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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nheur maman Jun 22. 2021

세 아이의 엄마

다둥이 엄마, 현실이 되었다. 

외로움을 잘 타는 편이다. 그래서 그런지 어렸을 때부터 결혼하면 집이 좀 북적북적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결혼식 주례 목사님께서 자녀 계획에 관해 물어봤을 때도, “둘 이상이요.”라고 대답했다. 직접 경험하지 않은 거라 막연하게만 생각했었다. 

현실은 리얼이었다. 한 명은 사랑스러운 엄마 껌딱지이고, 또 한 명은 귀여운 애교쟁이다. 친구 같은 아들, 연인 같은 아들로 인해 귀염둥이들을 향한 엄마 미소가 끊임없이 발사된다. 덕분에 웃음이 끊기지 않는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물론 힘들 때도 있다. 아이 둘이 뛰놀다 싸우기를 반복하면 정신이 하나도 없다. 이견을 조율하면서 화해시키다 보면 어느새 난 안드로메다로 가 있다. 하루가 어찌 지나갔는지 모를 때도 많다. 아들들 성향도 달라서 각자의 역할을 그들의 자리에서 나의 로망 북적북적한 느낌을 하나둘 채워주고 있었다. 막상 키워보니 아들 둘도 충분했다.

어느 날 집 앞에 앉아있다가 마침 택시를 타는 아들 둘 가족을 보았다. 아이들은 중고등 학생 정도 되어 보였는데 나도 모르게 얘기했다. “우리 아이들이 저렇게 키가 훌쩍 크면 어떻게? 아들 둘은 뭔가 삭막하겠다.” 남편이 얘기를 듣더니 웃으며, “아들 둘이 든든한 게 아니고 삭막하다고?” 막연히 딸에 대해 아쉬움이 있었나 보다. 그래서였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딸이 찾아왔다. 혹시나 초음파상으로 정확하지 않을까 봐 니프티 DNA 검사도 했다. 나에게도 딸이 생긴다니. 병원에서 성별 얘기를 들을 때, 기뻐했던 남편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리고 지금 나는 삼 남매의 엄마가 되었다. 나의 북적북적한 꿈이 이루어졌다. 행복이 성큼성큼 나에게 다가왔다.


막연한 생각이 있었다. ‘난 나중에 아이가 태어나면 이렇게 할 거야.’ 

나의 다짐과 계획들은 막상 아이가 태어나고는 달라졌다. 나 중심이 아니라 모든 것이 아이에게 맞춰졌고, 나에겐 그게 당연했었다. 그러다 보니 상상은 현실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현실 육아인 건가? 

아이는 스스로 잠드는 줄 알았다. 그렇지만 현실은 잘 재워줘야 잠자리에 들었다. 첫째 때 ‘아이의 힘주기’가 뭔지 몰라서 100일이 넘도록 비스듬히 누워 품에서 아이를 재웠다. 한번을 제대로 푹 잔 적이 없는듯하다. 어느 정도 아이가 크면 방 분리를 하여 재우려고 했다. 하지만 아직 모두 다 같이 패밀리침대에서 옹기종기 붙어 잠자고 있다. 첫째가 내년이면 초등학교에 갈 나이가 되었지만 말이다. 더불어 나의 팔베개와 팔꿈치는 그들의 애착 아이템이다. 새벽에도 찾는 팔베개와 팔꿈치를 만지작거리는 손길 덕분에 몇 년째 푹 자본 적이 없다. 

모유 수유는 6개월이면 끝날 줄 알았다. 아이 알레르기 때문에 첫째는 13개월 하였다. 둘째는 빨리 끝내려 했으나 둘째의 애교에 녹아 16개월의 완모를 선물해주었다. 그리고 지금 나도 모르게 자연스레 셋째도 모유 수유를 하고 있다. 그동안의 기억상실 덕분에 3, 4시간마다 찾아오는 수유 텀은 새롭기만 하고 나의 외출은 유축없이는 허락되지 않을 듯하다. 모유 수유의 편리함 때문일까, 세 아이를 공평하게 해줘야 한다는 나의 마음가짐일까, 설거지의 귀찮음 때문일까 아직 딜레마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 

아이들 밥은 아이 교육 및 습관을 위해 식탁에서 정해진 시간에만 먹이려 했다. 지금 나는 야채 안 먹으려 하는 아이를 위해 매일같이 어찌 먹일까 연구하고 있다. 조금은 떠먹여 주더라도 스스로 먹으라고, 자리에 앉아서 먹으라고 백만 번 잔소리는 덤이다. 아이가 정해진 분량을 어느 정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려준다. 

특별히 자매가 싸우지 않으면서 컸었기에 형제, 자매끼리 싸우는 건 상상도 못 했다. 우리 첫째, 둘째도 두 살 차이지만 ‘설마 싸우겠어?’라 생각하며 남편의 경험담도 듣지 않았다. 우리 아이들은 안 그럴 거야.’ 단순히 생각했다. 둘째의 튼실한 발육으로, 25개월 차이인데도 몸집이 비슷한 아이들은 하루에 한 번 이상은 언쟁이 벌어지고, 누군가는 운다. 누가 먼지인지, 하나부터 열까지 서로가 경쟁한다. 뭔가가 있으면 “나도, 나도!”를 외치며 달려온다. 무엇이든 두 개를 준비해야 하는 게 현실이다. 내가 상상한 건 이게 아니었는데. 

냉정하게 거절을 잘 못 한다. 혹시나 거절하면 상처받을까 싶어서 웬만하면 안 하는 편이다. 그래서 단호하게 해야 할 땐 남편의 도움을 받는다.. “아빠한테 물어봐.”, “아빠한테 허락받고 와.”라고 얘기한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은 아빠가 뭔가 안된다고 하면 엄마에게 달려온다. “엄마, 아빠가 안 된대, 엄마가 아빠한테 얘기해봐.” 아무리 엄마는 모른다고 해도 아이들은 나를 파악하고 있다. 엄마가 계속 얘기하면 넘어갈 거라는 걸.


상상했던 것과 현실 육아는 달랐다. 그리고 생각한 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아이들은 각자의 생각과 의견이 있으니 존중해줘야 했다. 당연할 수도 있지만, 아이가 어리다 보니 나 개인의 삶보다는 모든 포커스가 아이에게 먼저 맞춰지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나는 그러지 않을 것 같았는데, 아이가 태어나니 모든 게 달라져 버렸다. 

 아이들에게서 내가 보인다. 나의 성향이 보이고, 내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 나의 기질이 아이들 각각에 스며들어있다. 또 다른 기질이 들어있기도 한다. 기질에 따라서 각각 다르게 대해야 하고, 부모의 기질과 아이 기질과의 차이도 있기에 맞춰나가야 할듯하다. 아이들을 키우며 엄마도 큰다고 하는데, 그 말이 새삼 느껴진다. 완벽주의 성향 중 하나인 아니면 아니라고 얘기하는 것을 아이를 통해 보고는 반성한다. ‘내가 저런 모습이었을까?’ 생각한다. 발표할 때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예전 나를 보는 듯하다. 경험자로서 어떻게 도와줄지, 삶을 살아가는 지혜를 어찌 조언해줄지를 항상 고민하게 된다. 보지 않았던 육아서적도 뒤적거리게 된다. 유튜브에서 어떤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찾아보기도 한다. 여러 강연도 들으며 생각해보기도 한다. 엄마도 완벽하지 않기에 육아는 공부해야 한다. 그리고 알게 된다. 육아는 깨달음의 연속이라는 걸. 배우고 부딪치고 이것 또한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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