역사 전시 공간이었다.
천장에는 밧줄과 돛 천이 걸려 있어
마치 범선 안에 들어온 듯했다.
정교하게 제작된 전통 범선 모형과
나무배 제작 과정은
이 도시가 바다 위에서
어떻게 생계를 이어왔는지를
묵묵히 말해주고 있었다.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바닥이 깊게 파인 공간이었다.
‘루페’는 크로아티아어로
‘구멍들’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암반을 파서 만든
지하 곡물 저장고.
바다로 둘러싸인 이 도시는
전쟁과 봉쇄를 대비해
국가 차원에서
식량을 땅속에 숨겨두었다.
온도 변화가 적고
습도 관리에 유리한 이 공간은
당시로서는 놀라울 만큼
과학적인 선택이었다.
2층에서는
땅을 일구며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을 만났다.
농기구와 생활 도구들,
올리브유를 짜던 석조 압착기,
포도즙을 내던 나무 압착기까지.
전시를 보다 보니
문득 한국의 민속촌이 떠올랐다.
사람이 사는 방식에는
생각보다 많은 공통점이 있다.
3층에는
전통 의상이 전시돼 있었다.
꽃무늬 스커트와
레이스 블라우스,
격식을 갖춘 남성 복장들.
유리 케이스 너머의 옷들은
마치 한 시대의 인물들이
잠시 자리를 비운 듯
조용히 서 있었다.
전시장을 한 바퀴 돌고 나서야
다시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이곳이 단순한 박물관이 아니라
도시를 살린 생명선이었다는 사실.
땅속에 파인 구멍 하나하나가
이 도시를 먹여 살렸고,
그 생존의 선택이
지금의 두브로브니크를 만들었다.
여행은 풍경을 소비하는 일이 아니라
이런 선택의 흔적을
천천히 이해해 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오늘 우리는
또 하나의 시간을
조용히 마음에 저장했다.
- 낭만봉지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