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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 Apr 06. 2023

케이트 블란쳇의 순간들
<블루 재스민> & <캐롤>

씨네아카이브 14. 배우특집 ep.3

아카데미는 끝났지만, 노미네이트 된 작품의 개봉 소식과 수상 배우들의 역대 출연작이 OTT나 영화 채널을 통해 꾸준히 소개되고 있어서 즐거웠던 3월. 이번 오스카 여우주연상 수상자로 내가 예상했던 배우는 케이트 블란쳇이었다. 수상은 불발되었지만 <타르>에서 보여준 그녀의 연기는 오래도록 회자될 것 같다. 그래서 준비한 14번째 아카이빙은 (사심을 가득 담은) 배우 특집 3번째 이야기, 케이트 블란쳇 편이다.


케이트 블란쳇을 처음 본 영화는 <반지의 제왕>이었다. 그때는 갈라드리엘이 케이트 블란쳇이란 사실을 모르고 있다 한참 뒤에 알고는 깜짝 놀랐었지만... 본격적으로 관심을 두게 된 작품은 브래드 피트와 함께 작업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로 발레리나로 나왔던 케이트 블란쳇의 고혹적인 모습이 인상적으로 남아 그 이후로 그녀의 이전 작품과 출연 작품을 틈틈이 찾아서 보게 됐다. 그리고 모든 작품마다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해 내는 모습에 감탄하며 팬심도 무럭무럭 자라났더랬지. 배우의 화려한 필모그래피만큼 추천 영화도 많지만, 그녀의 작품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블루 재스민>과 <캐롤>을 소개한다.


"씨네아카이브 14. 케이트 블란쳇의 순간들" 전문 읽기



<블루 재스민>, 우디 앨런, 2013년 개봉


출처: 네이버 영화

재스민은 사업가 ‘할’과의 결혼으로 부와 사랑을 모두 가진 뉴욕의 상위 1%로 햄튼에 위치한 고급 저택에서 파티를 열고, 맨해튼 5번가에서 명품 쇼핑을 즐기며 지낸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의 외도를 알게 되면서 그녀의 인생은 산산조각 나고, 결혼생활을 끝내고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된 그녀는 여동생 ‘진저’에게 신세를 지기 위해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에 오른다. 고급 매장 하나 없는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정반대의 삶을 살게 된 재스민은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하고, 여동생과 루저 같아 보이는 그녀의 남자친구 ‘찰리’와는 사사건건 부딪치며 갈등을 빚는다. 인정할 수 없는 현실에 혼잣말은 늘어만 가고 신경안정제마저 더 이상 듣지 않던 어느 날, 그녀는 근사한 외교관 ‘드와이트’를 만나면서 한 줄기 희망을 발견하는데... 과연 재스민은 예전의 호화로운 삶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블루 재스민>은 남편을 잘 만나 호화로운 생활을 하던 여성이 패가망신한 후 평범한 삶을 사는 여동생에게 얹혀살면서 과거를 그리워하며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그린 우디 앨런의 영화로 1946년 말론 브란도와 비비안 리 주연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기도 하다. 영화는 제86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과 각본상에 노미네이트 되었고, 케이트 블란쳇이 허영기 가득한 재스민을 완벽하게 연기해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연출을 맡은 우디 앨런은 감독이자 각본가이기도 한데 시나리오를 쓸 때 특정 배우를 염두에 두고 쓰는 경우는 드물지만 <블루 재스민>은 자매로 나오는 케이트 블란쳇과 셀리 호킨스를 염두에 두고 썼다고. 그래서인지 재스민과 진저는 두 사람이 아닌 다른 배우가 연기하는 모습이 상상이 가지 않을 만큼 완벽한 싱크로율과 앙상블을 보여줬다. 우디 앨런은 다작하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작품마다 본인의 열등감을 코미디로 승화시켜 페이소스를 만들어내는 감독이기도 하다. 감독으로서도 시나리오 작가로서도 역량이 뛰어난 만큼 오스카 감독상 후보에 7회, 각본상 후보에는 무려 16회나 노미네이트 되기도 했다.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각색한 것이기도 하지만 미국에서 벌어졌던 폰지 사기 사건도 참고했다. 나스닥 증권거래소 위원장이었던 버나드 메이도프가 650억 달러의 폰지 사기 사건으로 징역 150년 형을 받으면서 그의 아내가 남편이 파산한 후 여동생의 집에서 2년간 얹혀살았다고.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는 여주인공이 자신이 살던 곳에서 사고를 치고 여동생의 집에 얹혀살면서 매제와 갈등을 빚게 되자 본인을 구원해 줄 남자를 찾아 새로운 삶을 꿈꾸지만, 거짓말이 발각돼 완전히 패가망신하는 이야기인데 <블루 재스민>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스토리라인에 버나드 메이도프 사건에서 따온 남편의 금융 사기로 가정이 파탄 난 여성이라는 모티브를 더해 각색한 셈이다.


<블루 재스민>은 편집 방식과 소품 등을 통해 재스민의 허영과 과거의 화려했던 삶과 대조되는 현재의 비참한 상황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특정한 순간의 과거 경험을 현재에 붙여 넣는 방식의 편집은 이야기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도록 함과 동시에 재스민의 현재 상황을 더욱 도드라지게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무엇보다 소품과 의상으로 인물의 허영기 가득한 모습을 직관적으로 표현했는데 재스민은 망해서 동생의 집으로 가는 와중에도 1등석을 타고, 어디를 가던 샤넬 트위드 자켓을 입고 에르메스 버킨백을 든다. 샤넬 트위드 자켓과 에르메스 버킨백은 일종의 계급적인 자존심을 지키고 싶어 하는 인물의 심리를 보여주는 장치로 영화의 후반부 재스민이 부적처럼 들고 다니던 가방을 내려놓은 모습을 통해 그녀가 심리적으로도 완전히 무너졌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재스민의 마지막 자존심이자 전장에 나가는 무사의 갑옷과 무기 같은 역할을 하는 샤넬 트위드 자켓과 에르메스 버킨백은 우디 앨런이 세심하게 설정해 둔 것으로 생각했는데, 한 인터뷰에서 케이트 블란쳇이 밝힌 바에 따르면, 우대 앨런은 사람들이 기분에 따라 착장을 고르고 패션 스타일로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부류라고 한다. 20년간 똑같은 랄프 로렌 스웻 팬츠와 티셔츠만 입는다고. (괴짜들은 다 그런 걸까? 잡스가 블랙 터틀넥에 청바지만 고수한 것처럼.반대로 케이트 블란쳇에게 캐릭터의 스타일링은 인물을 표현하는 중요한 부분이라 신경을 많이 쓴다고 하니 아마 해당 설정은 케이트의 아이디어였을 것 같다. 여담으로 불편해 보이는 자리에서도 꿋꿋이 입고 있던 샤넬 트위드 자켓은 칼 라거펠트에게 빌려온 것이라고.


재스민은 모 드라마 속 대사처럼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 부자가 아닌 적이 없었던'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입양아다. 그리고 동생 진저와 달리 자신의 외적인 아름다움과 만들어진 이미지로 부를 누를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한 인물로 본인이 창조해 낸 이미지로 호화로운 삶을 누렸고, 인생의 밑바닥에서 다시 한번 같은 방법으로 재기를 꿈꾸다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재스민을 보고 있으면 알맹이 없는 빈 껍데기 같다. 누구나 안정적이고 윤택한 삶을 희망하지만 살다 보면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는 순간이 찾아올 수 있다. 그런 순간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하는 건 내가 입고 있는 옷, 들고 다니는 가방이 아니라 자아다. 허영심 없는 인간은 없고, 중요한 것은 지나친 허영에 자아를 잠식당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감독이 영화를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도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캐롤>, 토드 헤인즈, 2015년 개봉


출처: 네이버 영화

1950년대 뉴욕. 백화점 점원인 테레즈와 손님으로 찾아온 캐롤은 처음 만난 순간부터 거부할 수 없는 강한 끌림을 느낀다. 하나뿐인 딸을 두고 이혼 소송 중인 캐롤과 헌신적인 남자친구가 있지만 관계에 확신이 없던 테레즈는 각자의 상황을 잊을 만큼 통제할 수 없이 서로에게 빠져들게 되고, 감정의 혼란 속에서도 두 사람은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찾아온 진짜 사랑임을 확신하게 되는데... 과연 테레즈와 캐롤 두 사람의 끝은 해피 엔딩이 될 수 있을까?


<캐롤>은 미국 작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 소금의 값 (Price of Salt) 원작으로 하는 토드 헤인즈 감독의 퀴어 영화다장르 특성상 투자에 난항을 겪으며 제작이 완료되기 전까지 여러 우여곡절을 겪었다고 하는데 테레즈 역할을 맡은 배우는 루니 마라가 아닌 호주 출신의 배우 미아 와시코스브카였고감독도 <브루클린> 연출한  크로울리에서 토드 헤인즈로 바뀌게 되었다고원작의 팬이었던 케이트 블란쳇은 투자에 어려움을 겪는 작품을 위해 직접 제작자로 참여하기도 했다.


우여곡절은 많았지만, 작품은 개봉과 동시에 관객과 평단의 극찬을 받았다. 한 해에 별 5개 작품은 손에 꼽힌다는 이동진 평론가는 별 5개와 함께 “멜로드라마의 역사가 장르에 내린 햇살 같은 축복”이라 평했다. (햇살 같은 축복’이라니, 이보다 더 좋은 찬사가 있을까?) <캐롤>은 칸 영화제 최초 공개 때부터 찬사를 몰고 다녔지만, 배우들의 연기상을 제외하면 작품으로서 받은 상은 많지 않다. 칸 영화제 황금 종려상도 불발되었고, 제88회 아카데미에서는 6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었으나 작품상과 감독상 등 주요 부문에서는 제외되고 노미네이트 된 부분에서도 모두 무관에 그쳐 당시 비판 여론이 많았는데 보수적이란 평을 쇄신하기 위해 힘쓰는 지금과 달리 작품이 개봉했던 시기만 해도 퀴어 장르에 대한 문턱이 높았기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출처: 네이버 영화

원작 소설은 작가가 쓴 유일한 러브스토리로 알려져 있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는 주로 심리묘사가 탁월한 범죄 소설을 집필했던 작가였는데 작가로서 그녀의 이름을 각인시킨 열차 안의  낯선 자들은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이 동명의 영화로 만들기도 했다. 책이 출간되었던 시기가 영화 속 배경과 비슷한 1950년대로 작가는 ‘클레어 모건’이라는 필명으로 소설을 발표했고, 오랫동안 본인이 클레어 모건이라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았으나 출간 당시 제목이었던 소금의 값이 캐롤로 바뀌면서 작가의 이름도 공개되었었다고 한다.


캐롤 동성애를 다룬 소설 중 주인공이 비극적 운명을 맞지 않는 최초의 책이라 여러모로 센세이션 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영화도 원작과 마찬가지로 캐롤과 테레즈의 해피 엔딩을 암시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끝난다. 퀴어 영화를 많이 본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지 못했던 걸 생각하면 원작과 영화 모두 기존의 틀을 깨는 구성이란 생각이 들었다. 특히 해피 엔딩을 암시하는 듯한 결말이 신선하기도 했지만, 영화가 동성애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사랑의 보편성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좋았다. 보통 퀴어 장르는 두 사람의 사랑이 야기보다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시선과 비판이 도드라지게 기억에 남는 경우가 많았는데 <캐롤>은 ‘서로를 사랑하고 있는 두 사람’에 집중하게 되는 영화였다. 앞서 소개한 한 줄 평 “멜로드라마의 역사가 장르에 내린 햇살 같은 축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 달까.


멜로는 20세기 전반까지 대체로 보수적이고 체제 옹호적인 장르로 여겨졌는데 멜로의 지향점이 일부일처제, 남녀 간의 사랑, 결혼에 대한 견해 등 가부장적인 시선을 중심으로 기능해 왔기 때문이라고. 미국의 1950년대는 가장 윤택했던 시대이면서 가장 보수적인 시대로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사랑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사랑의 아름다움’에만 몰입할 수 있도록 한 <캐롤> 섬세한 연출도 인상적이다. 캐롤과 테레즈의 감정선을 따라가면서 ‘오직 그 사람이 아니면 안 되는 사랑의 유일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됐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됐을 때 나는 그 사랑을 알아보고 붙잡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영화는 미학적으로도 뛰어나다는 평을 받았는데 50년대 뉴욕 거리 풍경, 극 중 인물들이 머무는 공간, 의상 등 사실적인 연출이 돋보인다. 감독은 당시 풍경을 영화 속에 재현하기 위해 사울 레이터나 비비안 마이어 등 사진작가들의 작품을 많이 참고하고, 입자가 거친 질감을 표현하기 좋은 16mm 필름 카메라로 촬영했다고.


전지적 관찰자 시점, 가끔인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영화 이야기.

시선기록장 @bonheur_archive

파리 사진집 <from Paris> 저자

영화 뉴스레터 ciné-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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