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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 Nov 09. 2023

영화 <1917> 무명의 영웅들

씨네아카이브 28.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생존을 그리다 Part. 1

몇 년 전 우연한 계기로 11월 11일이 다른 곳에서는 1차 대전 종전 기념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퇴역 군인들을 기리는 재향군인의 날(Veteran’s Day)로 유럽에서는 휴전 기념일(Armistice Day)로 기리는 날이었는데 대서양과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똑같은 날도 이렇게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에 새삼 놀랐다. 누군가에게는 가볍게 기분 좋은 선물을 건네는 빼빼로 데이라면, 다른 누군가에게는 역사의 한 부분을 잊지 않고 돌이켜 보는 순간이 될 수 있으니까. 그래서인지 11월이 되면 마트나 편의점 전면에 전시된 빼빼로를 볼 때마다 휴전 기념일도 함께 떠올리게 된다. (역시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런 의미에서! 이번 아카이빙은 양차 대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로 골라봤다.


"씨네아카이브 28.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생존을 그리다" 전문 읽기



<1917>, 샘 멘데스, 2019년 개봉


<1917>은 <아메리칸 뷰티>, <레볼루셔너리 로드>, <007 스카이폴> 등을 연출한 샘 멘데스 감독의 작품으로 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특히 역대 감독의 작품 중 최고의 작품으로 거론되며 메이저 조합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휩쓰는 등 아카데미 유력 작품상 후보로 점쳐지기도 했다. 그리고 제92회 아카데미에서 무려 10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어 촬영상, 음향 효과상, 시각효과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그해 작품상은 <기생충>에게 돌아갔다.)


영화는 관객들에게도 호평받았는데 주인공들의 시점을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가며 이들이 처한 상황을 실제로 경험하는 듯한 느낌의 연출과 영상미가 돋보인다는 평이 많았다. 이는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마치 하나의 롱테이크로 연출된 것처럼 보이도록 하는 ‘원 컨티뉴어스 쇼트(One Continuous Shot)’를 활용한 것으로 감독은 관객들이 주인공들의 시점을 실시간으로 따라가며 실제로 체험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게 하려고 의도적으로 선택한 방식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실제로 처음부터 끝까지 연속해서 촬영한 것은 아니고 몇 개의 롱테이크 쇼트를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연결하여 영화 전체가 하나의 롱테이크처럼 보이도록 연출하는 기법으로 유심히 들여다보면 편집점을 알아챌 수 있긴 하다.


원 컨티뉴어스 쇼트는 장면을 나누어 찍은 후 하나의 장면으로 보이도록 이어 붙여야 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철저한 계획하에 이루어져야 하는 만큼 감독과 배우, 제작진들은 무려 4개월에 걸친 리허설 기간을 가졌다고 한다. 장면의 길이와 세트장의 길이, 배우들의 동작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질 수 있도록 임시로 제작된 실내 세트장에서 모든 발걸음을 표시해 가면서 리허설을 진행, 실제 촬영에서는 대부분 장면을 오차 없이 완성했다고. 제작 과정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조명으로 로저 디킨스 촬영 감독은 “배경이 대부분 야외라 조명을 통제하는 것이 쉽지 않아 자연광을 주로 활용하되, 촬영을 스토리 순으로 진행하면서 장면의 연결을 위해 늘 구름이 뒤덮인 하늘 아래에서 찍었다”라고 밝혔는데 날씨가 화창한 날에는 직사광선으로 생긴 그림자 때문에 촬영을 접고 리허설을 진행하다 완벽한 상황이 만들어졌을 때 다시 촬영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렇게 철저한 계획과 준비 과정을 거친 덕분에 <1917>은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영상을 구현하며 영화 기술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평가받는다.


(출처: 네이버 영화 스틸컷)

영화는 ‘두 병사가 적진을 가로질러 메시지를 전달한다’라는 큰 줄기 아래 진행된다. 이는 감독의 할아버지이자 1차 대전 참전용사인 알프레드 H. 멘데스의 경험담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감독의 할아버지는 1차 대전 참전 당시 초소와 초소 사이를 오가며 메시지를 전하는 ‘메신저’로 선발되어 서부전선으로 가게 되었는데 경계가 뚜렷하지 않은 무인지대와 아군과 적군 모두에게 공격받을 가능성이 많은 지역을 지나며 매 순간 목숨을 걸어야 했다고 한다. 샘 멘데스 감독은 “영화가 완전한 실화는 아니지만 몇몇 장면들은 할아버지가 함께 싸운 병사들의 이야기에서 출발했다”라고 밝히며, “이것이 당시 그들이 어떠한 일을 겪었는지, 어떠한 희생을 했는지, 그들 자신보다 더 위대한 어떤 것을 믿고 있었는지에 관한 이야기”라고 전하기도 했다.


<1917>은 출연 배우들도 쟁쟁하다. 콜린 퍼스, 배네딕트 컴버배치, 마크 스트롱, 앤드류 스콧, 리처드 매든 등 영국을 대표하는 배우들이 대거 출연했는데 놀라운 것은 이들이 모두 단 몇 장면만 등장하는 조연이라는 사실이다. 주연은 신예 배우 조지 맥케이가 맡아 극이 진행될수록 피폐 해져가는 모습을 잘 표현하며 호평받았다. 영화는 주인공들이 임무를 떠났을 때 누가 죽고 사는지를 관객들이 쉽게 알아채선 안 되기 때문에 무명에 가까운 배우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함으로써 영화의 핵심적인 사항을 관객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더해 감독이 이야기하고자 했던 ‘무명의 용사’라는 주제와도 맞닿아 있는데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위치에 있는 역할은 유명 배우들이 연기하고, 실제 임무를 완수하는 역할은 무명의 배우가 연기함으로써 당시의 영웅들은 높은 지위의 장교들이 아닌 익명의 병사들이었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배우들의 경우 약 5개월 동안 전문적인 군사 훈련, 군인의 기본 덕목 등 다양한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1차 대전은 참호전이 주를 이뤘던 만큼 실제 참호에서 생활하는 법도 몸소 체험했다고. 배우들의 생동감 넘치는 연기는 물론 영화의 생생함을 더하기 위해 로케이션 선별에도 공을 들였는데 실제 전투가 벌어졌던 지역에서의 촬영도 염두에 두었으나 땅속에 탄약과 전사한 병사들이 묻혀 있는 경우도 있어 대신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북부, 옥스퍼드 등 영국 전역에서 촬영을 진행, 영화의 풍경에 다채로움을 더했다.


(출처: 네이버 영화 스틸컷)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17년. 독일군에 의해 모든 통신망이 파괴된 상황에서 영국군 병사 스코필드와 블레이크에게 하나의 임무가 주어진다. 함정에 빠진 영국군 부대의 수장 매켄지 중령에게 에린무어 장군의 공격 중지 명령을 전달하는 것. 스코필드와 블레이크는 1,600명의 아군과 블레이크의 형을 구하기 위해 전쟁터 한복판을 가로지르며 사투를 이어가는데... 과연 두 사람은 무사히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까?


영화는 시작부터 끝까지 주인공의 여정을 따라가며 그 속에 거대한 참호, 아군과 적군의 경계가 만들어 내는 긴장감 등 전쟁의 참상을 함께 담아냈다. 1914년에 발발하여 1918년에 종전된 1차 세계대전은 참호전의 양상을 띤 전쟁으로 알려져 있다. 전투로 사망한 병사의 숫자보다 참호 안에서 병으로 사망한 병사의 숫자가 더 많았을 만큼 지지부진하고 비참한 전쟁이기도 했다. 게다가 뚜렷한 선과 악이 나뉜 2차 대전과 달리 강대국들이 식민지 쟁탈을 놓고 벌인 전쟁이기도 하다. 결국 제1차 세계대전은 유럽이 식민지 쟁탈로 팽창하던 시기 후발주자였던 독일과 선발주자였던 영국, 프랑스 사이에서 제한된 식민지 자원을 놓고 벌인 제국주의적 성격을 띤 강대국들의 이익을 위한 명분 없는 전쟁에 가깝다.


영화는 크게 두 개의 파트로 나뉘었다고 볼 수 있는데 그 기준점이 스코필드가 독일 저격수에 의해 기절했다 깨어나는 시점이다. 스코필드가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는 것은 ‘죽음에서 삶으로 돌아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며, 이 경험으로 그의 태도가 전반부와는 완전히 대비” 된다. 전반부의 스코필드는 낙천적인 블레이크와 달리 시종일관 시니컬한 모습을 보이지만, 이후에는 블레이크와 비슷한 태도를 보이며 변화한다. 결국 주인공의 관점에서 보면 “냉소적인 스코필드가 낙관적인 전망을 잃지 않았던 블레이크처럼 변화해 잃어버린 희망을 회복하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라고도 볼 수 있는 셈. 함께 임무를 떠난 2명의 주인공 중 실질적인 주인공이 스코필드인 이유는 실존주의적 개념과도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영화의 첫 장면에서 블레이크는 임무에 뽑혀야만 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는 것으로 나온다. 첫째 지도를 잘 보고, 둘째 그의 형이 임무지에 있다. 블레이크는 공적으로도 사적으로도 임무 수행의 뚜렷한 목적이 있는 사람지만 스코필드는 운이 나빠(?) 블레이크의 임무에 동행하게 되는 것과 다름없다. (영화에서도 스코필드는 블레이크에게 왜 하필 본인을 선택했냐고 묻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끝까지 임무를 수행하게 되는 사람은 스코필드임을 보여주며 감독은 왜 내가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지 모르는 상황에 던져져 목숨을 걸고 싸워야만 하는 것이 인간이라고 이야기하며 ‘인간은 결국 현실에 던져진 존재’라는 것”을 스코필드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전지적 관찰자 시점, 가끔인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영화 이야기.

시선기록장 @bonheur_archive

파리 사진집 <from Paris>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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