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도시에서 잃어버린 숨의 박자를 찾다.
빠이에서의 여정을 마무리하고 돌아 나온 길은
다시 ‘죽음의 산길’이라 불리는 구불구불한 도로였다.
차가 산등성이를 돌 때마다 나의 몸도 함께 흔들렸고, 그렇게 몇 번의 토악질을 참아내고 도착한 치앙마이는 빠이와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주변에 우뚝 솟은 건물들,
쇼핑몰과 콘도,
밀집되어 있는 아파트들…
올드타운의 따스한 고색과는 닿아 있지 않은,
마치 잠시 한국으로 되돌아온 듯한 풍경이었다.
치앙마이에서 나를 가장 먼저 맞이한 것은
바로 ‘공기’였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묘하게 오래된 온기를 지닌 공기.
마치 이 도시의 수호자가 “천천히 걸어도 괜찮다”라고 건네는 듯한 속삭임이 느껴졌다.
다만, 도시 특유의 미세먼지는 나에게 다시 현실을
알려주는 장면처럼 다가왔다.
치앙마이는 ‘새로운 도시’를 뜻한다.
고대와 현대가 엉킨 채 묘하게 섞여 있는 곳이다.
700여 년 전, 란나 왕국의 멩라이 왕이 사면의 산과 핑강을 바라보며 새로운 왕도를 꿈꾸었던 바로 그 자리.
그는 이 평야의 풍경 속에서 길운을 읽어내고, 그렇게 치앙마이라는 도시를 세웠다.
우리가 머문 숙소는 치앙마이 외곽의 ‘더원 콘도’였다.
헬스장, 수영장, 탁구장, 노래방 등 모든 것을 갖춘 작은 도시 같은 곳이었다.
도보 5분 거리에 자리한 '센트럴 페스티벌' 쇼핑몰은
마치 한국의 스타필드를 떠올리게 했고,
빠이의 시골 살이를 하다가 도시로 들어오니 묘한 어색함과 서투름이 나도 모르게 새어 나왔다.
하지만 도시의 편리함은 금세 다시 나를 삶의 리듬 속으로 데려갔다. 무엇보다 장보기가 편했고, 물가는 여전히 여행자를 환대했다.
올드타운까지 이동하려면 택시를 타야 했지만,
여러 곳을 돌아다니기엔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숙소 앞 셔틀은 무료였지만, 시간대가 우리와 맞지 않았다. 결국 스쿠터를 렌트하기로 했다.
하늘빛의 야마하 필라노.
고운 단장을 한 여성의 숨결처럼
부드럽고 우아한 그 스쿠터는,
도시 속 우리의 날개가 되어주었다.
치앙마이 곳곳에는,
오래된 전설의 실타래를 품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흰 코끼리의 이야기다.
고승이 지닌 성스러운 유골을 어디에 모실지 알 수 없던 어느 날, 흰 코끼리가 그것을 등에 싣고 숲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도이수텝 정상에 이르러 세 번 울고 고요히 쓰러졌고 사람들은 그것을 신의 표시로 여겨
지금의 도이수텝 사원이 탄생했다.
우리는 스쿠터로 약 한 시간을 달려 도이수텝 사원에 도착했다. 이곳은 주변의 모든 것들이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그 웅장함은 내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아내는 코끼리 동상에서 코를 만지며 기도를 했다.
기도의 내용이 너무 궁금했지만 물어보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밝고 묘한 웃음을 보면서 그 행복한 상상을 깨고 싶지 않았다.
도이수텝 사원에서 숙소로 이동 중,
숲 길 사이로 뭔가 신비로운 사원 표지판이 보였다.
“왓파랏”
이름을 크게 부르면 그 고요가 깨질까 봐 자연스레 속삭이게 되는 사원…
지어진 사원이라기보다 ‘발견된 사원’에 가까운 그곳은 숲이 수백 년 동안 키워온 바위와 나무들 사이에
작게 숨어 있었다.
작은 폭포가 졸졸 흐르고,
이끼 낀 돌 위로 햇빛이 바늘처럼 쏟아지고,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나뭇잎이 오래된 풍경처럼
잔잔히 흔들렸다.
도시의 속도에서 멀어져, 내가 잠시 잊고 있던 느림의 리듬을 다시 느끼게 하는 공간 같았다.
이곳은 현대의 나와 오래된 자연이 잠시 겹쳐지는
신비로운 장소였다.
치앙마이에서 가장 많이 방문하고 생활의 큰 부분을 차지했던 곳, 그렇게 우리에게 익숙함과 즐거움이 가득했던 곳은 바로 올드타운이었다.
정사각형의 성곽과 해자는 도시의 분명한 윤곽을 보여주지만, 걷다 보면 그 경계가 서서히 흐려진다.
옛 성벽의 벽돌 사이로 비집고 나온 풀 한 포기,
게으르게 흐르는 물 위에 떠 있는 오리들,
성벽을 둘러싸고 있는 비둘기들,
오토바이의 소음과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경쾌하면서 잔잔한 음악,
복잡해 보이지만 몸에 배어 있는 그들만의 규칙을 지켜가며 상거래를 하는 시장상인들…
이 모든 것이 서로 얽혀 치앙마이만의 느린 리듬을 만든다.
나의 최애 힐링 포인트는 올드타운 중심에 있는 Buak Hard 시티공원이다.
이곳은 쉼과 치유가 공존하는 안식처 같은 공간이다.
돗자리 위에서 낮잠을 청하는 사람들,
외줄 타기와 요가를 즐기는 이들,
연못 위 비둘기와 잉어,
분수 소리 그리고 때때로 비추는 무지개.
여기는 도시의 소음을 씻어내고 마음의 속도를 조정하게 해주는 치앙마이의 숨결처럼 느껴졌다.
카페에 앉아 한참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도,
길가에 흩날리는 꽃잎을 조심스레 주워 손바닥에 올려보는 것도 이 도시에서는 전혀 낯설지 않았다.
치앙마이의 느림은 게으름이 아니라,
‘살아있음’에서 비롯된 느림이었다.
서두르지 않아도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들.
그래서일까, 이곳을 떠나는 많은 여행자들이 마음속에 시간을 조금씩 챙겨 간다고 한다.
여행자는 잠시 머물다 떠나는 사람이지만, 어떤 도시는 그 잠시 동안에도 삶의 방향을 건드릴만큼 깊은 인상을 남긴다.
치앙마이는 내게 그런 도시였다.
새로운 도시, 그러나 오래된 영혼을 품은 도시.
천천히 걸을수록 더 많은 것이 보이는 도시.
'한달살기'의 성지라 불리는 이곳에서 나는 잃어버린 숨의 박자를 다시 찾았다.
- 낭만봉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