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이기도 하고 을이기도 한!
그녀가 왔다. 다시는 안 올 줄 알았는데 왔다. 접수를 하기 위해 이름을 말하는 순간 과거의 기억이 스쳐 갔고 우리는 눈이 마주쳤다. 마스크를 하고 있었지만 눈이 마주친 순간 서로의 존재를 알아봤다. 그녀의 동공도 나의 동공도 흔들렸다. 아직도 있을 줄 모르고 온 그녀도 흔들렸고, 설마 다시 오겠어했던 나도 흔들렸다. 진료를 보기까지 대기시간은 한 시간 정도. 어색한 공기가 온 접수실을 감쌌다. 그녀와 나만 아는 어색한 공기다.
3년 전, 그녀는 팔목에 골절상을 입고 내원했다. 작은 키에 통통한 몸매, 얼굴은 예쁘고 후덕한 아줌마 상이 었다, 옷은 직장맘 스타일로 깔끔하게 입고 다녔다. 후덕하게 생긴 것과 반대로 진료를 보러 올 때마다 워낙 까탈스럽게 굴었다. 늘 오전 진료 마감시간에 턱걸이로 와서 총(눈총)을 좀 많이 맞았던 환자다. 늦게 와놓고 대기 시간은 못 참아 언제 되냐고 몇 번을 재촉하는 스타일이다. 붕대 하나에도 예민하게 굴며 이쪽으로 감아라 저쪽으로 감아라 말이 많던 환자였다. 통기브를 하고 나서도 불편하다고 일주일 만에 자르고 다시 했던 환자라 원장님도 좀 신경 쓰며 봤던 환자다. 모든 것에 날이 서 있던 환자라 그녀가 오면 우리들도 덩달아 날이 섰다. 겉으로는 모든 걸 들어주는 척 친절했지만 속마음은 아이고 이 진상아 언제 치료 끝나 안 보냐였다.
팔목 골절은 치료까지 한 달 반가량이 걸린다. 첫 주는 주 2회 방문이고 그다음부터는 일주일에 한 번씩 와서 골절 부위가 잘 유합 되고는 있는지 X-ray를 찍어 체크한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한 달 반 동안 주 1회를 보면 정이 든다. 그러나 그녀는 올수록 정나미가 떨어지던 환자였다.
골절 환자분들이 오해하는 한 가지가 있다면 깁스를 풀면 모든 게 해방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한 달 반 동안 고정시켜 놓은 손목은 움직일 수 없고 움직일 때마다 통증이 온다. 조금만 움직여도 팔이 퉁퉁 붓는다. 그녀도 그랬다. 깁스를 풀면 모든 게 다 끝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움직여지지 않고 아프고 힘이 들어가지 않으니 일상생활에 불편을 호소하며 계속 내원했다. 다른 방법은 없다. 열심히 와서 물리치료를 받는 것, 그리고 시간이 지나야 한다는 것이 방법이다. 언제쯤 골절 이전처럼 돌아가나 싶지만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돌아간다. 참고 견디는 건 각자의 몫이다.
직장에 다니는 관계로 매일 물리치료를 받지 못하자 그녀의 손목은 회복 속도가 느렸다. 몇 번 와서 불편을 호소하다가 그마저도 오지 않았다.
사건이 있던 날, 그녀는 점심시간을 2-3분 남겨 놓고 헐레벌떡 들어왔다. 당연히 진료 접수는 안되고 점심 이후에 봐야 한다고 말했더니 자기는 서류를 끊으러 왔다고 했다. 서류도 신청만 되고 점심시간 이후에 된다고 했다. 안된단다. 자기도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나와서 지금 해야 한다고 우겼다. 나도 점심시간이라서 안된다고 우겼다. 신청하고 가시고 지금 못 찾아가면 퇴근 이후 오시거나 다른 분이 오셔서 찾아가시라고 말했다. 안된다고 지금 해 달라고 소리를 질렀다. 나도 안된다고 말하고 그녀에 페이스에 말리면 안 될 것 같아 식당으로 얼른 올라왔다. 내가 식당으로 올라온 사이 그녀는 분에 못 이겨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접수실을 초토화시켰다. 원장님이 식사를 하기 위해 나오다가 그 광경을 보고 식당으로 올라오셨다. 밥을 퍼서 한 숟갈 먹으려는 찰나 원장님이 오셨다. 아래 상황에 대해 나에게 물었다. 나도 화가 나 있던 상태라 '그냥 모르는 체 해주시면 안 되냐고' 말씀드렸다. 원장님은 크게 화를 냈다. 어떻게 모른 체할 수 있느냐고 아래에 다른 환자분도 계시는데 어떻게 그냥 넘어갈 수 있느냐고 하셨다. 가서 빨리 해결하고 올라오라고 하셨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으나 꾹 참았다. 원장님 입장도 이해가 됐기에 알았다고 내려가서 해결하겠다고 했다. 퍼놓은 밥과 국을 개수대에 버려버리고 내려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면서 눈물이 났다. 억울하고 서러웠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접수실로 가니 그녀는 아직도 씩씩 거리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순간 화가 더 났다. 내가 당연히 찾아야 되는 권리인 점심시간을 망쳐놓은 그녀에게 들으라는 듯이 소리치며 울먹였다.
"자기들은 점심시간 1시간씩 다 찾아먹으면서, 30분 교대로 쉬는 점심시간도 우리는 못 찾아 먹는 거야?"
화가 나고 흥분된 상태에서 울먹이며 내가 어떤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여러 원망의 말들을 그녀 들으란 듯이 쏟아내며 어찌어찌 서류를 해서 그녀를 보냈다. 그녀가 어떤 표정으로 갔는지 기억은 안 난다. 미안한 표정으로 갔는지 목적을 달성하고 당당한 표정으로 갔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그날 이후 그녀는 병원에 오지 않았다.
그랬던 그녀가 3년 만에 나타났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앉아 있는 쪽으로 신경이 쏠렸다. 어쩌면 문제가 되지 않을 상황이었는지도 모른다. 내 시간을 조금만 할애해서 서류를 해줬더라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점심시간에 온 순간 우리에게 했던 갑질이 생각났고 기회는 이때다 싶어 나도 갑질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너도 한번 당해봐라. 이 세상에 니 맘대로 안 되는 것도 있다. 이런 나의 얄팍한 갑질이 원장님이라는 더 큰 갑질을 만나 깨갱하며 5분 만에 을의 자리로 물러나야 했지만.
눈물까지 보였던 그날의 기억을 떠올릴 때면 '선택'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그녀가 점심시간임을 인정하고 다음에 찾기를 선택했더라면.... 내가 조금 양보해서 서류를 준비해 줬더라면.... 원장님이 한 번쯤 눈 감고 모른 체해줬더라면... 수많은 선택의 갈림길에서 좀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는 여러 경험을 쌓아가며 익어가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나도 그녀도 조금씩은 익어갔을 것이다.
한 시간을 넘게 조용히 기다리던 그녀가 치료를 받고 갔다. 앞으로 4주간 주사를 맞기 위해 내원해야 한다. 오늘은 서로 놀래 아는 체를 못했지만, 다음 주 그녀가 오면 아주 반갑게 인사하며 맞아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