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파리 한 바퀴 ep.10
여행자들의 낭만을 충족시켜주는 파리에는 파리인 듯 파리 아닌 파리 같은 파리가 있다. 파리 도심에서 8km 정도 떨어진 라데팡스. 엄밀히 따지면 파리가 아닌 일 드 프랑스에 속한 지역이지만 RER로 30분 이내에 닿을 거리라 체감상으로도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라데팡스는 프랑스 수도권을 지칭하는 일 드 프랑스 서북부 지역에 자리 잡고 있는데 쿠르브부아(Courbevoie), 퓌토(Puteaux), 뇌이쉬르센(Neuilly-sur-Seine)까지 3개의 지자체가 걸쳐 있는 방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고층건물 건축이 제한되어 있는 파리를 대신해 마천루를 보여주는 곳으로 주거지부터 공원, 대형 쇼핑몰, 각종 기업의 사무실이 주를 이루는 파리에서 작정하고 만든 계획 신도시다.
주거지부터 공원, 상업공간까지 한 데 모인 보행자 중심의 계획 신도시, 라데팡스
지금의 라 데팡스가 있던 자리는 18세기까지 방앗간만 있던 황량한 언덕이었다고 한다. 이후 교차로를 만들고 난 후 점차 주변으로 부락이 형성되었고, 1958년에 발족한 라 데팡스 개발 위원회가 장기간에 걸쳐 개발을 진행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969년 RER가 완공된 후로는 RER A 선을 비롯해 버스까지 파리와 라데팡스를 이어주는 대중교통까지 갖추게 되면서 주거지로서도 상업 지구로서도 메리트를 같게 됐다. 특히 파리 도심의 대표 상업 지구인 오페라보다 저렴한 임대료 덕분에 악사(AXA), 소시에테 제네랄 (Societé Générale), 투르 토탈 (Tour TOTAL) 등 세계적인 대기업을 포함한 500여 개의 기업이 라데팡스로 터전을 옮겼다.
방대한 공간에 각종 기업의 건물이 입주해 있으면 주변이 혼잡할 것 같지만 라데팡스는 도시 계획단계부터 지상의 자동차 통행을 엄격하게 통제하는 것을 원칙으로 만들어진 '보행자 중심 도시'다. 보행자 전용공간만 31만 제곱미터에 달하고, 긴급상황을 제외하면 모든 차량이 지하로만 이동하기 때문에 지상에서는 차량을 찾아볼 수 없다.
마천루가 자아내는 웅장한 풍경이 감탄을 자아내지만 자칫 차갑고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는 공간은 도심 곳곳에 자리한 조각품들로 온기를 더했는데 이는 라데팡스에 입주한 기업의 기부금과 프랑스 문화부의 도움 덕분이다. 유명 조각가들이 근대 작품을 라데팡스 곳곳에 설치하면서 라데팡스는 하나의 거대한 야외 조각 전시장이 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1870년 파리를 지키기 위해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프러시아군에게 저항한 시민들에게 헌정된 '바리아스의 <저항 La Defense>)로 라데팡스 지역의 이름이 유래된 작품이기도 하다. 또 하나의 대표작은 세자르의 <엄지손가락 Le Pouce>. 그 외에도 호안 미로의 <거인>, 모레티의 <괴물>, 델피노의 <신체> 등 60개의 조각품을 만나볼 수 있다. (그것도 산책하는 길에 무료로!)
아주 조금 특별한 전망대, 그랑 아슈(Grande Arche)
라데팡스는 여행자들이 일부러 찾을 만한 장소는 아니다. 하지만 라데팡스에도 랜드마크가 있다. 바로 파리의 개선문과 일직선상에 위치한 제2의 개선문으로 불리는 '그랑 아슈(Grande Arche)'. 프랑스혁명 200주년을 기념해 1889년에 만들어졌는데 루브르 박물관을 시작으로 튀를리, 콩코르드, 샹젤리제, 개선문을 잇는 단일 축 위에 놓여 있다. 가운데 뻥 뚫린 부분은 '세계를 향해 열린 창'을 상징하는데 이는 미학적으로도 기술적으로도 혁신을 이루는 건축물로 평가받는 부분이다.
겉으로 보면 거대한 조각상에 불과해 보이지만 실제 건축물로서도 기능을 하는 곳으로 내부에는 세계 인권 보호 협회를 비롯해 박물관 등이 자리하고 있다. 꼭대기에는 라데팡스의 마천루부터 파리까지 시원하게 쭉 뻗은 파노라마를 감상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는데 파리 개선문에는 엘리베이터가 없지만 그랑 아슈 전망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쉽게 올라갈 수 있다! 엘리베이터는 오전 10시부터 저녁 7시까지 운행되며 입장료는 성인 15유로. 전망대만 이용하는 요금치고는 비싸다고 느낄 수 있지만 엘리베이터 이용료에는 전시 관람 비용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
에펠탑과 개선문은 항상 여행자들로 붐비지만 그랑 아슈는 일반적인 여행지와 달리 한산하고 쾌적한 분위기 덕분에 여유를 즐길 수 있다. 여행자들이 찾는 뻔한 곳 말고 색다른 파리를 경험하고 싶다면 파리 근교 신도시 라데팡스 추천! 멀리서 말고 가까이에서 찬찬히 들여다보아야 그 매력과 진가가 보이는 누벨 파리 라데팡스. 한 달 살기 같은 장기 여행자들에게는 기회가 된다면 꼭 방문해 보기를 추천하고 싶다.
전지적 관찰자 시점, 가끔은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여행 이야기.
시선기록장 @bonheur_archive
파리 사진집 <from Paris>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