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아카이브 9. 상처를 마주할 용기
나는 상처를 (무척, 매우, 심하게) 잘 받는 편인데 좋게 표현하면 마음이 여린 것이고 직설적으로 말하면 마음이 나약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예민한 성격 탓에 상대의 별것 아닌 행동이나 말에 상처받기도 하는데 이런 성격을 굳이 장점으로 승화시키면 예민한 만큼 타인의 감정 변화를 금방 알아차리고 공감력이 좋은 편이라는 것. 하지만 올해는 이런 성격을 바꿔보자 다짐했다. 매사에 촉각을 곤두세우기보다는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 보기로. 소개할 2편의 영화 속 주인공들이 겪은 풍파에 비하면 나의 상처는 사소하게 느껴지지만, 그들이 얼마나 큰일을 겪었는가 보다 그들이 상처를 치유하는 방식에 집중하고 싶었던 영화다.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데이비드 O. 러셀, 2013년 개봉
아내의 외도를 목격하고 폭발한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 아내와 직장은 물론이고 정신까지 잃은 남자 팻. 8개월의 병원 생활 후 ‘긍정의 힘’을 외치며 아내와 자신의 인생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지만, 여전히 감정 조절은 어렵고 아내에게는 접근금지명령 상태라 잃어버린 인생 되찾기는 쉽지 않다. 그러던 중 초대받은 저녁 식사 자리에서 알게 된 티파니. 남편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에 회사 내 모든 직원과 관계를 맺고 해고당한 것도 모자라 거침없는 말과 행동으로 팻의 인생에 뛰어든다. 팻의 조깅 코스에 불쑥불쑥 나타나고 함께 자자는 말을 거침없이 내뱉는 티파니가 부담스러운 팻에게 그녀는 헤어진 아내와의 재결합을 도와줄 테니 자신과 함께 댄스 대회에 나가달라는 제안을 한다. 과연 팻과 티파니는 상처받고 망가진 멘탈을 회복하고 그들만의 ‘실버라이닝’을 찾을 수 있을까?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은 매튜 퀵이 집필한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로 상처받은 두 주인공의 정신적 회복과 성장을 그렸다. ‘실버라이닝(Silver Linings)’은 햇빛이 구름 뒤에 있을 때 구름 가장자리에 생기는 은색 선을 뜻하는 말로 희망을 나타내고, ‘플레이북(Playbook)’은 스포츠팀의 공수작전을 그림으로 표현한 책을 뜻하는데 제목인 ‘실버라이닝 플레이북(Silver Linings Playbook)’은 일종의 희망 가이드북인 셈. 영화는 제85회 아카데미 여우주/조연, 남우주/조연, 감독, 각색, 편집, 작품상에 노미네이트 되며 평단의 호평을 받았고, 제니퍼 로렌스는 불행을 등에 짊어진 미망인을 완벽하게 연기하며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브래들리 쿠퍼의 연기도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이전까지 머릿속에 각인된 브래들리 쿠퍼의 이미지는 능글맞은 바람둥이... 처음 알게 된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라는 영화에서 아내를 두고 바람피우는 남편 역할이 뇌리에 박혀 어떤 영화를 봐도 캐릭터와 쉽게 매칭되지 않았는데,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은 섹시한 나쁜 남자라는 고착된 이미지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브래들리 쿠퍼가 아닌 팻의 모습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연기를 보여주었다고 생각했는데 해외 유수의 언론에서도 “브래들리 쿠퍼의 필모그래피 역사상 최고의 연기”였다는 찬사가 쏟아졌다고 한다.
각자의 상처로 인해 조울증을 얻게 된 남자와 성적 통제력을 잃어버린 여자의 정신적 회복과 치유, 사랑을 그린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은 데이비드 O. 러셀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미국의 대표 인디 영화제인 선댄스 영화제의 ‘선댄스 키즈’ 출신 감독으로 <펄프 픽션>의 쿠엔틴 타란티노, <비포 선라이즈>의 리처드 링클레이터, <부기 나이트>의 폴 토머스 앤더슨 등이 해당 영화제를 통해 두각을 나타내며 이름을 알린 대표적인 감독들이다. 그러나 다른 선댄스 키즈들과 달리 러셀은 함께 촬영하는 배우나 스텝과의 불협화음이 작품보다 더 주목받으며 내리막길을 걷는 듯했는데 2011년 <파이터>로 복귀를 알리더니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으로 로맨틱코미디 장르에 야박한 오스카 회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물론 “<파이터>는 러셀의 이름을 다시 주목하게 만든 영화였다면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은 감독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해주는 영화”라는 평과 함께 감독 인생 2막을 열었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미드 <가십걸> 속 “이 구역의 미친 X는 나야!”라는 대사가 생각난다. 영화에 맞춰 라인을 순화시켜 바꾸면 “이 구역의 미친 남자와 미친 여자는 우리야!” 정도로 할 수 있을 것 같다.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은 한마디로 ‘미친 남자와 미친 여자의 치유와 사랑 이야기’ 다. 로맨스로 분류되는 영화 속 주인공의 첫 만남이 이보다 더 괴팍했던 영화는 없었으니까. (제 기억과 기준에서는 그러합니다만...) 첫 만남부터 남편은 어떻게 죽었냐고 물어보는 남자나, 입고 있는 옷은 별로지만 불 끄고 하면 상관없다고 추파를 던지는 여주인공은 보편적인 로맨스 영화 속 첫 만남과는 괴리감이 느껴진다. 주변 인물들도 제정신으로 보이진 않는다. 팻의 친구 로니는 가정과 일 때문에 숨 막혀 죽을 지경이고, 로니의 아내이자 티파니의 언니인 베로니카는 이상적인 가정을 만드는 데 집착한다. 팻의 형은 동생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팻의 아버지는 스포츠 도박에 미쳐 노후자금을 몽땅 풋볼 내기에 건다. 게다가 강박 장애에 사로잡혀 응원하는 팀이 이기려면 탁자 위 리모컨 각도를 맞추고, 같은 손수건을 손에 쥔 채 아들과 함께 경기를 봐야 한다고 굳게 믿는다.
팻과 티파니뿐만 아니라 주변 인물들까지 보다 보면 누가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사람인지 가늠하기 힘들다. 은퇴 후 노년 자금을 마련하려는 아버지, 집과 회사에서 시달리는 가장, 이상적인 가정에 집착하는 아내, 열등감에 사로잡히고 타인과 관계를 맺는 데 실패 후 상처 입은 사람들까지. 극 중 인물들은 우리네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좋은 일은 드러내고 힘든 일은 감추는 것이 미덕이라고 여겨왔기에 팻과 티파니처럼 거침없이 드러내지 않았을 뿐 사실 현실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결핍과 불안을 겪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니까. 누구의 결핍이 더 크고 작은가 보다 중요한 건 결핍과 불안을 어떻게 극복하는가 이다. 괴팍했던 첫 만남 후 계속해서 얽히게 되는 팻과 티파니는 만날 때마다 서로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거침없이 내뱉지만, 자신들의 문제점을 인정하고 잘못은 빠르게 사과한다. 서로의 매력보다 단점과 상처를 먼저 알아본 사이이기에 거침없는 막말도 빛보다 빠른 인정과 사과도 가능하리라. 그리고 ‘편지’와 ‘댄스 대회’라는 매개를 통해 조금씩 서로에게 의지하며 다친 마음을 서서히 회복한다. 팻과 티파니의 로맨스 영화 이면에는 가족 영화의 모습도 띠고 있다. 팻의 부모님은 이웃 사람들이 아들을 미쳤다고 손가락질하고, 새벽에 책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부모님을 깨워 난리를 치고, 결혼 비디오테이프를 찾겠다고 온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도 한결같은 사랑으로 아들을 감싼다. 온통 먹구름으로 뒤덮인 팻의 삶에 한 줄기 빛(실버라이닝)은 티파니와의 관계 이전에 가족들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 케네스 로너건, 2016년 개봉
보스턴의 아파트에서 관리인으로 일하며 혼자 사는 리는 어느 날 형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인 맨체스터로 향한다. 그러나 형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고, 자신이 조카 패트릭의 후견인으로 지목됐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혼란스러운 리는 조카와 함께 보스턴으로 돌아가려 하지만 패트릭은 고향을 떠날 수 없다며 강하게 반대한다. 그러는 와중에 전 부인 랜디에게서 연락이 오고, 리는 다시 돌아온 고향에서 애써 잊고 있었던 과거의 기억이 하나둘 떠오르게 된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개봉 후 평론가들에게 극찬과 함께 각종 시상식을 휩쓸었다. <갱스 오브 뉴욕>의 각본을 쓴 케네스 로너건이 연출을 맡았는데 영화의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연출과 주연을 맡으려 했던 사람은 맷 데이먼이다. 영화의 스토리는 맷 데이먼과 배우이자 제작자인 존 크래신스키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됐고, 케네스 로너건은 각본에만 참여할 예정이었다고. 그러나 맷 데이먼이 영화에 연이어 출연해야 해 모든 영역을 완벽하게 소화하기 힘들다고 판단하고 각본과 연출을 케네스 로너건에게 넘겼다고 한다. 주연을 맡은 케이시 애플렉은 맷 데이먼이 추천했는데 완성된 시나리오를 보고 케이시 애플렉을 떠올리고, 그가 아니면 리 역할은 누구도 소화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고. 이후 인터뷰에서 제작자로서 가장 잘한 일이 주연과 연출을 교체한 일이라고 언급하며 영화의 완성도에 만족을 표했다.
리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깊은 슬픔을 억누르고 살아가는 인물로 케이시 애플렉은 마음을 닫고 감정과 표정을 잃은 리라는 인물을 완벽하게 표현해 냈다. 주인공이 걷는 모습, 말할 때의 음성이나 무표정한 얼굴을 보고 있으면 역설적으로 무표정 뒤에 감춰진 분노, 죄책감, 슬픔, 외로움이 뒤엉켜 터지기 일보 직전인 감정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리의 조카 패트릭 역을 맡은 루카스 헤지스는 성숙하지만 때로는 철없는 소년이 되는 패트릭을 완벽하게 표현하며 케이시 애플렉과 좋은 앙상블을 보여주었다.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영화 제목인 ‘맨체스터 바이 더 씨(Manchester by the Sea)’는 미국 매사추세츠주에 있는 마을 이름인데 절망적인 인물의 심리와 대비를 이루는 평화로운 풍경이 배우들의 연기에 완성도를 높이는 역할을 하며, 왜 영화 속 배경지로 이곳을 선택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영화는 갑작스러운 형의 죽음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 리가 맞닥뜨리게 되는 감정과 상황을 담담한 어조로 그리고 있다. 건물 관리인으로 살아가는 리는 자존심이 강하고 주민들의 갑질에도 할 말은 꼭 해야 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밤이면 만취할 때까지 술을 마시며 자신에게 시비를 걸어줄 사람을 찾는데 리가 싸움에 휘말리는 이유는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어 스스로를 벌주려는 모습처럼 보인다. 영화가 진행되는 중간중간 보이는 리의 과거를 따라가다 보면 그가 왜 스스로를 고통 속에 내버려 두고 싶어 하는 사람이 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지금보다는 좋은 조건의 직장을 구할 수 있음에도 일부러 허드렛일을 전전하고, 괜히 싸움을 걸어 얻어맞는 걸로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는 자신에게 벌을 준다.
매일 자신을 벌하며 마음속 깊은 곳에 감정을 묻어둔 체 살아가는 리의 삶이 변하게 되는 건 형의 죽음과 조카의 후견인으로 지목된 이후다. 자신이 패트릭의 후견인이 되었다는 사실보다 더 견디기 힘들어 보이는 건 행복했던 기억과 가장 아픈 기억이 공존하는 맨체스터 바이 더 씨로 돌아왔다는 사실이다. 치유되지 않은 트라우마를 지닌 채 조카의 보호자가 되는 것도 감당하기 힘들지만, 불쑥불쑥 밀려드는 과거의 기억이 리를 더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 같았다. 하지만 조카는 누구보다 삼촌을 후견인으로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그리고 영화의 말미에 리는 조카에게 용기 내어 자신의 한계를 고백한다. 두 사람 모두 신뢰하는 친구의 양아들이 되어 지내며면 가끔씩 자신이 들여다보겠다고. 영화는 표면적으로는 맨체스터 바이 더 씨를 떠나고 싶어 하는 리와 함께 남아주길 바라는 패트릭의 갈등을 내세우지만, 그 이면에는 리가 가지고 있는 죄책감의 근원과 깊이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 때문에 조카의 보호자가 되길 거부하는지를 보여주며 주인공이 처한 상황에 대한 공감을 끌어낸다. 영화를 보는 동안 가슴이 먹먹했던 건 리의 잘못을 따지기보다 주인공이 처한 상황을 관찰자의 시선에서 덤덤하게 들려주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더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영화에서 다뤄지는 상실감은 구체적인 감정과 정서를 관객에게 완벽하게 전달하는 케네스 로너건 감독만의 연출법으로 다뤄지고 있는데 케네스 로너건 감독은 특히 인물의 심리를 잘 다루는 감독으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감정을 이미지로서 완벽하게 전달하는 영화였다. 상처받은 인물을 지켜보면서 인물의 감정과 표정, 상태에 집중하며 공감할 수 있도록 섬세한 표현과 다양한 연출 기법을 활용하는데 그중 돋보이는 것이 플래시백이다. 맥락 없이 뜬금없는 순간 플래시백을 배치하는데 이건 우리가 기억을 떠올리는 방식과 굉장히 유사하게 그려진 것이라고 한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무언가를 떠올리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과거를 회상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어떤 사물을 보거나, 음악을 듣거나, 장소에 방문했을 때 그와 연관된 과거의 기억이 갑작스럽게 떠오르는 경우가 더 많다. 영화에서 플래시백은 이러한 기억을 떠올리는 방식과 유사하게 다뤄진 셈. 그리고 이렇게 뜬금없이 기억을 마주하는 과정을 통해 상처가 얼마나 사람을 아프게 하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계속 살아갈 것이라는 걸 보여준다. 그래서인지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감정을 응시하는 영화이자 절망 속에서 희망을 이야기하는 영화”라는 평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영화를 다시 보기 전 평론과 기사를 먼저 읽어보고 재관람했는데 배경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봤을 때도 담담한 어조로 이야기하지만 유독 주인공의 감정에 깊이 몰입돼 가슴이 먹먹했던 영화로 기억에 남았었는데, 이를 위해 감독이 얼마나 섬세한 방식으로 관객의 감정을 끌어냈는지 알 수 있었다. 영화를 볼 계획이 있다면 관람 전 여러 평론을 먼저 읽어보고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천해 본다.
전지적 관찰자 시점, 가끔인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영화 이야기.
시선기록장 @bonheur_archive
파리 사진집 <from Paris>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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