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주신 손자 등록금
장모님은 해수욕장을 끼고 있는 어촌마을로 시집을 가서 자식 5명을 낳아 키우셨다. 남편 먼저 보내시고 혼자서 여전히 그곳에 살고 계신다. 해수욕장이 있는 마을에 위치한 처가는 민박을 하고 있다. 해수욕장을 끼고 있지만 80년대 지어진 오래된 집이라서 성수기가 되어도 손님이 차지 않거나 공칠 때가 많다. 연세 많은 장모님은 허리도 많이 굽으시고 몸도 아픈 부위가 해마다 늘어난다. 장인어른이 병으로 돌아가신 후 집을 돌볼 힘도 거의 없으시고 청소나 겨우 할 정도가 되었다. 연세 많은 장모님만큼이나 집도 아픈 곳이 많아지고 손 볼 곳이 많아졌다. 요즈음 펜션이나 민박집에 필수적으로 있어야 할 에어컨, 개별 화장실, 싱크대 등 필수 가전제품이나 가구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다 보니 손님들은 시설 좋은 다른 집으로 가게 된다. 옛날 감성을 느끼고 싶다거나 오랫동안 인연이 있다거나 다른 집들 민박이 다 차서 갈 곳 없는 손님들이 싸게 묵으려고 찾아가는 집이 되었다.
내가 결혼했을 때만 하더라도 처갓집은 그 동네에서는 꽤 잘 나가던 민박집 중 하나였다. 집이 두 채, 방은 10칸으로 되어 있는 파란 지붕의 전형적인 어촌 가옥 형태이다. 넓은 마당과 바로 앞에는 모래사장이 펼쳐진 바다를 끼고 있으니 여름 내내 손님이 넘쳐났다. 여름 시즌이 끝나면 장인어른 내외는 1년을 살아갈 목돈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신년이나 황금연휴 때는 한 달 전에 이미 예약이 끝나고는 했다. 그곳에서 내 아들과 딸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자랐다. 정말 넘치도록 받으며 자랐다. 아내와 나는 맞벌이 부부라서 긴 육아 기간에는 늘 바빴다. 장모님은 애들이 부모 손을 덜 타는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 때까지 헌신적으로 돌봐 주셨다. 우리 부부는 회사 일로 늦는 일이 잦다 보니 애들을 처갓집에서 재우는 일이 다반사였다.
첫째 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을 때쯤의 일이다. 퇴근 무렵에 아내한테서 전화가 왔다. 장모님이 백만 원을 주겠다고 집에 들르라고 했나 보다. 안 받고 안 간다고 했지만 고집을 꺾지 않으시고 계속 전화를 해서 너무 속상하다고 하소연을 했다. 당신 병원비로 쓰기에도 턱없이 모자라는 돈인 데다 민박해서 모은 돈 전부라는 걸 아내는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안쓰러운 마음과 불효된 마음, 그리고 속상한 마음이 뒤섞여 다소 신경질적이면서도 울먹이는 목소리였다. 나는 장모님이 백만 원을 주시려고 하는 이유를 듣고 나서 차분하게 아내를 설득했다. 장모님은 이렇게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손자가 내년이면 대학교 들어가는데 등록금 내 줄 형편은 못 되고, 조금이라도 보태고 싶어서 그런다. 앞으로 더 이상 이렇게 주기가 힘이 들 거 같아서 그런다."
나는 아내의 얘기를 다 듣고 나서 장모님한테 가서 백만 원을 받으라고 했다. 받지 않는다면 장모님 여생동안 계속 마음의 짐으로 남을 건데 그런 마음을 남겨드리지 마라고 했다. 장모님이 주시려는 돈은 손자에 대한 깊은 사랑이자 그것밖에 줄 수 없는 처지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뒤섞여 있었다. 우리에게는 많지 않은 돈이지만 장모님에게는 큰돈이었을 백만 원은 약해져 가는 몸으로 벌 수 있는, 어쩌면 마지막 목돈일지도 모른다. 아내는 장모님이 주신 백만 원을 받아와서 나에게 주었다. 나는 우리가 그 이상으로 틈틈이 용돈을 드리자고 했다. 아내가 나에게 건네준 장모님의 한 묶음 백만 원을 몇 번이나 만지며 장모님 얼굴 보 듯 바라봤다.
'앞으로 더 이상 주기는 힘들 거 같다'라는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에필로그>
장모님이 주신 백만 원은 등록금으로 쓰면 사라질 것이기 때문에, 아들이 초등학교 시절부터 갖고 있던 아들 명의 증권계좌에 넣었다. 내가 보호자로 관리를 해주고 있다가 20세 성인이 되자마자 넘겨주었다. 4년이 흘렀다. 아들에게는 그 계좌에 할머니의 큰 사랑이 담긴 소중한 돈이 들어있다는 걸 잊지 마라고 강조한다. 이제 그 돈은 아들만큼 성큼 성장을 해서 할머니가 미안해하지 않을 정도의 금액이 되었다. 할머니가 주신 백만 원이 손자에게 큰 사랑의 자산으로 남아서 힘들 때마다 일으켜 세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