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PICTUREBOOK 카테고리에서 가장 많이 읽힌 책
리딩리딩이 책을 구분하는 기준인 8개 카테고리 중
<PICTUREBOOK>에서는
그림책을 소개해왔는데요.
리딩리딩에서 2021년 가장 많은 호응을 얻은 그림책*은
<파도가 차르르>였습니다. (*페이지뷰 기준)
이외에도 <세상 끝에 있는 너에게>,
<모른다는 건 멋진 거야>의 리뷰가
많이 읽혔습니다.
올해를 마무리 하면서, 다시 한번 들춰보면 좋을
리딩리딩의 PICTUREBOOK 카테고리 추천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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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와 인스타그램 프로필부터 출간한 책의 저자 프로필까지, 자기 소개가 필요한 공간이면 어디든 이렇게 적는다.
‘최혜진, 자발적 마감노동자’
꽤나 박력이 느껴지는 이 문구는 2013년, 내가 백수이던 시절에 지어낸 것이다. 정색하고 힘을 잔뜩 준 데에는 나름의 사연이 있다.
퇴사 전, 이름난 잡지사에서 에디터로 일했다. 어느 취재원에게 전화를 걸어도 “어디에 누구입니다”라고 소개하면 상대가 알아들었다. 내 이름 석자 앞에는 늘 매체(조직) 이름, 직함이 놓였다. 처음에는 그 사실이 근사했다. 크고 빛나는 조직의 이름을 내 이름 앞에 놓으면 내 이름의 가치도 그만큼 높아지는 것 같았다. 물론 타이틀은 그냥 주어지지 않았다. 월간 패션지에 실리는 기사 1꼭지의 제작 사이클은 대략 이렇다.
기사 배당 → 시장 조사 및 자료 조사 → 기획안 작성 → 시안 찾기 → 편집장 컨펌 → 촬영 스태프 꾸리기 → 촬영 일정 정리 → 촬영 장소 및 동선 정리 → 스태프들과 시안 회의 → 촬영에 필요한 제품 및 소품 픽업 → 촬영 → 사진 셀렉 및 후반 작업 조율 → 원고 쓰기 → 원고 편집장 컨펌 → 편집 디자이너와 레이아웃 상의 → 최종 지면 편집장 컨펌
한 달에 기사를 10꼭지 배당 받으면 이 사이클을 10세트 돌리는 것이다. (나는 보통 10~12꼭지를 배당받았다.) 기사마다 진행 속도가 제각각이라 A기사 원고를 쓰다 말고, B기사 촬영 장소 섭외를 위해 공문을 돌리고, C화보를 찍어줄 외주 포토그래퍼와 전화 통화를 하고, D기사 시안 문서를 만들다가, 잠시 손이 비면 다시 A원고 쓰기로 복귀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정기간행물에서 마감은 목숨이고, 지면 펑크는 상상하기도 싫은 최악의 수치다. 결론은 언제나 하나. “화급! 화급!” 사이렌을 울리는 수많은 업무 사이에서 놀란 토끼처럼 이리저리 날뛰는 정신을 붙들고 원고를 썼다. 기한 내 완성이 이미 커다란 도전이어서 마침표 찍기 급급했던 원고들. 그래서 오랫동안 미워했던 내 원고들.
충분한 시간을 쓰며 깊이 고민하고, 필요한 과정을 차근히 밟아 멋진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창작자를 취재하고 온 날이면 속이 더 시끄러웠다. 기술 점수, 예술 점수까지 챙길 겨를이 없어서 일단 헐레벌떡 경기를 끝낸 피겨 스케이팅 선수가 김연아 선수를 바라보는 느낌이라고 설명하면 될까. 글쓰기를 향한 애정을 더 이상 잃고 싶지 않아 10년 차에 사표를 냈다. 직함과 조직명을 지우고 글 쓰는 사람이 되어보고 싶었다. 자발적 마감노동자라는 포부 과잉의 말이 탄생한 배경이다.
이제 나에게 어떤 글을 쓰라고 누구도 배당하지 않는다. 어떤 글에 얼마의 시간을 들일지 스스로 정한다. 회사 밖에서 오롯이 내 손으로 일군 소박한 현실이 좋고, 감사하다. 그런데 가끔은 울고 싶은 기분이 든다.
스스로 세운 계획에 맞추어 시간과 노력을 쏟아붓고 있지만 좀처럼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 내가 밟아가는 과정과 행위가 결국 무엇이 될지 아직 모르겠다 싶을 때, 결론을 확답할 수 없을 때, 뭔가를 만들긴 했는데 그 안에 어떤 의미와 쓰임이 있는지 보이지 않을 때, 지속가능한 커리어를 만들어가고 있기는 한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을 때… 이 ‘알 수 없다’는 느낌의 무게가 자신감을 모조리 짜부라뜨리는 날엔 내적 비명을 지른다. ‘악! 차라리 누가 이래라 저래라 시켜주면 좋겠다!’
맷 마이어스의 그림책 <파도가 차르르>를 처음 본 날도 그런 날 중 하루였다. 바닷바람이 머리칼을 온통 헤집는데도 고요히 모래를 쌓고 있는 아이의 표정에 끌려 책을 열었다.
“제이미는 바다와 친구예요.
제이미가 흠흠흠, 노래를 부르면
파도가 다가와요. 차르르르르.”
첫 펼침면을 보자마자 헉, 숨이 들이켜졌다. 유화로 재현한 바닷가의 풍광-바람소리, 파도의 출렁임, 모래의 촉감, 작은 웅덩이의 물빛-이 쏟아질듯 성큼 다가왔기 때문이다. 압도적인 풍경 묘사 이후엔 제이미의 모래 놀이 과정이 이어진다. 제이미는 해변에서 주워온 돌멩이, 깡통, 병뚜껑, 나뭇가지로 어떤 형상을 만들고 있다. 어느 정도 쌓았나 싶다가도 다시 무너뜨리고, 잘 풀리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모래 더미를 도닥인다.
바다는 제이미를 채근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지만, 오가는 사람들은 자꾸 말을 건다. “얘야, 뭘 만드니?”, “그걸 해서 뭐 할 건데?”, “그 작업은 언제쯤 완성하실 생각이에요?”라고 조급하게 결말을 궁금해하고, “아유, 예뻐라!”, “말을 만들었구나”라면서 제이미의 작품을 좋을대로 짐작하기도 한다.
이런 주변의 말에 제이미는 퉁명한 표정으로 답한다. “아직 몰라요”, “글쎄요” 빨리 결론을 내라는 주변의 독촉에도 제이미는 허둥대지 않는다. 사람들의 관심에 에너지를 뺏기지 않고, 계속 손을 움직인다. 지었다가 허물고, 쌓았다가 무너뜨리고, 꽂았다가 빼고, 올렸다가 내린다. 제이미가 궁리하는 사이에 백발의 화가가 해변에 도착한다. 제이미 옆에 자리를 잡고 이젤을 펼치지만, 화가는 제이미에게 어떤 말도 걸지 않는다. 이번에는 제이미가 화가에게 질문한다.
“뭘 그려요?”
“아직 잘 몰라요.”
“나도요.”
이 대화 장면에서 코끝이 매워지고 눈앞이 뿌얘졌다. 책 속 바닷가로 와락 뛰어들어가 “저도요. 뭔가를 만들고 있는데, 무엇이 될지 잘 모르겠어요”라고 화답하고 싶었다.
새롭게 무언가를 도모하고 궁리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암흑 속을 걷는다. 정해진 길을 가는 게 아니므로 본인조차 걷고 있는 길을 설명하거나 목적지를 예측할 수 없다. 깜깜함 속에서 더듬거리며 가능성을 하나씩 지워갈 뿐이다. 해보고, 깨닫고, 버리고, 배우고, 다시 해보면서 겨우 한발짝만큼의 자기 확신을 만들어간다.
담담하게 자기 세계를 만들어가는 작은 사람, 제이미를 지켜보며 생각했다. 창의성이란 불확실성 안에서 머물 줄 아는 능력 아닐까. 쉽게 결론 짓고 싶은 마음과 싸우면서 ‘아직 잘 모르는’ 상태 안에서 필요한 만큼 머물 줄 아는 능력.
지금 어떤 방식으로든 새로운 궁리를 하고 있는 중이라면, 만들어내고 싶은 무언가가 있어서 혼자만의 분투 중이라면 <파도가 차르르>가 묵직한 울림으로 다가갈 것이다. 나는 이 책을 만난 뒤, ‘아직 잘 모르는’ 상태의 나를 덜 버거워하게 되었다.
Written By Hyejin Choi(SOUL CUR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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