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아카이브 32. 종이와 스크린 사이 Part.1
새해가 되면 다이어리 첫 장에 이루고 싶은 목표를 기록하곤 한다. 연말에 돌아보며 후회할 걸 알면서도 매년 반복하게 되는 건 ‘새해’이라는 단어가 주는 긍정과 희망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올해는 작년에 달성하지 못한 목표를 첫 줄에 적었는데 ‘작년보다 책 5권 더 읽기!’ 왜 하필 5권이냐 묻는다면… 부담스럽지도 모자라지도 않아 보이는 숫자가 5였다. 다짐을 적고 보니 내가 독서를 온전히 즐길 수 있게 된 계기가 영화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해외 영화를 보는 비중이 많은데 외화는 특히나 원작 소설을 각색한 경우가 많다. 신기하게도 영화가 좋으면 원작에 대한 호기심도 커져 영화로 봤던 소설을 하나씩 찾아 읽으며 조금씩 독서에 눈을 뜨게 됐다. 영화를 통해 책의 세계에 입문한 이력(?)을 갖고 있는 관계로 영화를 보고 원작까지 읽게 된 작품이 꽤 된다. 물론 훨씬 깊이 있게 영화와 독서를 즐기는 이들과 비교하면 미미하지만, 책을 너무 안 읽어서 남몰래 부모님을 걱정시켰던 지라 지금의 성장만으로도 아주 큰 변화다. 그래서 골라본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2편! 언제나처럼 선정 기준은 발행인 마음...
"씨네아카이브 32. 종이와 스크린 사이 (소설 원작 영화)" 전문 읽기
<스틸 앨리스 (Still Alice)>, 리처드 글랫저, 2014년 개봉
<스틸 앨리스>는 리사 제노바의 동명 소설이 원작으로 아내, 엄마, 교수로서 행복한 삶을 살던 ‘앨리스’가 희귀성 알츠하이머로 기억을 잃어가면서도 온전한 자신으로 남기 위해 비극에 맞서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원작은 하버드대 신경학 박사 출신의 작가가 자비로 출간한 소설로 책이 독자들의 입소문을 통해 알려지면서 2008년 브론테상을 수상하기도 했으며 이후 출판사를 통해 정식 출간하게 되었다. (독립출판의 가장 이상적인 사례!) 작가가 소설을 집필하게 된 데에는 사연이 숨어 있다. 그녀는 신경학 박사 과정 중 알츠하이머에 걸린 여든 살 할머니의 소식을 접하고 할머니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과정에 대한 궁금증과 병에 걸린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고 싶은 마음에서 소설을 쓰게 되었다고.
소설의 영화화에도 사연이 있다. 제작과 연출을 맡은 리차드 글랫저 감독이 발음 장애로 병원을 찾았다 루게릭을 선고받은 후 소설을 접하게 됐고, 주인공이 느끼는 두려움과 고독에 공감하며 영화로 만들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감독은 영화가 개봉한 이듬해 사망해 <스틸 앨리스>는 그의 유작으로 남았다. 감독은 영화 제작 단계부터 이미 손과 팔을 움직일 수 없게 되고, 스스로 먹거나 옷을 입는 것조차 불가능해지고 나중에는 대화를 나누는 것도 힘들었음에도 영화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고 열정적으로 임하며 함께하는 배우, 스태프에게 귀감이 되었다.
주인공 ‘앨리스’ 역은 줄리안 무어가 맡아 슬픔과 좌절로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비극에 맞서는 인물을 완벽하게 표현하며 생애 최고의 연기라는 찬사와 함께 제87회 아카데미와 골든 글로브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는데 이로써 칸, 베니스, 베를린 3대 국제 영화제를 비롯해 아카데미까지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유일한 여배우에 등극했다고.(와우!) 줄리안 무어는 알츠하이머에 걸린 앨리스를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4개월 동안 관련 서적, 영화, 다큐멘터리를 섭렵하며 자료조사에 수고를 아끼지 않은 것은 물론 협회와 후원 단체를 찾아가 알츠하이머를 겪는 다양한 여성들과 대화를 나누며 인지능력 테스트를 직접 체험하기도 하는 등 완벽한 캐릭터 표현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그녀는 캐릭터를 준비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본모습이 사라지고 있다 생각하지만 곁에서 그들을 지켜보며 깨달은 것은 변화하고 있지만 진짜 모습은 어떻게든 남아있다는 것이고 그 사실이 가장 큰 감동을 주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세 아이의 엄마, 사랑스러운 아내, 존경받는 교수로서 행복한 삶을 살던 앨리스는 어느 날 자신이 희귀성 알츠하이머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행복했던 추억, 사랑하는 사람들까지도 모두 잊어버리게 된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끼지만 그와 동시에 앞으로 남아 있는 시간 앞에서 온전한 자신으로 남기 위해 현실에 당당히 맞서기로 결심한다. “지금이 내가 나 일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라 생각하고 비극을 헤쳐나가는 앨리스의 마지막은 어떤 모습으로 남게 될까?
누구보다 총명하고 언어를 사랑했던 언어학 교수 앨리스가 기억과 언어를 잃어가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삶에 맞서는 과정은 보는 이들에게 뭉클함을 선사한다. 앨리스의 감정과 내면에 집중할 수 있었던 건 줄리안 무어의 표현력 덕분이기도 하지만 영화가 고통에 맞서고 있는 당사자에게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알츠하이머를 소재로 한 영화들이 주변인들의 고통에 집중한다면 <스틸 앨리스>는 오롯이 주인공에게 집중하며 그녀에게 일어나는 변화를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가지고 있던 알츠하이머에 대한 관점을 바꿔 놓는다.
영화의 제작 비하인드를 알고 나면 왜 영화가 이런 방식을 선택했는지 이해하게 될 수밖에 없다. 루게릭을 진단받고 비슷한 고통을 겪고 있던 감독은 관객들이 알츠하이머를 경험하는 듯한 느낌을 주기 위해 영화의 모든 신에 앨리스를 등장시키고 그녀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진행한다. 앨리스의 주변 인물들도 앨리스의 시선과 관점을 통해 그려진다. 이를 통해 관객들은 사람들이 쉽게 떠올리는 ‘고통’ 보다 당사자의 ‘변화’ 초점을 맞추고 그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게 되는데 원작가가 소설을 집필하게 된 이유였던 ‘알츠하이머에 걸린 사람들의 머릿속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그녀의 마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라는 물음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는 셈이기도 하다.
마리’s Clip
“ 제가 고통받는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전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애쓰고 있을 뿐입니다. 이 세상의 일부가 되기 위해서. 예전의 나로 남아 있기 위해서. (Please do not think that I’m suffering. I’m not suffering. I’m struggling. Struggling to be a part of thing, to stay connected to who I was.) ”
기억을 잃어가는 앨리스의 슬픔, 자아의 상실 안에는 반대로 앨리스의 용기와 의연함 같은 것도 느껴진다. 무엇보다 앨리스는 좌절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고 제목 그대로 어떻게든 계속해서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들이 기억하는 앨리스(still Alice)로 남아 있으려 노력한다. 그런 앨리스의 의지를 가장 잘 느낄 수 있었던 것이 그녀가 알츠하이머 학회에서 했던 연사다. ‘세상의 일부가 되고, 예전의 나로 남아 있기 위해 애쓰고 있을 뿐’이라는 그녀의 이야기는 결코 좌절 속에 머물러 있지 않고 앞으로 걸어 나가겠다는 의지와 결연함이자 알츠하이머 환자가 아닌 보통의 사람들과 같이 현실에 충실하고 싶은 나 자신임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
전지적 관찰자 시점, 가끔인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영화 이야기.
시선기록장 @bonheur_archive
파리 사진집 <from Paris> 저자
영화 뉴스레터 ciné-arch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