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아카이브 49. 헬렌 미렌의 시간들 Part.1
엠마 톰슨에 이은 영국 배우 특집 주인공은 헬렌 미렌! 내가 헬렌 미렌에 입덕한 시기는 늦은 편인데 <레드: 더 레전드>에서의 연기를 보고 고혹적인 섹시함에 반해 팬이 되어버렸다.
씨네아카이브 49. "헬렌 미렌의 시간들 (배우특집 ep.7)" 전문 읽기
헬렌 미렌(Helen Mirren)
헬렌 미렌은 연극부터 시작해 영화, 시리즈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곳에서 활동해 온 관록의 연기파 배우. 여전히 계층 간의 구분이 존재하는 영국 내에서도 실력으로 존재감을 증명하며 여성 기사 작위에 해당하는 ‘데임(Dame)’ 작위를 수여받은 워킹 클래스 출신의 배우이기도 하다. 지금은 연기파 배우로 알려져 있지만 데뷔 당시에는 섹스 심벌 이미지가 강한 배우였다고 하는데 작품을 통해 연기력을 증명하며 아카데미를 비롯해 골든 글로브와 에미상까지 거머쥐었다.
헬렌 미렌의 이름을 대중적으로도 널리 알리게 된 작품으로는 <더 퀸>을 꼽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영화가 개봉했던 해에 기자들로부터 ‘헬렌 미렌의 해’라는 평을 받았을 만큼 뛰어난 연기력을 보여주며 베니스 영화제, 아카데미, 골든 글로브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특히 헬렌 미렌은 미국의 HBO와 영국의 채널 4가 공동으로 제작한 2부작 <엘리자베스 1세>로 에미상에서도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는데요. 영국의 두 엘리자베스 여왕을 모두 연기하고 영미권의 연기상을 휩쓴 유일한 배우가 아닐까.
나는 <레드: 더 레전드>에서의 연기를 보고 고혹적인 섹시함에 반해 팬이 되었는데 그녀의 필모그래피를 꺼내 볼 때마다 세월의 흐름에 관계없이 때로는 고혹적인 아름다움을, 때로는 섹시함을, 때로는 근엄함을, 때로는 인간미를 보여주는 그녀의 연기 내공에 감탄하게 된다. 언론에서 표현한 말을 빌리자면 “젊음에 사로잡힌 세상에서 장년에 접어든 여성들의 희망(인디펜던트)이고, 데임 작위를 받은 배우들 가운데 예순이 넘어서도 섹슈얼한 전율을 뿜어낼 수 있는 사람(더 타임스)이다”라는 표현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게 된다.
더 퀸(The Queen), 스티븐 프리어즈, 2006년 개봉
<더 퀸>은 1997년 다이애나 전 왕세자비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후 그녀의 장례 절차를 두고 영국 왕실과 의회 사이에 있었던 일주일 간의 갈등을 그렸다. 영국 왕실과 엘리자베스 2세를 향한 언론의 비난과 민심 그리고 왕실의 대응을 그린 영화는 작품성과 함께 주연을 맡은 헬렌 미렌의 연기력으로 입소문을 타며 흥행에 성공했는데 개봉 당시 미국에서 단 3개의 상영관에서 개관해 이후 500% 이상의 스크린 수를 넘겼다고 한다.
감독과 각본가는 다이애나 전 왕세자비 사망 후 여왕이 버킹엄 궁에서 추도사를 발표하기 전까지의 일주일을 그렸는데 당시 다이애나를 좋아했던 많은 이들이 왕실과 여왕이 그녀를 죽음으로 내몬 것과 다름없다고 비난을 쏟아낼 때, 궁 안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에 집중하며 여왕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냈다. 이는 단순한 상상력이 아닌 광범위한 취재를 바탕으로 만든 것으로 총리나 왕실과 가까운 익명의 정보원들을 만나며 당시 여왕의 반응은 어떠했는지, 당시 총리였던 토니 블레어의 대처는 어떠했는지 등을 바탕으로 했다고 한다.
엘리자베스 2세를 연기한 헬렌 미렌 역시 여왕을 아는 사람들을 만나 사소한 습관이나 여왕과 관련된 일화들을 모아 연구했다고 하는데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가장 도움이 되었던 것은 마릴린 크로포트가 쓴 엘리자베스 2세의 전기 『리틀 프린세스』와 여왕이 12살 때 차에서 내리며 인사하던 짧은 순간이 담긴 영상이었다고 한다. 이는 헬렌 미렌 본인이 젊음을 잃지 않고 노년의 여왕을 연기하기 위해 소녀 시절의 엘리자베스 2세를 끊임없이 들여다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당시 그녀의 연기력이 영화의 흥행과 평단의 호평을 끌어낸 만큼 실제로 여왕도 영화를 보고 헬렌 미렌의 연기를 마음에 들어 하며 저녁 만찬에 따로 초대하기도 했다고 한다. (생존하고 있던 여왕도 인정한 연기력!)
1997년 8월 영국 왕실에서 배출한 가장 유명한 여인인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왕실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았던 다이애나 비의 사망 소식은 영국 국민을 슬픔에 빠지게 하고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버킹엄 궁전으로 향하는 추모 행렬이 끊이지 않지만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가족 휴가를 위해 머물던 발모럴 성에서 조의에 대한 어떤 표현도 보이지 않는다. 이에 국민들의 불만이 커져가고, 언론도 여왕의 태도를 비난하기 시작하자 군주제 위기론까지 거론되며 여왕의 심기가 불편해진다. 한편 새로 부임한 토니 블레어 총리는 멀어지기만 하는 왕실과 국민들 사이에 다리를 놓기 위해 여왕을 설득하기 시작한다.
영화는 왕실을 대표하는 여왕과 의회를 대표하는 총리 사이의 관계를 흥미롭게 그렸다. 블레어의 총리 임명 장면과 엔딩 시퀀스에서 보이는 미묘한 분위기 변화는 두 사람의 감정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여왕은 총리의 추모 메시지 요청에도 ‘다이애나가 더 이상 왕실이 일원이 아니며 슬픔도 품위 있게 대응해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한다. 왕실의 계속된 묵묵부답에 의회의 의견을 넘어 왕실과 국민 사이에 간극이 생길 위기에 처하자 총리는 이를 중재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여왕이 지닌 왕관의 무게와 그 뒤에 가려진 고뇌를 이해하게 되는데 이는 왕실에 반대하는 입장인 노동당 당수로서 총리가 된 입장에서 상당한 변화이자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을 것 같은 여왕 역시 총리의 충고를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임으로서 왕실과 의회가 다이애나의 죽음을 두고 줄다리기를 한 일주일의 시간이 대립이라기보다 서로의 위치를 이해하게 되는 과정으로 느껴졌다.
마리’s CLIP:
“사람들은 눈물과 감동을 원하지만 나는 감정을 표현하지 않아. 간직할 뿐이지. 그렇게 배웠고 국민들도 그런 여왕을 원하는 줄 알았어” – 엘리자베스 2세
<더 퀸>에서도 엘리자베스 2세의 생애를 다룬 넷플릭스 시리즈 <더 크라운>을 보고도 느꼈지만, 엘리자베스 2세는 평생 군주로서의 책임감을 막중하게 느낀 인물 같았다. 다이애나의 사망 후 추도사를 발표하기 전까지 보인 모습은 냉정함 보다 언제나 군주의 도리가 먼저였던 책임감에서 비롯된 것처럼 느껴졌는데 그렇기에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도 인간 엘리자베스와 군주 엘리자베스 사이에서 혼자 감내해야 하는 고독을 섬세하게 표현한 부분들이었다. 무엇보다 여왕의 품위와 위엄 뒤에 소박함을 간직한 여왕의 모습은 헬렌 미렌의 연기를 통해 현실감을 얻어 더욱 생생하게 와닿는다.
전지적 관찰자 시점, 가끔인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영화 이야기.
시선기록장 @bonheur_archive
파리 사진집 <from Paris> 저자
영화 뉴스레터 ciné-arch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