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을 내려놓으니, 내 안에 숨결이 들린다.

여정의 시작, 태국 Pai에서 한달살기

by 낭만봉지 김봉석

비행기로 일곱 시간을 날아 치앙마이에 도착했다.

우리가 가진 전부라고는...

캐리어 두 개와 배낭 두 개.

앞으로 반년 동안 세 나라를 떠돌 예정이니 이 네 개의 짐이 곧 우리의 삶이었다.

최종 목적지인 빠이(Pai)까지는 다시 자동차로 세 시간을 올라가야 한다.
‘멀쩡한 사람도 멀미하게 만든다’는 악명 높은 커브길.
기사들은 아예 멀미봉투를 미리 나누어준다.
아내는 태연했지만 약에 의지해도 멀미를 피하기 어려운 체질의 나는, 목구멍까지 몰려오는 신내음을 억지로 삼키며 겨우 빠이에 도착했다.

(태국 빠이 워킹스트릿)

터미널에서 숙소까지는 다시 10km.
낡아 삐걱거리는 현지 택시에 몸을 싣고 도착한 곳은 말 그대로 산속의 별장 같았다.
주변엔 인적이 드물고 밤이면 밀림처럼 우거진 숲 사이로 닭 울음과 들개들의 짖음이 가늘게 스며들었다.

(태국 빠이 스쿠터 렌트)

빠이에서 한달살이를 하려면 교통수단이 필수였다.
우리는 혼다 리드를 렌트했다.
처음 시동을 걸었을 때의 느낌은 마치 노련한 늙은 말을 타는 듯했다.
묵직하지만 기특할 만큼 균형 잡힌 움직임.

참고로 빠이에서 스쿠터를 운전하려면 꼭 '2종소형보통' 국제면허증을 소지해야 한다.

현지에서 한 번의 검문이 있었지만 한국에서 취득한 국제면허증을 보여주고 잘 넘겼다.


그렇게 시작된 빠이의 삶은 먹고, 자고, 보고, 느끼는 단순한 반복 속에서 낯설게도 편안한 리듬을 갖춰갔다.
하지만 첫 장기 해외생활이라서인지…
내 안의 ‘걱정병’은 조금씩 고개를 들었다.
화장실 벽을 타고 지나다니는 도마뱀,
복불복에 가까운 음식 위생,
대마 흡연이 합법인 탓에 거리마다 피어오르는 연기….
때론 숨이 턱 막혔지만 우리는 스쿠터를 타고 외곽의 조용한 길을 찾아다니며 조금씩 우리만의 아지트를 만들어 갔다.

(태국 빠이 cafe & Bar)

빠이는 ‘여행자들의 무덤’, ‘히피의 성지’로 불린다.
볼거리가 특별히 많지 않음에도 이곳에 발을 들인 이들이 좀처럼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묘한 매력 때문일 것이다.
저렴한 물가,

느긋한 분위기,
그리고 요가의 천국이라 불릴 만큼 고요한 에너지.
우리가 빠이에 빠져가는 데에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태국 빠이협곡)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빠이협곡'이다.
붉은 사암이 수천 년 동안 깎여 만들어낸 협곡은
대지에 남은 거대한 상처처럼 벌어져 있었다.
흙먼지가 이는 비탈을 따라 아슬아슬하게 서 있으면 건조한 바람이 오래된 지질학의 비밀을 속삭이는 듯했다.
푸른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평화,
메마른 협곡의 거침이 묘하게 뒤섞이는 곳.
해가 저물며 모든 풍경이 주황빛으로 번질 때면
마치 세상의 끝에서 홀로 서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내게 그 외길 산책은 스릴이 아니라 진짜 공포였지만, 대자연이 만들어낸 풍경 앞에서 인간은 그저 겸허해질 수밖에 없었다.

(태국 반자보)

또 하나 잊지 못할 장소는 '반자보'이다.
스쿠터로 두 시간을 달려 꼬불꼬불 이어지는 산길을 넘어야 겨우 닿을 수 있는 작은 산촌.
안개가 서서히 걷히는 새벽이면 카르스트 산맥 사이로 구름바다가 펼쳐지고 그 위로 차분히 아침이 떠오른다고 한다.
우리는 낮에 도착했지만 이곳은 시간의 속도가 다르게 흐르는 마을이었다.
말라리아를 피해 산 위로 올라온 라후족의 오래된 삶이 대나무 집과 좁은 흙길 위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여행자들은 난간 위에 다리를 달랑 내걸고 국수를 먹고 있었다.
문명이 점차 스며들고 있음에도 반자보는 여전히 자연과 인간의 경계를 질문하는 사색의 공간이었다.

(태국 빠이_Pai)

어느새 우리도 그곳의 한 조각처럼 빠이에 스며들어 있었다.
빠이에서의 한 달은 달력을 넘기는 행위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시간이었다.
처음 며칠간은 지도에 표시된 명소를 찾아다녔지만
곧 느림이 우리 몸에 새겨졌다.
바이크로 시골길을 달리고 방갈로에서 바람 소리와 강물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하루의 전부가 되었다.
도시에서 지니고 다녔던 ‘효율’이라는 짐을 내려놓으니 비로소 내 안의 숨결이 들렸다.
떠날 준비를 하며 짐을 쌀 때 깨달았다.
우리가 빠이에 적응한 것이 아니라,
빠이라는 공간이 우리를 제 속도에 맞춰 다시 빚어 놓았다는 사실을…


이렇게 우리의 첫 번째 여정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또 다른 길을 기대하게 되었다.
길은 늘 어딘가로 이어지고,
여정은 그렇게 조용한 설렘 속에서

다음 장을 기대하게 만든다.


– 낭만봉지 김봉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