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크리스마스

by 김봉

기말고사가 끝나고 4학년으로 올라가기 직전

해커스 토익 듣기 파일과 기출문제를 제공해 준 선배에게서 연락이 왔다.

“봉아, 소개팅 할래? 오빠 친군데…”

진짜 소개팅을 하기 싫었지만 밥만 먹고 오라는 선배의 말에 크리스마스 이브날에 학교 앞 파스타 집으로 갔

다.

그날 차가 왜 그렇게 많이 막히는지 평소보다 30분 일찍 나왔는데도 40분이나 지각했다. 게다가 핸드폰 배터리도 나가서 연락도 안되던 상태였다.

‘갔을까? 갔겠지?‘

하면서 뛰어서 파스타집에 갔는데 소개팅남이 집에 안가고 40분을 기다린 것이었다


“오시면 먹으려고 안시키고 있었어요“

난 그 이브에 종업원들 눈치 받으며 안시키고 있었

을 생각을 하니 너무 미안해서 원래는 밥만 먹고 올랬는데 그날 파스타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맥주까지 마시며

이야기를 들었다.


소개팅남의 이야기는 진짜 재미없었다.

사람이 그렇게 재미가 없을 수가 없었다.

집에 왔는데 계속 생각이 났다.

자기 스타벅스를 처음 와본다고

까라멜 마끼야또를 가르키며

“이거 달아요? 안달아요?”

라고 엄청 느린 템포로 말하는거 하며 학교 잠바를 소개팅 자리까지 입고 나온거 하며, 촌스러운 체크 남방도 진짜 내 스타일 아닌데, 그 촌스러우면서 순진한 면이 계속 생각나게 하는 귀여움이었다.

소개팅남은 만날 때 마다 꽃을 선물 해 줬고,

저녁 11시가 넘는 시간에 이루마 피아노 곡을 치다가 아버지한테 뒷통수를 맞기도 했다.

소개팅남은 타고난 성실 + 아버지의 재력 + 천운으로

귀여운 토익점수 895점과 자교 쿼터제로 지거국이라는 부끄러운 졸업장을 가지고 치전원에 합격했다.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촌스럽고 순진한 소개팅남의 매력이 이기적이고 못되쳐먹은 것으로 변모하는 변곡점이

나도 4학년이라 새벽 3시에 일어나 학교로 가야했고, 소개팅남은 공부를 하다가 3시에 자러 가는 스케쥴이 반복됐다.

자러 가면서 모닝콜을 해주곤 했는데 3시 03분에

“내가 필요할 땐 나를 불러줘~” 하면서 전화가 걸려 왔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다정함은 점점 짜증으로 변해갔고,

내가 아프다고 하면

“내가 지금 갈께”

라고 해 놓고 연락이 없자 전화하면

“아 미안, 나 잤어…”

이런게 반복되었다.


취업준비에 너무 힘들어 하는 나를 보며

자기 동생도 치전원을 준비하는데 나도 해보라며 내 집안형편은 아랑곳하지 않고 가볍게 말하는 소개팅남의 태도가 섭섭했다.

간만에 데이트를 할 때면

“누구 여자친구는 외항사 승무원이래. 조여정 닮았대”

“누구 여자친구는 타대 의전원이래. 나도 같은 치과의사 만나고 싶다“


이런 말들을 내 면전에 늘어 놓을 때면

그가 타고 올라간 몇 계단의 사다리보다 그의 아버지 소유라는 양산 입구에 소재한 삐까 번쩍한 빌딩이 나를 더 주눅들게 했다.


난 대학시절 아르바이트를 할 수 밖에 없었는데, 시험기간이랑 겹치면 거의 스케쥴이 살인적었다.

일주일을 밤을 샜는데 학교를 마치고 학원으로 가서 애들 수업을 한 뒤, 다시 도서관으로와서 박카스 한병을 마시고 밤새 공부를 했다.

그런 와중에 소개팅남이 울면서 전화가 오곤 했다.

그도 시험기간이라 많이 불안하고 예민해서 내게 고민을 털어 놓았는데 고민들은 대략 이랬다

“아 우리 학교에 공부 잘하는 애들이 너무 많아.

내가 제일 열심히 했는데 나 오늘도 재시떴어.

내가 재시가 제일 많아.

나 학교 잘리면 어쩌지..“

라고 말하며 그렇게 울었다.

‘그렇게 자신 없으면 그냥 때려치워라’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고 올랐지만

또 그건 남자친구한테 하는 매너는 아닌 것 같아서

“오빠,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

나 진짜 딱 한번만 말할테니까 집중해서 들어.

지금부터 도서관에서 외우는거 머리 속에 바로 입력될거야.

내일 시험치면 머리에 사진 박힌 듯 다 생각날거야.

지금부터 단 1보도 물러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공부하는거야“

라고 용기를 주기도 했다.

내 공부는 산더미같이 쌓여 있으면서


그는 착했다.

내가 면접을 보러 간다고 하니 아울렛 모조에스핀에서 정장을 사줬다. 합격해서 맛있는 거 많이 사달라며

난 그 옷을 입고 어느 회사에 합격했고

결혼을 하자고 이야기를 꺼냈다


한참을 고민하더니 돌아온 답변이

날 너무 사랑한다는 이야기였다.나랑 헤어지는 건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며.

자기는 학교에서 공부할 때도 내 얼굴만 생각이 난다며

그런데 결혼은 부모님이 정해주시는 분과 해야 할 것 같다며

이걸 이해해줄 수 있냐며


그는 그런 멍멍멍 개소리도 참 착하게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인턴 기간에 처음 받은 월급 168만원이 통장에 찍히자마자 그에게 그때 20대 남자들이 많이 끼던 알마니 시계를 사주고 아웃백에 가서 먹고 싶다던 음식도 시켜 사주었다.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며

헤어지고 집에 오는 길에 문자로 헤어지자고 이야기했다.

끝이었다.


그 이후에 내 친구 결혼식에서,

또 한번은 해운대 카페에 혼자 책 읽고 있는데

어떤 남녀가 어색한 분위기에 소개팅을 하는 장면으로

또 한번은 내 친구 애기 돌잔치에서

그렇게 계속 마주쳤다.

우연히 들른 싸이월드에 우리가 헤어지고 난 뒤 게시판에 나를 그리워하는 글들로 채워져 있는걸 봤을 때도 그냥 그랬다.


내가 휴직할 때 즈음 영끌로 개원했다는 소식을 들었

다. 그것도 아주 크게.

이후 금리가 치솟는다는 뉴스를 볼 때 마다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래 니도 똥줄 한번 타봐야지‘

병원 홈페이지에 병원 운영시간을 확인해보니 야간진료 및 주말 진료를 불사하고 있었다.

진짜 고소했다.


이후 내가 스카에 쳐박혀 법문 외울 때 눈치 없는 내 친구가 그가 이번에 차를 바꿨다며, 같이 골프를 치러 가기로 했다며, 그가 참 괜찮은 사람 같다며 늘어 놓길래

내 친구 모르게 조용히 내친구를 차단했다.

우연히 검색하다가 보게된 그의 치과 소식은 흥미로웠

는데 젊줌마 사이에서 꼼꼼하고 진료를 잘하는 치과로 소문이 나있길래 ‘아 저 새끼도 밥벌이를 하는구나 인생 참 알 수 없다’ 하며 속으로 엄청 신기해했다.


하 그래 크리스마스다

내가 크리스마스로 선물로 사준 시계 어디 병원 면접 볼 때, 소개팅할 때 차고 다녔을 생각하니 억울하다.

다시 돌려줬으면 좋겠다.

벽에 걸어서 보는 한이 있어도 다시 돌려 받고 싶다.


나는 내가 그 시계를 사준다고 해서 잃어버린 자존심이 되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난 왜 내 한달 월급을 자존심 비용으로 지출하며 오기를 부렸을까


다 됐고,

모른척하고 이빨이나 무료로 해줬으면 좋겠다.

“네~ 환자분 여기 누우시고 아프면 오른손 드세요”

그러겠지.


크리스마스에 눈은 오지 마라

‘눈이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도 이제 지겨워 증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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