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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가경 Nov 03. 2023

그렇게 보일 뿐, 보여주지 않았다

무심한 말들

가을의 코스모스

내 앞으로는 늘 허들이 있었다. 분명 그의 손을 잡고 함께 나아가는데, 내 앞으로만 넘어야 하는 허들이 항상 있었다. 우리의 동행길은 늘 그래왔다. 


그럼에도 나는 그 길을 그와 함께 가고 싶었다. 동등하게 나란하게 발을 맞춰 함께 나아가고 싶었다. 그러다 서로 얼굴을 마주하며 웃기도 하고 땀을 닦아주기도 하며, 어깨를 토닥이고도 싶었다. 고개를 돌리면 따스한 눈빛이 닿을 수 있도록 늘 그와 나란하고 싶었다. 

그와 거리를 두지 않으려면 나는 단단해져야만 했다. 애초에 우리는 같은 길이 아니었고, 단지 손을 잡았다고 해서 시련이 같아지지도 않았다. 나는 한 손을 잡고 쉽지 않은 허들을 넘고 또 넘으며 그와 얼굴을 마주했다.


어느 때는 작은 허들이 또 어느 때는 높은 허들이 있었고, 가시 같은 허들도 때때로 존재했다. 나는 멈춰 섰고 어쩔 줄 몰라 사방을 둘러봤다. 그때마다 넘지 못하는 나를 자책했고 무너졌고 깊이 떨어졌으며 시간에 증발되기도 했다. 그러는동안 그는 나를 향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니, 하지 않았던 것인가. 내 허들은 그에게 의아함 말곤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는 멍한 나를 보며 어쩌지 못하는 표정만 지었다. 


그때마다 나는 되뇌었다. 내가 견뎌야 할 나만의 몫이라고, 그와 함께 가야 한다면 반드시 이겨내야 한다고. 그래야 그의 옆에 존재할 수 있다고.

그러는 사이 나는 허들에 못 이겨 몸을 낮췄고, 무릎을 꿇었고, 땅을 짚어 기어가는 일도 허다했다. 때로는 허들에 부딪혀 상처가 난적도 많았다. 


언제부턴가 내 앞길을 가로막은 촘촘한 허들은 띄엄띄엄 놓여 있다. 이제는 망연한 나를 곁눈질할 필요 없이 그는 앞만 보고 간다. 나는 늘 그래왔듯 허들 앞에서 알아서 몸을 낮추고 무릎을 꿇는다. 어쨌건 손을 잡고 있는 이상 모든 게 순리적으로 돌아가는 것만 같았다. 

그런 그가 어느 날, 내게 말했다.

'너는 보이는 삶을 사는 것 같다고.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삶을 살기 위해 애쓰고 있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힘들지 않다고 아프지 않다고 죽을 것같이 고통스러워도 그렇지 않다고 나의 표정을 숨기고 감정을 묻었던 숱한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나는 단 한 번도 보여주기 위해서 내 삶을 버텨내지 않았다. 너의 웃는 얼굴을 보고 싶어 웃음을 지어 보였고, 동정의 눈빛이 싫어서 대범스러웠을 뿐이었다. 


우리의 사랑은 우리가 지나온 길만큼이나 너무나 달랐다. 손을 잡고 있는 내내 그것은 결실이었므로 나는 웃음을 지어 보였건만 그는 그렇게 웃지 않아도 된다고, 힘들면 멈추라고, 손을 놓고 온몸을 뒤덮은 흙을 털어내는 동안 거리를 둬도 된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존재는 전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누구나 무엇이든 있어도 없는 게 될 수 있고, 없어도 있는 것이 될 수 있으니까. 그러나 내게 있어 존재는 전부다. 살아있고, 옆에서 숨 쉬고, 만지면 닿는 것들이 내겐 전부가 된다. 허상으로 내 삶을 조금이라도 채우기가 싫다. 그래서 나는 그의 말이 몹시도 아프다. 그에게 보인 나의 웃음이 나의 애씀이 그의 전부가 아녔음에 마음이 저린다. 아프다고 힘들다고 죽을 것 같다고 그대로 주저앉았다면 그가 날 일으켜주었을까? 날 이해한다고 품에 안았을까? 너만의 몫이 아니라고, 그건 우리의 몫이라고 그 무섭고 높은 허들을 함께 뛰어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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