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봉기 May 04. 2021

노매드랜드, 떠돌기에 존재하고 정착하기에 사라지는 역설

이동하는 자만이 자유롭다 '노마디즘'

“행복한 가정의 사정은 다들 비슷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다른 이유가 있다”고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리나는 시작합니다. 


노매드랜드를 보고나니 이 문장이 떠올랐습니다. 이 영화의 이야기는 이렇게 각기 다른 노매드들의 사연이 이어지기 때문이죠. 주인공인 펀의 1년여의 여정을 담고 있는 이 영화는 그러나 로드무비는 아니더군요. 로드무비라면 주인공이 여행하는 과정들 즉 어딘가를 찾아가는 준비와 실제 여정들 거기서 보는 달라지는 풍광들과 길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사건들이 중심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부분은 최소화하고 펀이 만나는 다른 노매드들의 각기 다른 사연들과 그들과 주인공 펀의 관계에 중심을 두고 있습니다.  

  그렇게 길에서 만난 이들은 각기 다른 사연을 담고 있습니다. 모닥불 아래서 각자 이야기를 펼치는 씬이 여러 번 나오는 것도 그런 이야기 구조와 맞닿아 있는데 사연들은 금융위기로 집을 잃고 노매드로 나선 이, 항암치료를 포기하고 전국을 여행하는 이, 아들을 잃은 슬픔을 다른 노매드들을 돕는 일로 극복하고 있는 이, 또 아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은 죄책감에 아들과 사는 게 힘들어 떠도는 이 등 가지각색입니다. 이 영화의 내러티브를 기승전결의 전개구조(영화학에선 통합체분석이라고도 하는 것 같지만)로 보면 이 영화는 펀이 여행을 떠나고 그 여행이 갖가지 작은 위기를 맞다가 여행중단 즉 정착할 뻔한다는 ‘절정의 위기’를 맞았다가 다시 여행을 계속한다는 결말로 이어지는 구조입니다. 그 기승전결의 흐름 속에 펀이 만나는 노매드들의 작은 이야기들이 배치되어 있는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의 흘러가는 과정을 수평적으로 따라가 봤다면 이번엔 이 영화를 수직적으로 잘라서 들여다볼까 합니다. 영화학에선 아마도 계열체분석이라 할 겁니다.(제 기억이 맞다면...) 계열체 분석은 인물, 사건들의 의미를 각각 대립시켜서 보다 큰 의미를 추출하고 상징을 읽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일단 아까도 얘기했지만 노매드들은 각기 다른 사연들을 갖고 있습니다. 경제위기로 쫓겨나거나 자신의 삶에서 신체적 혹은 감정적인 큰 상실을 겪은 것들이죠. 경제적, 사회적, 가족애 적 다방면인데 공통적으로 보면 ‘상처’를 가진 이들이라고 할 수 있죠. 그에 비하면 이 영화에서 나오는 보통 사람들 즉 정착해서 사는 이들은 적어도 노매드들과 비교하면 상처가 없고 행복을 보여주는 ‘풍요’라는 공통점을 보여주고 있더군요.


  노매드(상실) : 정착민(풍요) 라는 대립구조죠. 


이렇게 대립구조를 의미를 풀어보면 이건 전통적인 옛 헐리웃 영화들 마냥 ‘야생 대 문명’, ‘피지배층 대 지배층’ 같은 이항대립구조들의 반복일 수 있습니다. 이런 영화들 특히나 서부극이 대표적이지만 떠도는 인디언이나 악당들이 터전을 잡고 있는 마을사람들과 대립하다 영웅의 개입으로 악당은 물러나고 평화가 찾아오는 것이죠. 그런데 물론 이 영화 ‘노매드랜드’가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는 건 굳이 설명 안해도 아실 겁니다. 오히려 영화 안에서 보면 노매드들은 상처를 가졌지만 선량한 사람들이고 오히려 그들이 가진 상처는 정착민들의 사회에서 비롯된 것들이 많습니다. 선악의 대립구조가 역전되는 셈이죠. 


  그런데 이런 역전은 한층 더 들어가 인물들의 행동의 목적을 들여다보면 한 차원 더 역설이  감지됩니다. 노매드인 펀이 떠도는 이유는 1차적으로 보면 상처 즉 상실 때문으로 보입니다. 남편을 병으로 잃었고 남편과 함께 살던 마을은 아예 경제위기로 버려졌습니다. 펀 자신을 둘러쌌던 세계가 없어졌고 그래서 그녀의 사회인으로서의 의미는 상실됐습니다. 그래서 떠돈다...이건 1차적으로 그냥 보여지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왜 떠도는 건인지 한 번 더 들여다봅시다. 펀은 그저 떠도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아마존에서도 물류노동자일을 임시직이지만 하고, 놀이동산에서도 역시 일을 하고, 농장에서도 일을 하면서 돈을 벌어 자신의 떠돌이 생활을 어떻게든 유지하려 합니다. 그 돈으로 계속 고물이 된 밴을 고치고 기름을 넣어 길을 떠도는 거죠. 어딘가에 멈춰 정주하지 않겠다는 의지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만 돌아오라”는 동생의 제안, 심지어는 한때 노매드였지만 이젠 아들과 함께 사는 데이브의 청혼마저 거절하고 여행을 계속합니다. 

  그건 펀이 어딘가에 붙들려 자리 잡는 순간 그녀가 상처 때문에 잃었던 그 상실이 채워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펀이 여동생의 집에 들어가 부동산업을 하는 그 가족들과 함께 산다거나 아들집에서 행복을 찾은 데이브와 함께 농장에서 사는 삶을 택하는 순간 ‘경제위기로 삶의 터전을 잃고 남편을 잃은 상처’는 채워져 없어집니다. 즉 역설적이지만 비워졌기에 유지됐던 그녀의 삶의 정체성이 사라지는 겁니다. 즉 정착하지 않는다는 부정을 계속하며 떠돔으로써 역설적으로 긍정 즉 그녀의 의미가 고정되는 겁니다. 펀의 멈추지 않는 유랑은 결국 한때 그녀가 가졌던 근원적 삶 즉 석회보드를 만드는 회사가 만든 작은 도시에서 그 회사의 사무원으로 일하며 남편과 함께 수십 년을 살았던 ‘근원적 삶’을 기억하고 지키는 노력이 되는 겁니다. 반면 펀이 보기엔 여동생과 남편의 부동산업은 서브프라임모기지 경제 사태에 기여한 것이기에 자신의 삶을 파괴했던 부조리와 같아 적대적으로 볼 수밖에 없고 아들과 함께 사는 데이브의 정착도 ‘남의 행복’일뿐 자신의 것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이 갖고 있는 삶의 기억을 사라지게 할 나쁜 ‘채움’인 것뿐이죠. 

  결국 노매드들의 정착에 대한 부정은 의미의 부정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각자가 가진 ‘삶의 의미’를 긍정하는 노력인 겁니다. ‘현재의 새 정착의 삶 a’도 아니고 ‘b’도 ‘c’도 다 아니기에 계속 그렇게 a,b,c를 다 부정함으로써 ‘과거의 바람직했던 삶 A’를 지키는 것이죠. 그렇게 거듭된 부정을 통해 의미를 고정시키는 역설은 사실은 현대사회의 의미화과정입니다. 짐작하신 분들도 많겠지만 소쉬르부터 시작된 현대언어학이 말하는 의미화과정 즉 ‘차이의 놀이’이죠. 책상이 책상인 건 의자가 아니고 탁자가 아니기에 그 외 다른 것들이 다 아니기에 결국 책상이 된다는 식의 논리...


  반면 정착한 사람들은 긍정으로 자신의 삶의 의미를 나타내지만 그 긍정을 정당화할 근거는 그 자체로는 없기에 부정될 수 있는 너무나 약한 의미인 셈입니다. 부동산업을 하는 여동생 가족의 직업적 안정성은 불경기가 오면 바로 흔들릴 것이고, 아들과 함께 사는 데이브의 행복도 화해한 것처럼 보이는 아들과의 관계가 다시 흔들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노매드(부정의 힘으로 삶의 의미를 강하게 지키는 사람들) vs 정착민(언제든 부정될 수 있는 약한 의미를 붙들고 있는 불안한 이들)로 대립되는 겁니다. 


  결국 영화 말미에 대사에서 언급되듯 노매드야말로 현대 미국을 만든 프론티어들처럼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이들이고 정착민들은 반대로 현대사회의 미약한 대중들의 은유가 되는 겁니다. 이동하는 자만이 자유롭고 끊임없이 자신을 바꿔가기에 그래서 창조적인 인간이라고 보는 ‘노마디즘’ 요즘 현대철학의 사고와도 일맥상통합니다. 


  정말 오랜만에 철학적 사고의 계기를 줬다는 점에선 볼만한 영화였습니다. 물론 극적 재미란 건 존재하지 않는 영화입니다. 미국 서부를 여행한 적 있는 사람들에겐 조금 더 그 황량했던 추억을 되살려주는 맛은 조금 있을 것이지만... 

작가의 이전글 위선자가 '된' 진보정치세력과  20대 남성들의 보수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