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봉기 Nov 24. 2020

삼성, SK, LG 회장들이 한 골목에?

권력과 자본의 '배제'의 힘이 만든 대단한 골목에 대한 역사지리적 잡생각

한국의 부촌, 단순히 부자 정도가 아니라 그룹사 회장님들이 많이 사는 동네는 몇 군데 있습니다. 성북동과 한남동, 이태원 등입니다. 그중에서 이태원2동의 특정지역 대충 설명하자면 하얏트호텔에서 이태원역과 한강진방향으로 내려가는 언덕동네는  대기업 회장들의 집과 외국대사들의 관저가 모여 있는 가장 두드러진 부촌입니다. 그야말로 대형저택들만 모여있고 '불순물' 같은 작은 주택들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 부유함의 동질성이 아주 강한 곳이라 하겠습니다. 이 곳에 집을 가진 기업총수들이 80여 명이란 기사도 있더군요.


그런데 이 곳도 이 부촌의 경계와 맞닿은 주변 동네들은 아주 대중적인 심지어 조금은 빈촌이라할 곳들인데요. -물론 이것도 우리나라 부촌들의 공통적 특징입니다. 부촌 주변 동네는 빈촌이라는...- 그래서 이 부촌 주변 빈촌에 저도 20년 정도 살다보니 이 부촌의 겉모습, 그리고 살짝 안쪽의 일들을 들을 때도 가끔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조금 해 볼까 합니다.


제 단골 산책로는 주로 하얏트호텔 언덕에서 리움근처 이태원 대로로 내려가는 겁니다. 그러다보면 주로 지번상으로는 이태원로55길로 칭해지는 넓은 골목(?)을 지나게 됩니다. 바로 이 길이 대한민국 기업규모 순위로 1,3,4위 기업의 회장들이 살고 있거나 살았던 골목입니다. 


위 사진으로 보면 오른쪽에 붉은 벽돌담이 있는 집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한 때 살았던 집터입니다. 그리고 왼쪽에 공사중인 임시벽이 높이 선 곳은 신축중인 SK 최태원 회장의 집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운데에 높이 선 모습으로 보이는 집은 LG 구광모 회장의 자택입니다. 


근데 사실은 이 3개 그룹의 회장님들은 그 분들 혹은 그 집에 살았던 선대 회장들까지 거슬러봐도 이 골목의 집들에 동시에 모여 산 적은 없습니다. 한때 살았지만 지금은 살고 있지 않거나 아니면 직전까진 선대 회장님이 살다가 자신은 이사 온지 얼마 안 됐거나 하는 식으로 조금씩은 엇갈렸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동시에 사는 일은 없을 겁니다. 


먼저 이재용 부회장의 전 자택부터 얘기해 볼까요. 이 집은 사실 지금은 그냥 집터일 뿐입니다. 이재용 부회장이 전 부인인 임세령씨와 결혼한 직후 잠시 살았지만 2000년대 중반 리움근처 새 집으로 이사갔고 그 뒤로는 한때 유치원으로 사용됐습니다. ECLC 서울국제학교의 유치원과정이었습니다.  주로 외교관 자녀들이 많이 다녀서 등하원 시간때마다 외교관 번호판 단 차량들이 줄지어 아이들을 기다리는 모습을 저도 가끔 봤습니다. 그런데 몇 년간 운영돼다 중단됐고 집은 오랫동안 방치돼다 급기야 지난 2018년엔 헐렸습니다. 결국 10여년 넘게 빈 집내지는 공터로 남았던 곳입니다. 그런데 한때 유치원이었다는 이유로 용산구청에선 이 집에 대한 종부세를 12년간이나 물리지 않았습니다. 한때 유치원이었지 그이후엔 비워져있었는데도요. 이 문제는 작년 국감에서 심상정의원이 지적한 바도 있습니다. 

이재용 부회장의 전 집터를 골목 아래에서 본 모습. 애초에 땅을 매우 높여 다진 걸 알 수 있다.
집 대문에 붙은 발굴조사 안내문


그런데 최근에 이 집 혹은 집터에 개인적으로 관심을 갖게 됐던 건 바로 이 안내문 때문이었습니다. 한달전 쯤 산책하다 본 '문화재 발굴 조사' 안내문. 


"삼성가의 땅에서 문화재가 나오다니...희한한 일이고 또 대체 무엇이 나온 걸까?" 하는 호기심이 강력히 일어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건사고랄 순 없지만 참으로 모든 이의 궁금함을 자아낼 뉴스를 산책하다 찾았다는 흥분도 일었죠. 그래서 문화재청을 담당하는 팀에도 알리고 알아봤으나 결론은............


아쉽게도 매우  싱거운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일정규모 이상으로 큰 건물이나 부지를 개발할 때는 혹시 나올 지 모를 문화재에 대비하는 차원으로 '미리' 발굴조사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나와서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죠. 집이라기엔 워낙에 넓은 땅이라 당연한 절차라는 겁니다. 그런데 사실 이 집터는 이재용 부회장의 신접살림집, 그리고 외국인 유치원 등 20여 년전 일들보다 더 긴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사실은 이 부회장의 할아버지이자 삼성의 창업주 고 이병철 회장도 한때  살았던 집입니다.  


이렇게 삼성가로선 큰 역사성을 가진 이 집터를 이재용 부회장은 최근 동생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에게 247억원에 팔았습니다. 그리고 문화재발굴조사를 하는 등 공사준비에 들어간 건데 아마도 이서현 이사장의 자택이 지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SK최태원 회장의 신축중인 집, 지난 여름에 찍은 사진이어서 지금은 상당히 공사가 진척됐다.


그리고 SK최태원 회장은 이 부자들의 동네에 집을 사서 '임시'로 거주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최근에 이 55길이자 이재용 부회장 집터 맞은 편의 집 2개 정도를 사서는 헐고 공사에 들어갔습니다. 규모상으로는 지하에 지상으론 3,4층의 대규모 저택으로 생각됩니다. 이 정도면 근처 집들 가운데 가장 크고 애초에 언덕길이라 한강을 볼 수 있는 높은 조망도 갖게 될 것으로 보입니다. 아직 정식 결혼은 못한 김희영 티앤씨재단 이사장 그리고  어린 자녀와 함께 이태원의 식당에서 함께 식사하는 모습을 본 동네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굳이 왜 여기에 새 집을 짓는지, 아니면 여기가 가장 좋은 조망에 또 마침 살 수 있는 집이 나온 건지 그런 내막까지는 알 수는 없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골목길의 아래쪽에 자리한 LG 구광모회장의 집입니다. 사실 이 집은 지난 2018년 타계한 고 구본무 회장의 자택이었습니다. 구본무 회장 살아계실때부터 구광모 회장이 같이 살았다는 말도 있지만 구광모 회장이 근처 '한남 더 힐'에 집을 갖고 있는 걸 보면 지금은 구광모회장이 항상 거주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당연하게도 제가 이 집앞을 참 자주는 다니지만 구본무 회장을 여기서 뵌 적은 없습니다. 다른 자리에서 뵌 적은 있지만요... 그런데 동네사람들이나 LG관계자로부터 들은 일화는 있는데...가끔 LG와 관련된 납품업체나 노동단체에서 시위하러 올 때도 있었는데 그럴때마다 구회장은 "괜히 옆에가서 방해하지 말고 그냥 소리치고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라"고 말하곤 했다더군요. 


그러면 여기서 누구나 한가지 의문을 갖게 될 겁니다. 도대체 애초에 이 회장님들 그리고 더 나아가선 이병철 같은 선대의 회장님들은 왜 하필 이 이태원 언덕배기 동네에 모여드신 걸까요?


여기서 한번 철학적 사유를 얄팍하게나마 시도해보겠습니다.


  이성과 합리성의 절대성을 믿던 근대철학이 저물고 ‘후기’또는 ‘포스트’ 등의 접두어가 붙는  현대의 철학과 예술은 진리의 추구방식이 바뀝니다. 간단히 말해서 전엔 ‘A는 이러저러해서 자명하게 A이다’라고 설명하다가 현대에선 ‘A는 B가 아니고 C가 아니니 결국 A일 수밖에 없다’는 상대적인 설명입니다. 책상은 의자가 아니니 책상이라는 식인데 결국 이런 ‘차이’ 때문에 의미가 결정된다는 거죠. 

 대표적인 게 소쉬르의 언어학인데 그 뒤 구조주의가 시작되고 포스트모더니즘 철학도 근본적으론 이런 ‘차이’의 힘으로 모든 것을 설명합니다. 이 차이를 사회와 권력에 초점 맞추면 ‘배제’로 볼 수 있죠. A는 B를 배제시킬 힘이 있으니 B가 아닌 A라는 거죠. 요즘 각광받는 아감벤의 벌거벗은 인간 ‘호모사케르’도 주권권력이 갖는 힘은 자신의 법적 힘으로 보호하는 국민과 그렇지 못하고 배제시키는 ‘호모사케르’를 분리해 나눈 만드는 과정으로 생겨난다고 보죠. 주권권력이 존재하기 위해선 항상 그 대응 쌍으로 배제된 사람들 ‘호모사케르’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결국 이런 차이와 배제가 사회현상과 권력의 위계를 보는 아주 간단하고 근본적 도구가 될 수 있는데 이 부촌의 생성도 이 시각으로 보면 좀더 깊고 간단히 풀어내집니다.



'배제'의 공간이 된 이태원 언덕


우선 이곳은 배제의 힘이 존재하는 공간입니다. 우선 이것은 언덕이고 대중교통수단인 지하철이나 버스가 다니는 곳과는 상당히 떨어진 안쪽 동네입니다. 대중교통수단에 의존하는 서민들이 살기엔 여간 불편한 동네가 아닙니다. 이 동네는 전혀 아니지만 근처에 빈한 동네에 살고 있는 저 같은 경우에도 지하철에서 내려서 마을버스를 타고 올라가야합니다. 물론 자가용이 있으면 아무 문제가 안되지만 언덕이라 주차장을 만들기도 어려워 집에 주차장이 있으려면 집이 꽤나 커야하기도 합니다. 언덕이라 성토공사를 하고 축대를 높이 쌓아서 평지를 만들어야 집을 지을 수 있지만 바로 이렇게 엄청난 건축비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만 이곳에 모여서 살 수 있게 된 겁니다. 지금은 그래도 주차장 있는 빌라들이 이태원에 많이 생겼지만 90년대까지만 해도 상당한 진입장벽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 부촌과 맞닿은 '보통동네'들은 이런 교통상의 단점때문에 집값이 상대적으로 싼 역설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아무튼 자가용과 주차장이 어느 정도 대중화되기도 했지만 그런 대중화가 일어나기 이전 이미 이태원 언덕은 부자들이 하나씩 큰 저택을 지어서 자리잡고 보통사람들의 접근은 배제시켰습니다. 



그 이름 '조선영단'의 땅


  또하나 국가권력에 의한 배제도 이뤄졌습니다. 이런 사실을 이해하려면 '조선영단'이란 생소한 이름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조선영단은 일제가 1940년대에 만든 공공주택 건설기구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대한주택공사에 해당합니다. 일제는 일본군 간부들을 위한 주택건설, 그리고 반대로 군수공장과 군기지에서 일할 근로자들의 숙소를 만들기 위해 이 조선영단을 설치했습니다. 그런데 용산엔 일본군의 주둔지와 군수공장들이 밀집돼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조선영단이 만든 일본군 장교들을 위한 현대식 주택들이 지어졌고 또 반대로 일본군부대와 군수공장에서 일할 근로자들을 수용할 작은 그러나 다수의 공공주택들이 이 이태원지역에 지어졌습니다. 특히나 지금의 부촌인 이태원 언덕은 일본군 장교들을 위한 숙소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해방이후 이 집과 주택부지들은 당연하게도 한국정부의 소유가 됩니다. 정부는 이 집들의 상당수를 미군과 유엔군 장교들의 숙소로 바꾸었고 그게 외교공관들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일부는 이런 넓은 집을 살 수 있는 부자들에게 팔게 됩니다.


  결국 총독부가 일본군 장교의 숙소로 만든 집이 있었다는 얘기이고 이게 국가소유가 되고 미군이나 외교관 숙소로 쓰이다가 어느 시점에서 국가가 부자들에게 국공유지 매각의 방식으로 팔았다는 얘기가 됩니다. 이렇게 국가가 소유한 이태원 언덕의 고급주택들이다보니 보통사람들이 사서 살 수는 없었던 겁니다. 


반면 바로 근처이자 역시 언덕지형인 해방촌과 보광동 일대는 거꾸로 서민들의 달동네로 시작됐습니다. 해방직후 만들어진 무허가 판자촌이 동네의 시초입니다. 바로 옆동네이고 지리적으로 언덕으로 비슷한데도 한쪽은 부촌, 한쪽은 빈민이 된 이유는 뭘까요. 


배제시킨 자들의 공간 '이태원 언덕'과 

배제된 호모사케르들의 공간 '해방촌'


역시 위의 이유처럼 부촌인 이태원 언덕은 원래 개발돼 관리된 택지여서 피난민들이 판자집을 지을 수 없었지만 해방촌이나 보광동 등은 국가 소유이되 그저 빈 임야였기에 집을 지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해방직후, 그리고 6.25가 끝난뒤 몰려든 피난민들은 미군기지 근처라 먹을 것을 얻기 쉽고 또 빈 국가땅이라 이곳에 몰려들 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반면 국가권력은 이태원언덕의 일본군 숙소 같은 쓸모있고 귀중한 재산은 보호하고 서민들의 접근을 막은 반면 남산아래 언덕이나 한강위 언덕 같은 곳까진 제대로 관리하지 않은 겁니다. 결국 아감벤 식으로 하면 국가권력에 의한 배제를 당하는 호모사케르들이 그렇게 배제된 땅에 몰려든 것이고 반면에 국가권력이 자신의 법적 보호아래 특히 가장 강한 법적 보호 아래 둔 땅은 그 바로 옆 이태원 언덕이었던 거죠.


뭐 물론 이 두 지역의 중간에선 좀 웃지 못할 일들도 벌어졌습니다. 기본적으로 해방촌 같은 빈촌이든 일본군 숙소 나중에 유엔군 숙소가 된 이태원 언덕이든 다 국가의 땅이었다는 공통점에서 생긴 일인데요. 이태원 언덕에 가까이 있는 경리단길 위쪽지역 같은 경우엔 옛날에 개인들의 소유권이 불분명한 땅이 많았습니다. 예를 들면 마당의 일부가 알고보니 내땅이 아니라 용산구 땅이라든가 아니면 반대로 집앞 골목이 1,2평은 내 땅이더라...하는 식으로 구획이 뒤섞인 경우가 왕왕 있고 그런 것을 제 주변에서도 몇 번 봤습니다. 근데 이런 건 ‘사소한’ 것이고 동네에서 들려온 옛이야기 중엔 소유권이 불분명한(사실은 국가소유일) 공터들을 그냥 점유해서 거기에 집이나 담을 쌓고 수십 년을 그렇게 유지해 결국 자기 집을 여러 채 늘린 토박이 주민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리움 쪽에서 내려다본 서울 강남의 모습들


심지어 풍수지리마저 좋은 땅


  이상이 사회경제학적이유라면 조금 사소하고 비과학적인 이유도 하나 있긴 합니다. 이전에 바로 풍수지리적 이유입니다. 첫째 이 이태원 언덕은 풍수학적으로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지형입니다. 뒤로 남산이 있고 앞으로 한강이 내려보이는 풍수지리학의 모범적인 입지라는 것이죠. 둘째로는 서울의 배꼽이라할 좋은 기운이 있는 곳인 점인데요. 용산자체가 한강이 굽이쳐 돌아가고 한강쪽으로 튀어나온 배 같은 지형이어서 기운이 좋다는 겁니다. 정말 이 언덕에서 보면 한강과 강남시가지가 다 내려다보이는 엄청난 시야를 보여주긴 합니다.  그룹 회장님들 중엔 이런 풍수지리를 매우 중하게 여겨서 자택을 만든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자신의 그룹을 대대로 번창시킬 '터'를 찾아야했던 거죠.


이태원의 언덕부촌, 정식 명칭을 무어라 해야 할지는 모르겠습니다. 많이는 한남동으로 알고 있지만 행정구역상으론 이태원 2동이고 지리적으론 남산으로 연결되는 언덕은 이렇게 교통의 장벽과 막대한 건축비 그리고 국가권력에 의해 서민들의 접근은 '배제'된 부자들의 거주지로 탄생했다고 보겠습니다. 


지리학은 전혀 모르고 사회학적 지식도 부족하지만 부촌옆 가난한 동네에 20년간 살다보니 몇가지 감흥과 경험을 정리해봤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태릉골프장과 거기에 지울 한 줌도 안되는 아파트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