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따라 북 큐레이션 by 리딩리딩
아이일 때는 물론이고, 어른이 되어서도
'엄마'라는 단어는 각별한 의미로 다가와요.
엄마가 곁에 있든, 떨어져 있든,
엄마를 사랑하든, 미워하든,
우리의 시작점인 '엄마'라는 존재는
누구에게나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거겠죠. 숙명적으로.
감사한 엄마, 미운 엄마, 안쓰러운 엄마, 한없이 사랑스러운 엄마..
추억 속 엄마 모습을 떠오르게 하거나,
엄마를 향한 복잡미묘한 감정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거나,
엄마를 그린 책들을 읽으면서
'우리 엄마는..' 하고 추억에 빠져봅니다.
가끔 마음이 헛헛할 때
엄마가 생각나는 글을 읽어보세요.
리딩리딩의 추천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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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우리 자매의 책상은 방 베란다에 있었다. 우리는 서로 반대편 벽을 바라보고 앉아 숙제를 하고 문제집을 풀었다. 부모님은 ‘조금 추워야 공부가 잘 된다’고 하셨지만, 겨울에는 너무 추워서 스키복을 꺼내입어야 했다. 결국 우리는 빨갛게 곱은 손을 녹인다는 핑계로 책상 사이에 놓인 라디에이터에 앉았다. 거기서 창밖에 눈이 쏟아지는 걸 같이 보았다. 더 이상 손이 시리지 않아도 책상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눈이 그치고, 풍경이 푸르러지고, 장맛비가 쏟아지고, 하늘이 아주 파랗던 날에도 우리는 라디에이터 위에 앉았다. 눈송이도, 빗방울도, 나뭇잎도, 창가에 모여 우리 이야기를 들었다. 작은 베란다를 채우던 라디에이터의 온기, 어린 동생의 웃음소리, 부모님은 모르던 우리의 조그만 세상. 이런 것들을 떠올리면 내 마음은 따뜻하게 부풀어 오르다가, 그만 흘러넘칠 것 같다. 갑자기 눈물이 차올라 어쩔 줄 몰라 하게 된다.
나에겐 베란다였다. 때론 이불 속이었고, 놀이터 그네였고, 아파트 화단의 커다란 바윗돌이기도 했다. 어린 내게 말을 걸고 뛰놀게 하고, 그리하여 나라는 사람을 만들고 키운 공간들. 내 유년의 기억을 담고 있는 곳. 「막내의 뜰」 표지 속 오밀조밀한 집의 평면도와 화단과 텃밭을 들여다보며 떠올린 건 그런 공간들이다. 책을 펼치지 않고서도 이 책이 한 사람의 유년을 품고 있다는 걸, 그 세계가 나의 유년을 호출하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벌써 코끝이 간지러웠다.
물이 데워지면 아버지가 제일 먼저 목욕을 했다. 그리고 큰언니, 작은언니, 큰오빠, 작은오빠 순으로 때를 밀었다. 그때마다 탕 안에는 둥둥 때가 떴다. 엄마는 뜰채로 때를 걷어내고 탕 안의 물이 줄면 다시 찬물을 붓고 아궁이에 불을 땠다. 한 사람이 탕 밖에서 때를 벗기며 씻는 동안 다른 사람은 탕 안에서 때를 불렸다. 그 사람이 나와 때를 벗기면 그다음 언니오빠가 탕 안으로 들어가 때를 불렸다. (37P)
막내 위로는 큰언니, 작은언니, 큰오빠, 작은오빠, 별언니, 밝오빠가 있다. 식구들은 막내를 ‘막내야’라고도 부르고, ‘맑음아’, ‘달님아’, ‘오메 오메 내 강아지’라고도 부른다. 이제 예순다섯이 된 막내는 태어나서부터 열한 살이 될 때까지 살았던 크고 작은 집들을 모두 기억한다. 언니 오빠들의 장난과 더운 목욕물에 들어가는 순서, 키우던 개와 닭과 염소들, 화단에 핀 꽃과 뜰의 무화과나무를 다 그릴 수 있다. 이 모든 걸 기억하는 건 막내의 하루하루가 낯설고 신기하고 신나고 행복하고 지루하고 무섭고 외롭고 슬펐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모두의 어린 날처럼. 그리고 그 기억을 절대 잃어버리지 않도록, 막내를 꼭 끌어안고 지켜준 커다란 사랑이 있다.
“내 강아지는 이 세상에서 누가 젤로 좋응가?”
“엄마!”
“그라제. 엄마도 우리 막내가 최고로 이쁘네.
내 강아지를 안 낳았으면 어쩔 뻔해쓰까잉?” (39P)
막내는 울음을 그치고 아버지 방으로 갔다. 아버지는 막내가 입은 하늘색 원피스를 보더니 “우리 딸이 하늘 한 조각을 걸치고 왔구나.”하며 다정하게 말을 건다. (134P)
“리리리 자로 끝나는 말은 개나리 보따리 꾀꼬리 목소리 큰언니 종아리.”
노래를 부르다 보니 유난히 통통한 큰언니 종아리가 떠올랐던 것이다. 큰언니는 와하하 큰 소리로 웃었다. (140P)
어머니는 마흔 넘어 일곱째 아이를 낳았다. 대식구 살림을 챙기는 와중에도 어미 잃은 고라니에게 ‘밤비’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염소들이 비에 젖을까 뛰어다니는, 사랑이 많은 분이었다. 막내는 엄마의 ‘강아지’였다.
아버지는 ‘맑은 골짜기’라는 뜻이 담긴 우리말 이름을 막내에게 지어주었다. 매일 아침 막내를 데리고 뒷산에 오르고, 겨울에는 자녀들과 며칠씩 본격 산행에 나선다. 아무리 위험한 빙판길이 나와도 앞서갈 뿐, 뒤돌아보지 않았다. 막내는 한 발, 한 발, 내딛을 걸음을 직접 결정해야 했고, 벌벌 떨며 산을 내려와서는, 다음엔 또 어딜 갈까 궁금해했다. 막내는 아마 평생을 아버지 뒤에서 산행하는 마음으로 야무지게 살아오지 않았을까. 네가 할 수 있다는 걸 내가 안다는, 뒤돌아보지 않는 아버지의 무한한 신뢰 속에서.
드디어 우물 바닥에 내려섰다. 종아리까지 올라오는 우물물은 따스했다. 위에서만 바라보던 우물 속 찰랑대는 밑바닥을 가까이서 들여다보는 희열은 뭐라 표현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막내는 밖으로부터 단절되어 혼자 있다는 게 좋았다. (232p)
별언니는 지붕에 올라가고, 막내는 우물에 들어간다. 어린이도 외롭고 슬프다. 외롭고 슬픈 마음이 잦아들기를 가만히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있다. 그래서 어린 시절 ‘비밀 장소’에 대한 기억은 각별하다. 나는 아빠 서재에 딸린 작은 베란다에 자주 웅크리고 있었다. 거기선 식구들의 목소리도, 텔레비전 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고 햇살과 눈물이 뒤섞여 세상 모든 게 흐릿하고 따뜻했다. 가만히 빛을 받고 앉아있다 보면, 내가 왜 울고 있는지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조금 졸리고, 배도 고프고. 이제 나가야겠다, 눈을 쓱 문지르고 식구들 곁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왜 지금은 비밀 장소가 없을까? 지금은 잔소리하는 엄마도, 말다툼할 동생도 곁에 없고 혼자이기 싫어도 늘 혼자다. 혼자 앉아 스마트폰을 열면 온 세상이 소란하다. 내 비밀 장소가 사라진 건 언제부터였을까. 정직하게 제 몫의 슬픔을 껴안을 수 있는 존재는, 어쩌면 어린이들 뿐이다.
막내의 뜰을 빠져나오며, 눈앞에 아른거리는 지난날의 풍경을 애써 흩어버린다. 이제 자야 하고, 늦지 않게 출근해야 하고, 예정된 일과들이 제때 맞춘 기차처럼 줄지어 찾아올 테니까. 아릿한 향수에 젖어서는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으니까. 그렇지만 눈을 감아도 풍경은 사라지지 않는다. 내가 살던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집…놀이터, 학원 가는 길, 피아노 연습실, 합창 연습을 하던 강당, 성당 교리 선생님, 경비 아저씨…아아 망했다…처음 가져 본 미미 인형, 포도 모양 머리 방울, 노란색 롤러스케이트, 너무 예뻐서 땅속에 숨겨둔 파란 꽃송이까지 다 생각나 버렸다. 잠들 수 있을까? 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려서 어쩌지? 슬프지 않은데 눈물이 왜 나지? 한꺼번에 밀려든 기억에 나는 속절없이 허우적댄다. 아무래도 이 파도에 몸을 싣고 넘실넘실 찾아오는 기억과 일일이 부딪쳐야 하나 보다. 꿈에 닿을 때쯤엔 유년의 뜰 한가운데 있겠지. 말 없고 잘 울던 어린이로 돌아가, 귀여운 내 동생 손을 잡고서. 어쩌면 내일 아침은 정말 눈을 뜨기 싫겠다.
Written By Yeonsu Na(SOUL CUR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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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서울시장의 죽음 이후 사람들의 시선을 붙들게 된 소설이 있습니다.
정세랑의 장편 ‘시선으로부터,’입니다. 이 대목 때문이었죠.
“어떤 자살은 가해였다. 아주 최종적인 형태의 가해였다.”
이 문장을 KBS 뉴스9가 인용해 박 시장 죽음에 대해 논평하면서 논란이 일었습니다. 가해자의 죽음으로 인해 피해자가 도리어 비난 받게 되는 상황에 대한 일갈입니다. 공감하시나요?
‘시선으로부터,’는 20세기 한국 여성에 대한 사모곡입니다. 심시선은 분단과 전쟁과 독재와 착취와 폭력으로 점철된 20세기를 살아낸 생존자입니다. 간첩으로 몰려 죽지 않기 위해 ‘사진 신부’로 꾸며 하와이로 건너갑니다. 거기서 세계적인 화가 마티아스에게 ‘수집되어’ 독일로 갑니다. 마티아스의 폭력에 끝내 파괴당하지 않고 살아남아 한국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남성) 예술가와 (여성) 배우자 혹은 연인’ 구도에 저항합니다.
“우리에게 있었던 일은 사람들이 그리는 것처럼 절절하게 아름답지도 바닥까지 추악하지도 않았다.”
“그 집에서 나는 다락에, 그늘에 존재했다. 파티의 전과 후에 존재했고 파티 중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중략) 나는 잡역부였고 조수였고 아주 가끔 제자였다. 운이 좋지 않은 날에는 분풀이 대상이었고 말이다.”
동시에 심시선은 자유로운 인간으로 살고자 하는 고유하고 독자적인 인물입니다. 작가이자 평론가로 정체성을 쌓아 올립니다. 일상에서도 ‘전통적인 어머니 상’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살림에 전혀 관심이 없어서 부엌에서는 버섯이 자랄 정도였습니다. 성공적인 결혼의 필수요소가 ‘폭력성이나 비틀린 구석이 없는 상대와 좋은 섹스’라고 대답하고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아이, 남편들이랑 무슨 대화를 해요? 그네들은 렌즈가 하나 빠졌어. 세상을 우리처럼 못 봐요. 나를 해칠까 불안하지 않은 상대와 하는 안전한 섹스, 점점 좋아지는 섹스 정도가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소설의 앞부분에는 ‘시선으로부터’ 뻗어나온 가계도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입체적 인물인 심시선이 복잡하고 다양한 후대로 이어진 겁니다. 첫 결혼에서 낳은 명혜 명은 명준, 두 번째 남편이 전처 사이에서 낳은 의붓딸 경아가 있습니다. 그 아이들이 낳은 화수 지수 우윤 규림 해림은 성씨가 제각각인데도 어쨌거나 사촌으로 어울립니다. 신 모계사회의 모습이랄까요.
시선으로부터 뻗어나온 고민들은 21세기에도 온존합니다. 정세랑은 31개 장 앞부분마다 심시선이 과거에 했던 말, 썼던 글들을 배치해 두었습니다. 그 뒤에는 심시선의 자손들이 겪는 현재를 엮어 썼습니다. 서울과 하와이, 독일까지 공간을, 또 과거에서 현재로 시간을 호방하게 넘나들면서도 문제의식은 분명합니다. 스펙트럼도 폭넓어서 여성, 생태주의, 경제민주화, 폭력, 예술, 인종차별, 아동 성착취, 학벌사회 등 다양한 층위에서 이상과 현실의 충돌을 보여줍니다.
이야기 속에서 21세기는 20세기가 한 말을 이렇게 기억했습니다.
“여자도 남의 눈치 보지 말고 큰 거 해야 해요. 좁으면 남들 보고 비키라지. 공간을 크게 크게 쓰고 누가 뭐라든 해결하는 건 남들한테 맡겨버려요. 문제 해결이 직업인 사람들이 따로 있잖습니까? 뻔뻔스럽게. 배려해주지 말고 일을 키우세요.”
어디 여성만 그럴까요. 누구나 남의 눈치 보지 않고 큰 걸, 혹은 작더라도 즐거운 일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모두가 어느 누구에게도 포획 당해 굴종하지 않고 독립된 자아로 행복을 추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당장 해보세요. 일단은 작은 것부터. 그리고 남 배려해주지 말고 일을 키우세요. 20세기에도 그렇게 살았던 심시선처럼.
Written By KI(VIEW CUR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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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Dahyeh Lee(STORY & CLASSIC CUR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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