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좋아한다면 한 번은 봐야할 세기를 빛낸 영화들
새해 다짐 중 하나가 ‘현생과 시간을 핑계로 보고 싶은 영화를 미루지 말자’였는데 힘찬 붉은 말의 해 병오년 첫 번째 아카이빙은 발행인의 다짐을 반영한 주제로 골라봤다. 이름하야 ‘세기를 빛낸 영화’ 특집! 영화나 책은 한 번 감상하고 끝나는 예술이 아닌 세월이 흘러 작품을 다시 접하게 되었을 때, 관점 변화에 따라 새롭게 다가온다는 점이 가장 큰 매력이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는 오래전에 봤던 영화를 다시 꺼내 보기도 하고 어렵고 난해하다는 이유로 미뤄왔던 영화를 찾아보기도 하며 영화를 깊이 있게 감상해 볼 계획(...을 거창하게 세웠다). 씨네아카이브가 선택한 가이드는 2016년 BBC에서 36개국 영화평론가 177명의 투표로 선정한 21세기 최고의 영화 100편 리스트! 그중 상위권에 랭크된 영화 10편을 골라 담았다.
씨네아카이브 79. "세기를 빛낸 영화들 1편" 전문 읽기
멀홀랜드 드라이브 (Mulholland Drive), 데이비드 린치 감독, 2001년 개봉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할리우드 스타를 꿈꾸는 두 여배우의 대조적인 삶을 현실과 환상(꿈)을 교차시켜 그려낸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작품이다. 영화는 공개와 함께 평론가들로부터 극찬을 받으며 BBC 선정 21세기 최고의 영화 1위에 선정되었는데 이외에도 유수의 영화 선정 리스트에서 꾸준히 상위권에 랭크되는 명실상부 21세기를 빛낸 작품으로 꼽힌다. (하지만 관객들 사이에서는 호불호가 갈리는 작품…)
<멀홀랜드 드라이브> 줄거리
어느 날 밤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 자동차 사고가 발생하고 가까스로 살아남은 리타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채 근처 빌라에 숨어들게 된다. 한편 배우의 꿈을 안고 LA에 도착한 베티는 잠시 비어있는 이모의 집을 방문하고 그곳에서 숨어있는 리타를 발견한다. 이후 베티는 자신의 미래를 보장할 감독과의 미팅도 제쳐두고 리타를 돕기 위해 그녀의 기억에 남아있는 단서인 ‘다이안’이라는 인물을 찾아 나선다.
원래는 TV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기획되었는데 난해함을 이유로 방영이 취소되며 폐기될 뻔했으나 프랑스 제작사에서 장편 영화화를 제안하면서 기존의 열린 결말을 완성하고 재편집해 지금의 영화로 탄생하게 되었다고 한다. 영화는 현실과 꿈을 오가며 동일한 배우가 다른 이름으로 캐릭터를 오가는 등 난해한 지점이 많아 관객들에게는 호불호가 갈리지만, 어떤 관점과 방식으로 보느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을 불러일으키며 파편화된 이야기의 조각을 맞춰나가는 재미가 있다. 발행인 역시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영화를 관람하고 혼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가 재관람을 통해 조금씩 영화의 진가를 발견하게 된 기억이 있는데 어쩌면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영화에 따라붙는 수식어로 인해 진면모를 알아보기 힘든 작품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화양연화 (花樣年華), 왕가위 감독, 2000년 개봉
<화양연화>는 중년 남녀의 완숙한 사랑을 왕가위 감독의 독보적인 미장센으로 담아내며 개봉과 함께 평단의 극찬을 받은 작품이다. 영화는 칸 영화제 황금 종려상 후보에 노미네이트 되었고 주연을 맡은 양조위는 홍콩 배우 최초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는데 BBC 선정 21세기 최고의 영화 2위에 랭크되었다. 당시 설문에 참여한 평론가들은 “상실과 욕망이라는 보편적인 언어를 이보다 유창하게 표현한 영화는 없었다”라고 평했을 만큼 21세기 아시아 최고의 사랑 영화로 꼽힌다. (1위에 선정된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관객들의 호불호가 큰 작품이지만 <화양연화>의 경우 평단을 비롯한 관객들에게 꾸준히 사랑받는 대표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화양연화> 줄거리
1962년 홍콩의 한 아파트. 같은 날 옆집으로 이사를 오게 된 모완과 첸 부인은 이삿날을 시작으로 우연히 자주 마주치게 된다. 각자 가정이 있지만 어쩐지 서로의 배우자들이 자리를 비우는 날이 점차 많아지자 두 사람은 서로의 배우자들이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 눈치채게 되고 배우자의 빈자리와 외로움이라는 공통점으로 서로를 위로하다 조금씩 가까워진다. 하지만 서로를 향한 감정이 깊어질수록 조심스러움과 예견된 결말로 인해 함께 마음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영화는 왕가위 감독이 2개의 에피소드로 구상한 음식 영화에서 출발했는데 그중 한 편의 이야기를 발전시켜 완성한 것이 <화양연화>다. 최근 개봉 25주년을 기념해 <화양연화 특별판>이 개봉했는데 본편에 9분 분량의 단편을 추가한 것으로 이 9분 분량의 단편이 처음 구상했던 에피소드로 칸 영화제에서 공개된 이후 봉인되어 있다 이번에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제목인 ‘화양연화’는 ‘인생에서 꽃처럼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을 의미하는데 1930년대 중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동명의 곡에서 제목을 차용한 것으로 역시 영화에 삽입된 곡이다. <화양연화>는 독보적인 미장센과 함께 수려한 사운드트랙도 돋보이는데 테마곡인 ‘Yumeji’s Theme(유메지 테마)’가 가장 대표적으로 이외에도 냇 킹 콜의 재즈 곡들이 다수 삽입되어 있다.
데어 윌 비 블러드 (There Will Be Blood),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 2007년 개봉
<데어 윌 비 블러드>는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 미국 서부의 골드러시 역사와 함께 욕망과 탐욕으로 서서히 파멸해 가는 인간의 모습을 ‘대니얼 플레인뷰’라는 남자의 일대기를 통해 그려낸 작품이다. 영화는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필모그래피 중에서도 최고의 걸작으로 거론되는 작품으로 BBC 선정 21세기 최고의 영화 3위에 랭크되었다.
<데어 윌 비 블러드> 줄거리
고아가 된 아이를 양자로 들여 홀로 키우는 ‘대니얼 플레인뷰’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황무지 사막 한가운데서 금을 캐는 무일푼의 광부다. 어느 날 대니얼은 이곳에서 석유 유전을 발굴하고 일확천금의 행운을 누리게 되는데 아들과 함께 ‘패밀리 비지니스’를 내세워 석유 사업을 시작하며 시작된 그의 야망은 어느새 탐욕으로 바뀌게 되고 쉴 틈 없이 솟구치는 석유와는 반대로 대니얼의 삶은 점차 파멸의 길로 들어서기 시작한다.
영화는 업튼 싱클레어의 소설 『오일!(Oil!)』에 기반하고 있지만 소설에서는 일부분을 차용했다고 할 수 있는데 “특정 시공간을 골라 시대성을 드러내며 그 속에서도 소집단 내의 주인공을 중심으로 관계 묘사를 섬세하게 표현”하는 능력이 뛰어난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은 <데어 윌 비 블러드>를 통해 미국 서부의 골드러시 시대를 배경으로 지금의 미국을 만든 물질적인 상징(금광과 석유를 통한 아메리칸드림)과 정신적인 상징(기독교)을 뒤틀어서 표현하며 평단과 관객들의 찬사를 받았다. 영화는 감독의 걸작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욕망을 쫓아 영혼을 파멸시키는 것조차 마다하지 않는 ‘주인공을 연기한 ‘대니얼 데이 루이스’의 걸출한 연기력 역시 돋보이는데 대니얼 데이 루이스는 그해 아카데미에서 두 번째 남우주연상을 거머쥐기도 했다. 참고로 영화의 제목은 성경의 출애굽기의 구절 중 ‘모든 물이 피가 되리라’는 구절에서 따왔다고 한다.
보이 후드 (Boyhood), 리차드 링클레이터 감독, 2014년 개봉
<보이후드>는 ‘메이슨’이라는 6살 소년이 18살 성인이 될 때까지의 12년을 매년 15분씩 기록해 완성한 ‘시간을 기록하는 예술’의 정수를 제대로 보여준 리처드 링클레터 감독의 작품이다. 영화는 한 아이의 성장기를 통해 우리의 삶과 일상에서 소중한 가치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하며 개봉과 함께 평단의 극찬을 받은 것은 물론 제64회 베를린 영화제 감독상을 비롯해 유수의 영화제를 휩쓸었는데 BBC 선정 21세기 최고의 영화 5위에 랭크되었다. (참고로 4위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으로 이미 소개한 적이 있기에 건너뛰었다.)
<보이후드> 줄거리
여섯 살 메이슨 주니어와 누나 사만다는 싱글맘인 올리비아와 텍사스에서 살고 있다. 아빠 메이슨 시니어는 일주일에 한 번씩 들러 메이슨과 사만다를 데리고 캠핑을 가기도 하고 함께 야구장에도 가며 친구처럼 놀아주지만 함께 살 수는 없는데 여기에 엄마의 일 때문에 낯선 도시로 이사를 다녀야만 하는 메이슨은 외로운 날을 보내며 점차 성장해 나간다.
영화는 주인공 소년의 부모를 연기한 에단 호크와 패트리시아 아퀘트를 제외하면 대부분 무명배우들로 촬영은 감독의 고향이자 거주지인 휴스턴에서 1년에 15분 분량을 촬영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무엇보다 필름으로 촬영을 진행한 작품으로 긴 촬영 기간을 통과하며 후반부에는 필름 룩을 유지하기 위해 꽤나 고생하기도 했다고. <보이후드>는 한 소년의 성장을 따라가며 소년의 삶이 고스란히 영화가 되는 소년의 성장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시간이 흐름에 따라 우리의 기억은 어떻게 구성되는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이기도 한데 개인적으로 <비포 시리즈>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영화란 ‘우리의 삶 속에 흐르는 시간과 기억을 기록하는 예술’이라는 것을 보여준 감독의 재능과 집념에 감탄하게 된 작품이다.
이터널 선샤인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미셸 공드리 감독, 2004년 개봉
<이터널 선샤인>은 사랑했던 남자를 기억에서 지워버린 여자와 그 기억을 지우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남자를 주인공으로 기억을 말소당한 연인들의 러브스토리를 그린 작품이다. 보편적인 사랑에 ‘기억 삭제’라는 판타지적 소재를 절묘하게 활용한 <이터널 선샤인>은 주인공의 만남과 헤어짐을 통해 ‘기억’이란 우리의 뇌뿐만 아니라 정신과 몸 곳곳에 남아 있다는 것을 보여줌과 동시에 나쁜 기억을 제외하고 누군가를 온전히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진정한 사랑은 고통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며 깊고 풍부한 사랑이야기를 완성했다. 영화는 찰리 카우프먼의 각본에 독창적인 뮤직비디오로 이름을 알린 미셸 공드리의 연출이 더해진 21세기 멜로의 걸작으로 BBC 선정 21세기 최고의 영화 6위에 랭크되었다.
<이터널 션사인> 줄거리
조엘은 누구보다 사랑했던 연인 클레멘타인이 자신을 기억 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픈 기억만 선택적으로 지워준다는 ‘라쿠나 사’를 찾아가 헤어진 연인 클레멘타인의 기억을 지우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기억이 사라져 갈수록 사랑이 시작되던 순간, 행복한 기억들, 가슴속에 각인된 추억들을 마주하며 조엘은 자신의 기억 속에서 클레멘타인과 함께 도망치기 시작한다.
‘기억을 말소당한 연인들의 러브스토리’라는 독창적인 이야기는 미셸 공드리 감독의 친구가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당신에 대한 기억이 지워졌습니다’라는 서신을 받으면 그들의 삶은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미셸 공드리 감독은 이를 토대로 시놉시스를 만들어 각본가를 찾아다녔지만 모두 스릴러물을 원했다고. 그러던 찰나 찰리 카우프만을 만나게 되면서 “한때 절절하게 사랑했던 이가 나를 기억에서 지운 뒤라면 이 이야기는 어떻게 흘러가게 될 것인가”라는 영화적 합의점을 찾고 마침내 <이터널 선샤인>이 탄생하게 되었다. 영화의 제목은 당시 알렉산더 포프의 시 『엘로이즈가 아벨라르에게 (Eloisa to Abelard)』를 읽고 있던 찰리 카우프만이 시의 구절 중에서 ‘무구한 마음의 영원한 햇빛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을 인용했다.
전지적 관찰자 시점, 가끔인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영화 이야기.
시선기록장 @bonheur_archive
파리 사진집 <from Paris>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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