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아카이브 12. Dear Cinema from Chazelle
2월은 개봉하는 흥미로운 영화들이 정말 많았다. <바빌론>, <애프터썬>, <이마 베프>, <단순한 열정>, <성스러운 거미>, <라스트 버스> 그리고 <타르>까지. 매주 영화관을 찾아가고 싶은 행복한 달이었다. 그중 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바빌론>은 기대작으로 꼽히며 감독과 출연 배우의 팬들이 극장을 많이 찾았을 것 같은데 기대보다 저조한 성적이 조금 의아하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긴 러닝타임이 지루하지 않을 만큼 집중해서 감상했다. 모처럼 좋아하는 감독의 영화를 본 기념으로! 12번째 아카이빙은 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이전 작품 2편을 골랐다.
"씨네아카이브 12. Dear Cinema from Chazelle" 전문 읽기
위플래쉬(Whiplash), 데이미언 셔젤, 2014년 개봉
최고의 드러머가 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각오가 되어있는 음악대학 신입생 앤드류는 우연한 기회로 누구든지 성공으로 이끄는 실력자이지만 폭군이기도 한 플레처 교수에게 발탁되어 그의 밴드에 들어가게 된다. 폭언과 학대 속에서 좌절과 성취를 동시에 안겨주는 플레처 교수의 교육방식은 천재가 되길 갈망하는 앤드류의 집착을 끌어내며 그를 점점 광기로 몰아넣는데... 제자를 통해 자신의 음악적 욕망을 실현하고자 하는 플레처 교수와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를 열망하는 앤드류, 두 사람의 끝은 어떻게 될까?
<위플래쉬>는 선댄스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 제87회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편집상, 음향상을 수상하며 좋은 평을 받았고 관객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기며 감독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된 작품이다. 영화는 재즈 드러머를 꿈꿨던 감독의 자전적인 경험이 반영되어 탄생하게 된 작품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플레처 교수를 연기한 J.K. 시몬스 역시 실제로 음악 전공자다. 영화 제작에는 비하인드가 있다. 감독은 제작 과정에서 모든 투자자로부터 거절당하자 시나리오상에서 3가지 장면을 뽑아 단편 영화로 제작해 선대스 영화제에 출품하여 수상 후, 투자를 받게 되면서 장편으로 완성했고, 장편 버전은 단 10주 만에 제작을 끝냈다고 한다. 그리고 완성된 장편으로 선댄스 영화제에서 다시 한번 수상하게 된다. (보이지 않는 노력도 있었겠지만 이쯤 되면 셔젤 감독의 능력과 될 놈은 뭘 해도 된다는 논리를 믿을 수밖에 없을 것 같기도 하고...)
미국에서는 학생을 향한 폭력적인 장면으로 청소년 관람 불가 판정을 받았으나 한국에서는 최고의 교육 영화(?)라는 반응이 나오면서 학생들과 단체 관람까지 가는 기현상이 벌어졌었다고 한다. 하지만 교육학적인 측면에서 플레처는 가혹한 스승이며 그의 교육 방식은 결코 용납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지라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성과지향주의적인 한국 사회를 여지없이 보여준다는 사실에 그저 씁쓸할 뿐이다. 개봉 당시 퇴근 후 저녁 타임에 혼자 영화를 감상했었는데 가벼운 음악 영화를 예상하고 봤다가, 마치 스릴러 영화를 감상하는 듯한 느낌에 밤에 혼자 영화 보기로 한 선택을 후회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플레처 교수의 도깨비 같은 얼굴이 떠올라서 혼자 공포에 떨었던 기억이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위플래시>는 표면적으로는 음악 영화이지만, 내용이나 주제의식을 놓고 보면 심리 드라마처럼 보인다. 특히 플레처 교수가 등장하는 장면들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을 선사하며 한 편의 스릴러 영화를 보는 것 같다. 두드러지는 영화평은 “각본은 인물의 심리 변화를 효율적이고 경제적으로 연결해서 묘사하고, 편집은 음악영화로서의 리듬을 절묘하게 살려낸다”는 것. “영화를 앤드류의 시점으로 보면 성인이 된 소년이 꿈과 인생을 헤쳐 나가는 성장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카메라의 시점에서 다시 따라가다 보면 전혀 다른 장르의 이야기로 보일 만큼 촬영 방식 또한 뛰어나다”는 평도 있다.
엔딩 시퀀스는 빠른 전개와 이를 받쳐주는 편집, 음악, 연기의 3박자가 어우러져 많은 이들에게 최고의 장면으로 꼽히는데 보는 관점에 따라 해석의 차이가 큰 장면이다. 앤드류가 마침내 플레처 교수와 음악적으로 화합을 이루었다고 보는 경우도 있지만, 앤드류가 플레처 교수를 역으로 곤란하게 만들어 함정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결심한 것으로 보기도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후자에 동의한다. 플레처가 자기중심적이고 본인의 이미지를 가장 우선시하는 사람이었음을 고려하면, 관객들 앞에서 당황한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 연기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특히 도깨비 같은 얼굴(?)로 짓던 그의 미소가 공포스러운 기억으로 남아있어 결코 앤드류의 음악적 성취를 인정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위플래쉬>는 교육학적 관점에서도 고민해 볼 지점을 제시한다. ‘비인간적이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사람을 극한으로 몰아붙여 성취를 이뤄내는 것이 과연 옳은가?’란 질문을 던지며 영화가 이에 대한 명확한 답을 내리지 않고 관객들의 판단에 맡기는데 교육자로서 개개인의 잠재력을 끌어내고 한계를 극복할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은 필요한 일이지만, 그 과정에서 수반된 모욕적인 언사나 폭력은 결코 정당한 방식이 될 수 없다. 플레처 교수의 행동과 표현을 들여다보면 몇 년 전부터 화두가 되는 가스라이팅이 떠오른다. 플레처는 학생들의 재능을 알아보는 사람이기보다 타인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강한 학생들만 찾아내 그들의 내적 열망을 빌미로 본인이 손쉽게 조종하고자 하는 사람에 가깝다.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고 종속시키는 것이 신체적 폭력만큼 깊은 상처를 남길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플레처의 교육 방식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
영화의 결말에 대해 셔젤 감독은 “플레처는 오로지 예술밖에 모르는 인물로 앤드류에게 새로운 곡으로 망신을 준 것이 ‘이 자극으로 위대한 드러머가 되면 좋고, 아니면 복수로 끝나도 그걸로 됐다’는 식이었다”라고 밝혔는데 개인적으로 플레처는 예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닌, 예술을 수단으로 삼아 1등 아니면 의미 없다고 여기는 성공지상주의자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플래쉬>는 뛰어난 연출, 배우들의 호연을 감상하는 즐거움도 있지만, 목표지상주의적인 태도가 야기하는 윤리적 문제점에 대해 고민해보게 하면서 동시에 ‘선하지 않은 예술이 예술로서 진정한 의미와 가치가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이기도 하다.
<라라랜드 (La La Land)>, 데이미언 셔젤, 2016년 개봉
꿈꾸는 사람들을 위한 별들의 도시 라라랜드. 본인이 연주하고 싶은 곡을 자유롭게 연주할 수 있는 재즈바 사장님을 꿈꾸는 재즈 피아니스트 세바스찬. 언젠가는 본인이 직접 쓴 1인극을 마음껏 연기할 날을 꿈꾸는 배우 지망생 미아. 두 사람은 서로가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에 만나게 된다. 그리고 각자의 꿈을 이루기 위해 분투하며 미완성인 서로의 무대를 함께 만들어가는데... 미아와 세바스찬의 라라랜드는 어떤 모습으로 완성될까?
모두에게 데이미언 셔젤의 이름을 각인시킨 영화 <라라랜드>는 베니스 국제 영화제 개막작으로 처음 공개되어 좋은 평을 받았고, 제74회 골든글로브에서 7개 부문, 제89회 아카데미에서 6개 부문을 수상하는 등 여러 영화제를 휩쓸며 명실상부 감독의 최고작품으로 꼽힌다. 특히 음악과 현대적인 감각의 영상으로 1940년대 황금기 고전을 감독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해 관객들에게 새롭게 선보였다는 평이 많다. 엠마 스톤과 라이언 고슬링이 각각 미아와 세바스찬으로 분해 뛰어난 연기력을 선보였는데 라이언 고슬링은 재즈 피아니스트를 연기하기 위해 하루에 4시간씩 3개월 동안 피아노 레슨을 받아 극 중 피아노 치는 모든 장면을 CG와 대역 없이 완벽하게 소화했다고.
영화의 제목인 ‘La La Land’는 ‘몽상의 세계 혹은 꿈의 나라’라는 뜻으로 ‘live in La La Land’라는 관용구는 ‘꿈속에서 산다’는 의미의 부정적인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원래의 의미와 함께 영화의 배경인 LA를 중의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의도도 있었을 것 같다. <라라랜드>는 지금까지 기획전을 통해 여러 번 재상영되며 영화로서도 사랑받는 작품이지만, 영화의 삽입곡도 영화 못지않은 사랑을 받고 있다. 학창 시절부터 셔젤 감독과 호흡을 맞추고 있는 저스틴 허위츠가 음악 감독을 맡아 2년 반 동안 피아노 데모곡만 1,900여 곡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노력의 결실로 <라라랜드>는 아카데미 주제가상과 음악상을 동시에 받는 진기록을 달성했다. 허위츠는 “영화 음악을 통해 스크린에 드러나지 않는 서브 텍스트를 관객들이 느낄 수 있도록 하면서 영화 안에서 충분히 극적인 효과를 일으켜 사람들의 기억에 오래도록 각인되는 음악을 만들고 싶었다”라고 인터뷰에서 밝혔는데 관객들이 <라라랜드>하면 단순히 영화의 스토리만 떠올리는 것이 아닌 장면마다 삽입된 음악을 함께 떠올리는 것을 생각하면 감독이 염원은 이미 충분히 이루어진 셈이다.
<라라랜드>는 겨울에서 시작해 겨울에 끝나는 5부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고, 계절의 변화를 따라가며 남녀 주인공의 꿈과 사랑 이야기를 낭만적인 방식으로 풀어냈다. 고전 영화에 대한 오마주를 곳곳에 배치해 전통적인 고전 할리우드 뮤지컬이 지닌 우아한 요소를 현대적으로 재탄생시켰다는 장르적 성과도 뛰어난 작품이다. 영화는 “뮤지컬 영화이기 때문에 가능한 영화적 허용을 통해 ‘그랬으면’하는 묘사를 곧장 현실화”하는데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라고 말하는 대신 구름 위를 걷는 남녀를 보여주고, 밤에는 별들 사이로 올라가 춤을 추는, 오직 뮤지컬 영화만의 표현 방식을 통해 만남과 이별의 과정에서 보여지는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순간들에 집중한다. 덕분에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 이야기를 보면서도 벅차오르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 <라라랜드>는 “주인공들의 좌절•이별과 같은 서사의 굴곡보다 이러한 감정을 무대화하여 재현하는 방식에 방점”이 찍혀있는 영화인 셈.
주인공 미아와 세바스찬은 꿈과 사랑의 관계를 상징하는데 두 사람이 사랑하며 서로의 꿈을 응원하는 시간들은 꿈과 사랑 모두 양립할 수 있을 것 같은 환상에 가깝지만, 꿈과 사랑이 분리되기 시작하는 지점부터 이야기는 현실이 된다. “데이미언 셔젤 감독은 꿈과 사랑이 양립할 수 없다고 보는 입장이기 때문에 영화에서 사랑과 꿈이 갈라지게 되는 지점이 곳 영화의 클라이맥스 부분”으로 이때 꿈과 사랑 중 어느 것을 메인 플롯으로 보는지에 따라 영화의 결말을 해피 엔딩과 새드 엔딩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재감상 후 새드 엔딩에서 해피 엔딩으로 관점이 바뀌게 되었다. 미아와 세바스찬의 사랑은 결국 각자의 꿈을 이루기 위해 함께했기 때문에 더 빛날 수 있었고, 두 사람의 끝이 이별이었더라도 함께했던 시간이 아름다웠다면 그 사랑 역시 충분히 가치 있는 것이기에 미아와 세바스찬의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이 마냥 슬프게만 느껴지지 않았다.
전지적 관찰자 시점, 가끔인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영화 이야기.
시선기록장 @bonheur_archive
파리 사진집 <from Paris> 저자
영화 뉴스레터 ciné-arch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