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아카이브 31. Wish Your Merry Christmas
연말은 1년 중 가장 많은 감정이 오가는 시기다. 내 안에 살고 있는 기쁨이, 슬픔이, 버럭이, 까칠이, 소심이들이 하루에 한 번씩 나타났다 사라지는 느낌이랄까. 여기에 설렘도 추가하고 싶은데 그 중심에는 크리스마스가 있다. 크리스마스는 조금 특별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종교의 유무와 관계없이 모두를 설레게 만들고, 양말 속 선물이 궁금해 잠 못 들던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크리스마스라는 단어 하나에 들뜨게 되니까. 무엇보다 평소에는 쑥스러워 고마움을 전하지 못했던 이들에게 크리스마스를 핑계 삼아 연말 인사 겸 감사한 마음을 전할 수 있다는 것도 크리스마스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듣는 순간 마음을 크리스마스 빛깔로 물들이는 것이 캐럴이라면, 크리스마스 감성의 화룡점정은 크리스마스 특선 영화다. 해마다 틀어줘도 어느새 몰입해서 보고 또 보게 되니까. 그래서 골라봤다! 올해도 그냥 지나치면 아쉬울 것 같은 크리스마스영화 6편을 소개한다.
"씨네아카이브 31. 연말에는 크리스마스영화와 함께" 전문 읽기
<나 홀로 집에 2:뉴욕을 헤매다 (Home Alone 2: Lost in New York)>, 크리스 콜롬버스, 1992년 개봉
캐럴에 머라이어 캐리가 있다면 크리스마스영화에는 역시 케빈. 케빈 없이 크리스마스를 보내면 케빈 엄마가 비행기 안에서 느꼈던 이유 모를 허전함을 느끼게 된달까. 1편의 성공에 힘입어 이후 5편의 속편이 제작되었지만, 원조는 다르다고 맥컬리 컬킨이 나오는 <나 홀로 집에 1, 2>가 진짜처럼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개인적으로는 뉴욕의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가득 담아낸 2편을 조금 더 좋아한다. 영화의 스토리는 1편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에 일부 평론가들은 불호를 표하기도 했지만, 제작비를 훌쩍 뛰어넘으며 성공을 거뒀다. (사실상 나 홀로 집에 시리즈의 마지막 성공작이라고 봐도...)
<나 홀로 집에 2>는 1편에서와 마찬가지로 바쁜 어른들로 인해 방치된 아이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나 홀로 집에 시리즈 자체가 이러한 사회 풍토를 비판함과 동시에 가족 구성원의 부재를 통해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는 전형적인 가족 영화의 플롯을 따라가는데 자칫 뻔할 수 있는 소재를 슬립 스틱 코미디와 배우들의 연기력을 적절하게 버무려내며 첫 개봉 후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크리스마스 시즌마다 재방영되는 전 세계에서 통하는 크리스마스 특집 영화의 독보적인 작품으로 남았다.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 (Harry Potter And The Sorcerer’s Stone)>, 크리스 콜롬버스, 2001년 개봉
두 번째 추천작은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 해리 포터 시리즈는 <나 홀로 집에>와 함께 연말이면 영화 채널에서 몰아보기로 틀어주는 대표작이 아닐까 싶은데 영국인들도 이해할 수 없다는 한국인 한정 크리스마스영화. 시리즈는 출판사상 전례 없는 기록을 세운 화제작으로 영화화가 결정된 이후 대중들의 관심과 기대를 한 몸에 받았었는데 그중에서도 시리즈의 포문을 연 ‘마법사의 돌’은 단연 화제성이 가장 높은 작품이었다. 영화는 <나 홀로 집에 1, 2>를 연출했던 크리스 콜럼버스 감독이 맡아 활자로만 느꼈던 마법 판타지를 영상으로 완벽하게 구현해 냈는데 원작가인 조앤 롤링의 조언을 많이 참고했다고 한다. 영화는 소설 속 삽화에서 그대로 튀어나온 것 같은 해리 포터를 연기한 다니엘 래드클리프의 외모뿐만 아니라 호그와트 기숙사, 대강당 등 배경부터 소품까지 소설 속 사소한 부분까지 완벽에 가깝게 재현해 내며 원작 소설의 팬을 그대로 영화 팬으로 흡수하는 데 성공했다.
고백하자면 나 역시 원작을 읽고 또 읽던 팬이었던지라 영화 개봉 당시 부모님을 졸라 영화관에서 감상하기도 했다. 당연히 이후에도 전 시리즈의 영화를 모두 감상했지만 역시 1편의 감동은 비할 바가 못 되는 것 같다. 호그와트의 대형 트리와 눈 내리던 식당, 생애 처음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고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하던 해리까지.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가장 돋보였던 것도 ‘마법사의 돌’만 한 작품은 없었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 (Bridget Jone’s Diary)>, 샤론 맥과이어, 2001년 개봉
세 번째 추천작은 <브리짓 존스의 일기>. 헬렌 필딩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로 <러브 액츄얼리>와 함께 크리스마스 시즌 영국 로맨틱 코미디 영화를 이야기할 때 꼭 언급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원작 소설은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BBC 제작 <오만과 편견> 시리즈에서 Mr. 다아시를 연기한 콜린 퍼스가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서는 현대판 다아시라 할 수 있는 마크 역을 맡아 영국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브리짓을 연기한 르네 젤위거 역시 해당 작품으로 그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는데 그녀는 미국 텍사스 출신으로 작품을 위해 영국식 억양을 배우고 살을 찌워 술고래에 담배를 달고 사는 푼수 같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사랑스러운 브리짓을 완벽하게 표현했다. 영화는 현대를 살아가는 미혼 여성들의 심리를 가감 없이 묘사하며 개봉 당시에도 전 세계적으로 성공을 거뒀고, 국내에서도 흥행에 성공하며 2021년에는 개봉 20주년을 맞아 디지털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재개봉하기도 했다고.
<브리짓 존스의 일기>는 이후 속편까지 3편의 시리즈로 만들어졌고 3편 모두 ‘브리짓 존스’라는 미혼의 여성이 새해 결심과 함께 1년간 다이어리를 쓰는 서사 구조 안에서 자신의 사랑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3편 중 가장 평이 좋은 건 1편으로 나도 1편을 가장 좋아한다. 원작을 적절히 살려 버무려낸 각본과 연출에 배우들의 호연이 더해져 로코의 정석이란 평이 많은데 “있는 그대로의 당신을 좋아한다 (I like you very much just as you are)”는 마크의 무심한 듯 담백한 고백은 <러브 액츄얼리>의 스케치북 고백이 등장하기 전까지 많은 여성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고백 장면 중 하나로 꼽힌다.
<러브 액츄얼리 (Love Actually)>, 리차드 커티스, 2003년 개봉
네 번째 추천작은 <러브 액츄얼리>. 첫 개봉 후 6번이나 재개봉한 명실상부 크리스마스 대표 로코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올해는 개봉 20주년을 기념해 4K 리마스터링 크리스마스 에디션으로 또 재개봉했다. (이번까지 포함하면 무려 7번째 재개봉!) 로코 명가로 불리는 워킹 타이틀 제작 영화로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 <노팅 힐> 등을 연출한 리차드 커티스가 각본과 연출을 맡았다. 감독은 1970년부터 1974년까지 재임했던 영국의 수상 ‘에드워드 히이스’를 보고 만약 수상이 22살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면 어떨까를 생각하며 ‘정치인을 한 인간이자 평범한 남자로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해 모티브를 얻고 스토리를 구상하게 되었다고 한다. 각본과 연출도 훌륭하지만 출연진 역시 화려한데 휴 그랜트, 콜린 퍼스, 엠마 톰슨, 리암 니슨, 알란 릭맨, 빌 나이, 키이라 나이틀리 등 영국에서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대거 출연했다. 이외에도 출연진 대부분이 원톱으로 극을 이끌어가도 손색없을 만큼 쟁쟁한 배우들이 많은데 누구 하나 도드라지거나 이질감 없이 영화에 녹아들었다.
<러브 액츄얼리>는 여러 커플이 크리스마스 시즌에 엮이는 이야기를 그린 옴니버스 영화로 크리스마스 로맨틱 코미디의 정석으로 불리는데 수많은 패러디를 양산한 스케치북 고백 장면이 바로 이 영화에서 나왔다. 감독은 해당 장면에서 여러 구성을 고민하며 여성 스태프들에게 가장 마음에 드는 버전을 물어봤다고 하며 만장일치로 선택한 것이 스케치북 버전이었다고. 영화는 커플들의 모습을 통해 여러 형태의 사랑을 보여주며 ‘사랑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Love is actually all around)’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특히 런던 히드로 공항에서 가족, 친구, 연인들과 재회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오버랩으로 보여주는 오프닝과 엔딩 장면이 인상적인데 오프닝에 삽입된 “911 테러 희생자들이 마지막으로 보낸 문자의 내용은 모두 사랑의 메시지였다”라는 내레이션은 영화가 관객들에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함축적으로 보여줌과 동시에 깊은 울림은 선사한다.
<로맨틱 홀리데이 (The Holiday)>, 낸시 마이어스, 2006년 개봉
영국식 크리스마스 로코가 <러브 액츄얼리>라면 미국식 크리스마스 로코에는 <로맨틱 홀리데이>를 꼽고 싶다. <페어런트 트랩>, <왓 위민 원트>,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 등 로코 장인으로 불리는 낸시 마이어스 감독 작품. 감독은 시나리오를 쓰면서 들었던 음악을 영화에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로맨틱 홀리데이> 역시 감독이 좋아하는 음악을 영화 곳곳에 사용했다. 특히 영화 전반의 포근하고 따뜻한 분위기는 음악의 덕이 크다고 할 수 있는데 감독은 한스 짐머 음악 감독과 함께 끊임없이 상의하며 사운드트랙을 완성했다고 한다.
영화는 런던과 LA 정 반대에 살고 있는 두 여성 아이리스와 아만다가 크리스마를 앞두고 맞닥뜨린 실연을 극복하기 위해 하우스 스와핑 사이트를 통해 서로의 집을 바꿔 지내면서 벌어지는 소동과 새로운 인연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렸다. 낸시 마이어스 감독의 영화들은 다른 로코와는 조금 다른 결을 가지고 있는데 여주인공이 연애 스토리와 함께 성장하는 모습을 담아낸다는 점이다. <로맨틱 홀리데이> 역시 아이리스는 새로운 도전과 인생을 향해 나아가며 성장하는 모습을, 아만다는 15살 이후 눈물을 흘리지 못한다는 트라우마를 이겨내고 진정한 사랑도 찾으며 내외적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라스트 크리스마스 (Last Christmas)>, 폴 페이그, 2019년 개봉
마지막 추천작은 <라스트 크리스마스>. 에밀리아 클라크 주연 영화로 로맨스의 결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주인공이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내적으로 성장하게 되는 성장 영화에 가까운 작품이다. 영화는 열등감과 트라우마로 힘들어했던 케이트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톰을 통해 쉽게 지나쳤던 일상 속 사소한 풍경들의 소중함을 알게 되고, 비로소 주변 사람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돌보고 사랑하는 법을 깨닫게 되는 모습을 모여준다. 케이트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과 더불어 거리마다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가득한 런던의 겨울 풍경 역시 또 다른 관람 포인트.
전지적 관찰자 시점, 가끔인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영화 이야기.
시선기록장 @bonheur_archive
파리 사진집 <from Paris>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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