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드리아해의 고요한 보석 차브타트와 부코박 하우스 방문기
두브로브니크의 북적임에서 벗어나 진정한 여유를 찾고 싶을 때, 현지인과 여행자들이 입을 모아 추천하는 곳이 있다. 바로 남쪽으로 약 20km 떨어진 작은 마을 '차브타트(Cavtat)'다. 아드리아해의 푸른 평온을 오롯이 간직한 이곳으로 향하는 길은 그 자체로 여행의 시작이다.
차브타트로 가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올드타운 항구에서 페리를 타고 바다 위 성벽을 감상하며 가는 낭만적인 방법과, 시내버스를 이용해 해안 도로를 달리는 방법이다.
우리는 가장 보편적인 이동 수단인 10번 버스를 택했다. 공항버스 정류장과 같은 위치인 ‘Grawe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에 올랐다. 10번 버스는 두브로브니크 패스를 이용할 수 없어 별도로 티켓을 구매해야 하는데, 편도 1인당 4유로이며 카드 결제도 가능하다.
운 좋게 바다가 잘 보이는 오른쪽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올드타운 뒤쪽을 지나 해안가 절벽을 따라 달리는 버스는 아찔한 스릴을 선사했다. 일방통행 외길인 좁은 절벽 도로를 달릴 때면, 차창 밖으로 보이는 높이와 속도감에 절로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그 공포도 잠시, 눈앞에 펼쳐진 쪽빛 바다의 향연에 이내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40분을 달려 도착한 차브타트에서 우리를 가장 먼저 반긴 것은 투명한 아드리아해였다. 정박해 있는 배들은 고요한 항구에 운치를 더했고, 성수기의 분주함을 짐작게 하는 빈 상점들 사이로 우리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을 찾은 특별한 이유 중 하나는 ‘부코박 하우스’를 방문하기 위해서다. 크로아티아 현대 미술의 아버지라 불리는 블라호 부코박(Vlaho Bukovac)의 생가를 개조한 박물관이다. 골목 끝, 크로아티아 국기가 걸린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화가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한 은은한 색채의 공기가 우리를 감쌌다.
이곳의 백미는 집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캔버스라는 점이다. 부코박은 전문 교육을 받기 전인 10대 시절부터 집안 벽면에 풍경과 인물을 그렸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색은 바랬지만, 그 빛바랜 파스텔 톤의 그림들은 박물관 전체에 따스하고 신비로운 온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전시된 작품 중 1919년 작인 아내의 초상화 앞에 한참을 머물렀다. 화려한 장식 없는 어두운 배경 속에서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인물의 깊은 고뇌와 삶의 무게가 담겨 있었다. 태양신을 갈망하는 '클리티아'의 누드화 역시 어두운 자연과 대비되는 밝은 몸의 빛을 통해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강렬하게 전달했다.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올라 화가의 작업실에 들어섰을 때, 예상치 못한 감정이 솟구쳤다. 낡은 붓과 손때 묻은 그림 도구들을 보는 순간, 평생 미술 선생님이자 화가로 사셨던 나의 아버지가 떠올랐다. 서재를 가득 채웠던 아버지의 도구들과 부코박의 것이 묘하게 겹쳐 보였다. 지금은 하늘나라 더 좋은 곳에서 그림을 그리고 계실 아버지지만, 예술가의 고독한 흔적이 남은 이 방에서만큼은 아버지가 유독 사무치게 보고 싶어졌다.
박물관을 나와 차브타트의 하이라이트인 라트(Rat) 반도 산책로를 걸었다. 소나무 숲길 사이로 불어오는 바닷바람과 에메랄드빛 바다는 마음의 소란을 말끔히 씻어주었다. 비수기의 한적함 덕분에 우리는 이 아름다운 정취를 온전히 독점할 수 있었다.
어느덧 돌아갈 시간, 정류장에 앉아 마지막으로 차브타트의 공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화려한 두브로브니크가 보여주지 못한 뜻밖의 위로와 그리움을 만난 시간이었다. 다음 여정에는 또 어떤 풍경이 기다리고 있을까.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시 길을 나선다.
- 낭만봉지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