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산책 4번째 여행지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와인 산지 부르고뉴다. 부르고뉴에서 처음 방문한 도시는 디종이었다. 디종이 부르고뉴의 주도이기도 하고 근교 와이너리 투어를 위한 중심지로서도 편리하기 때문에 여행자들이 많이 찾는다. 나도 디종에 머무르는 동안 가까운 거리에 있는 와이너리에 다녀왔으니까. 와이너리 투어도 색다른 경험이고 즐거운 추억이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디종을 떠올렸을 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도시의 풍경이었다. 목조 건축물과 독특한 양식의 모자이크 지붕 그리고 도심 곳곳에서 우리를 반겨주던 올빼미와 나를 뵈프 부르기뇽의 세계로 인도해 준 맛있는 음식들까지. 디종은 와인 말고도 여행자들을 사로잡는 다채로운 매력을 지닌 도시였다.
올빼미와 함께 디종 구시가지 산책
우리에게 디종은 파리에서 리옹까지 이어지는 자동차 여행 중간에 거쳐가는 도시였다. 비행기로 치면 일종의 경유지랄까. 그래서일까. 첫 방문부터 특별한 기대도 도시에 대한 정보도 없이 숙소만 예약한 상태로 가볍게 방문했다. 숙소에 도착하면 리셉션에서 근처 와이너리를 추천받고 나머지는 발길 닫는 대로 돌아다녀 볼 생각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거창한 계획 없이 방문했던 것이 나만의 시선으로 디종을 발견할 수 있는 신의 한 수였던 것 같다. '와이너리' 뒤에 가려진 부르고뉴 지방의 색다른 매력을 여행을 통해 하나씩 발견하게 되었으니까.
미처 몰랐던 디종의 색다른 모습 중 하나는 구시가지 건물의 수놓은 모자이크 지붕이다. 구시가지를 돌아다니다 보면 유약을 바른 색색의 모자이크 지붕들이 눈에 띄는데 이건 부르고뉴 지방에서만 볼 수 있는 건축 양식이라고 한다. 골목길을 걸을 때마다 다른 무늬를 찾아보려 나도 모르게 자꾸 고개를 들어 지붕을 쳐다보고 그러다 하늘도 한 번 보고 천천히 도시를 음미하는 여행의 맛을 처음으로 알게 됐다.
디종은 건축 문화 유적지로도 유명하다. 특히 중세 시대 흔적이 잘 보존된 구시가지 골목은 대부분이 보행자 전용 도로라 구석구석 골목을 탐방하며 걷기 좋다. 구시가지를 걷다 보면 바닥에 올빼미가 새겨진 표식을 발견할 수 있는데 모자이크 지붕과 함께 디종 산책에서 소소한 즐거움을 안겨준 주인공이다. 'Le Parcours de la Chouette'라는 올빼미투어를 위한 표식인데 구시가지의 유적지들을 둘러볼 수 있도록 안내해 주는 역할을 하는데 올빼미를 따라가다 보면 디종의 대표 건축물 중 하나인 노트르담 성당을 만나게 된다.
디종의 노트르담 성당은 부르고뉴 건축의 걸작으로 평가받지만 사실 성당에서 가장 유명한 건 따로 있다. 성당 북쪽 외관 벽면에 조각된 올빼미. 조각상에 왼손을 대고 쓰다듬으며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올빼미 조각상에 소원을 빌기 위해 노트르담을 방문한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는지 올빼미의 얼굴은 눈, 코, 입이 사라지고 없었다. 올빼미 조각은 성당이 처음 지어졌을 때부터 있었던 건 아니고 몇 세기 후에 새겨졌다고 하는데 어떤 이유에서 새겨졌는지, 어쩌다 소원을 이뤄주는 존재가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오랜 세월 묵묵히 사람들의 손길을 받아내고 있다. 정말 이뤄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나도 조심스레 왼손으로 올빼미를 쓰다듬으며 소원을 빌었다.
리베라시옹 광장에서 뵈프 부르기뇽을!
올빼미에게 소원을 빌고 난 후 역사 지구 중앙에 자리한 리베라시옹 광장으로 이동했다. 리베라시옹 광장은 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소로 꼽힌다. 리베라시옹 광장 뒤편으로 보이는 건 부르고뉴 대공 궁전으로 지금은 시청으로 사용 중이라고 한다. 프랑스 곳곳을 여행하면서 느끼는 건 어딜 가든 '가장 아름다운' 것들이 참 많다는 것. 가는 곳마다 '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혹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장소를 꼭 한 번씩은 마주하게 되는데 마치 누군가 내려주는 작위와 같은 수식은 누가 어떤 기준으로 붙여주는 것인지 늘 궁금하다.
리베라시옹 광장 주변으로는 식당이나 카페가 많다. 오전 내내 걷느라 지친 발걸음을 쉬어 가기 위해 근처 식당에 방문했는데 선정 기준은 오직 하나였다. 뵈프 부르기뇽을 가장 맛있게 요리해 줄 것 같은 곳! 고백하건대 내가 부르고뉴에 가고 싶었던 이유는 와이너리 투어도, 디종의 올빼미에게 소원을 빌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오직 뵈프 부르기뇽을 부르고뉴 지역에서 먹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부르고뉴는 리옹만큼이나 맛있는 음식이 많은 지역 중 하나로 꼽히는데 특히 한국인들의 입맛에도 무난하게 어울리는 육류 요리가 발달했다. 갈비찜과 비슷한 뵈프 부르기뇽, 매운 양념 대신 와인이 들어간 닭볶음탕 같은 꼬꼬뱅, 골뱅이무침이 럭셔리하게 다시 태어나면 에스카르고가 되는 거다.
프랑스를 여행하다 보면 프랑스 사람들이 자국의 미식 문화에 갖는 자부심이 왜 남다른지 알게 된다. 프랑스는 지역마다 대표 음식이 있다. 알자스에 가면 슈쿠르트, 로렌 지방은 키슈, 브르타뉴는 걀레트, 프로방스로 내려가면 부이야베스를 먹어야 하는 것처럼. 고로, 부르고뉴에 왔다면 에스카르고와 뵈프 부르기뇽을 먹어야 한다. 처음 뵈프 부르기뇽을 알게 된 건 영화 <줄리 앤 줄리아> 때문이었다. 미국에서 프랑스 요리를 대중화시킨 요리연구가 줄리아의 레시피를 하나씩 따라 만들며 블로그에 기록하던 줄리가 요리 블로거로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 음식이자 가장 많은 애정을 쏟아부은 음식이 뵈프 부르기뇽이었는데 만드는데 많은 시간과 정성이 필요하다. 뵈프 부르기뇽 앞에는 '지상 최고의 쇠고기 요리'라는 수식어가 붙기도 하니 말 다 했지 뭐. 그래서 뵈프 부르기뇽의 본고장인 부르고뉴에 가면 꼭 먹어보고 싶었다. 찾아보면 분명 유명한 식당이 있을 테지만 명색이 지역을 대표하는 음식인데 어디를 가도 맛있을 거란 믿음(?)으로 광장 주변에서 가장 맛있게 요리해 줄 것 같은 곳을 골라서 들어갔다. 그리고 나의 촉은 꽤 믿을만했다. 처음 먹어본 그날의 뵈프 부르기뇽 맛은 나에게 미슐랭 쓰리스타 못지않았으니까.
디종 근교 산책 & 와이너리 투어
디종에서는 3일을 머물렀는데 그중 하루는 와이너리 투어에 할애했다. 아름다운 포도밭 풍경을 보고 싶다면 가을이 가장 방문하기 좋은 시기지만 나는 겨울 바캉스에 맞춰 떠났던 여행이라 아쉽게도 황금빛 포도밭 대신 조금 황량하고 삭막한 포도밭만 볼 수 있었다. 디종에서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는 와이너리 중 가장 많이 방문하는 곳은 샤토 마르산네이(Château de Marsannay). 부르고뉴 최고의 피노 누아 산지인 꼬뜨 드 뉘(Côte de Nuits)에 속해 있는 와이너리다.
와이너리 투어는 보통 와이너리의 역사, 생산하고 있는 포도 품종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나면 와인 저장고인 꺄브를 둘러보고, 생산하는 와인 시음을 끝으로 마무리된다. 투어를 하기 전까지만 해도 와인 애호가까지는 아니었는데 (그러기엔 나는 너무도 알쓰...) 투어에 참여하고 나니 애호가가 되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기회가 된다면 언젠가 꼬뜨 드 뉘에서 유명한 본 로마네도 방문해 보고 싶은데 그랑 크뤼 중 최고 와인이라 알려진 로마네 꽁띠가 본 로마네 마을에서 생산된다.
최근 부르고뉴를 배경으로 한 영화 <부르고뉴 와인에서 찾은 인생>을 다시 봤다. 영화 속에는 부르고뉴 포도밭의 사계절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데 다시 보니 겨울 포도밭의 황량함은 또 나름의 분위기와 운치가 느껴졌다. 부르고뉴 여행은 겨울에 떠났던 탓에 포도송이가 알알이 여문 포도밭을 보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는데 아쉬워만 하느라 미처 겨울 포도밭의 매력을 발견하지 못했던 건 아니었을까 후회가 남는다. 기억 속 부르고뉴에는 금빛 포도밭은 없지만 대신 부르고뉴의 역사와 문화가 담긴 아름다운 건축물과 모자이크 지붕, 올빼미 그리고 뵈프 부르기뇽이 남았으니 이만하면 금빛 포도밭을 대신할 만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Reference
리옹 관광청 (lyon-france.com)
본 글은 네이버 여행+ CP 8기 활동으로 제공한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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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적 관찰자 시점, 가끔은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여행 이야기.
시선기록장 @bonheur_archive
파리 사진집 <from Paris>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