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한 곳에서 일하다 보니 자주 오시는 환자분들의 가정사를 알게 되는 경우가 있다. 알고 싶어 아는 경우도 있지만 알고 싶지 않은데 알아지는 경우도 있다.
진료를 기다리는 동안 대기실에서 아는 사람을 만났다거나, 혹은 처음 만난 사이라도 대한민국 아줌마들의 거침없는 입담은 넘사벽이다.
"어디 아파서 왔어요?"
옆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기 시작하면 접수실이 시끌시끌 해진다. 미용실이 동네 수다 장소가 되듯, 동네 병원도 만남의 광장이 된다. 남편은 어떻다. 자식은 취업을 했다, 안 했다. 결혼을 했다, 안 했다. 손주를 봤다 등등 궁금하지 않았지만 듣다 보면 나도 모르게 빠져드는 그들의 사생활이 있다.
각자 진료를 받으러 다니다 같이 오면 '아! 이 두 분이 부부 사이구나' 하는 걸 알게 되고, ' 아! 이 두 분이 부자 사이구나' '모자 사이구나'도 알게 된다. 고부 사이도 알게 되고 사돈 사이도 알게 된다. 초등학생이던 녀석이 군복을 입고 진료를 보러 오기도 하고 고등학생이던 녀석이 결혼을 해서 아이 손을 잡고 오기도 한다. 좁은 지역에 살다 보니 나도 그들의 역사를 알고 그들도 우리 병원과 나의 역사를 알기도 한다.
어깨와 허리 통증으로 내원하는 50대 초반의 남자분이 있다. 일주일에 2번 내지 3번씩 와서 물리치료를 받는다. 두어 번 부부가 와서 진료를 받고 간 적이 있어 부인의 얼굴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는데 어느 날 다른 여자분과 함께 진료를 받으러 왔다. 성씨가 같고 약간 비슷하게 생겨서 친동생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진료실에서 나눈 대화로 유추해 보니 친동생이 아니었다. '자기'라든가 '자면서 아프다고 했잖아'라든가. 툭툭 튀어나오는 말에서 둘이 남매 사이가 아니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생긴 것도 기생 오래비같이 생겼는데 역시 바람을 피우고 있구나. 간도 크네. 같은 지역에서 바람을 피우다니... 우리끼리는 나쁜 놈이라고 욕을 하며 부인의 심정이 되어 그 남자분만 오면 괜스레 툴툴거렸다. 그 여자분이 오면 눈을 흘기며 몰래 째려봤다. 한두 번은 같이 올 수 있는데 여러 번 치료를 받으러 오니 이 사람들 참 뻔뻔하다 생각했다.
사건이 있던 그날도 둘이 함께 물리치료를 받으러 왔다. 진료를 보고 2층 물리 치료실로 올라간 사이 진짜 부인이 진료를 받으러 왔다. 이런 우연이 있다니... 어머! 어머!
그때부터 우리들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 상황을 어찌해야 될지 몰라 서로 눈을 마주치며 싸인을 보냈다. 가슴이 두 근 반 세 근 반 뛰기 시작하고, 너는 얼른 2층으로 가라. 가서 둘이 어디에 있는지 보고 와라. 너는 얼른 <불륜녀가 2층에 당신 남편과 함께 있다>라고 쪽지를 써서 몰래 본 부인의 가방에 넣고 와라. 기회는 이때다. 알려야 한다. 직접 가서 부인에게 얘기를 할까? 등등 우리끼리 드라마에서 나오는 장면을 상상하며 난리가 났다. 그때 2층에서 그 남자분이 내려왔다. 1층에 있는 부인을 보는 순간 흠칫하는 것 같더니 자연스럽게 다가가 왜 왔느냐고 물어봤다. 어디가 아파서 왔다. 당신은 왜 왔느냐. 일상적인 대화를 하다 남자분이 2층에 갔다 온다고 하고 올라갔다. 우리도 얼른 화장실 가는 척하며 염탐꾼을 올려 보냈다. "야 아래층에 우리 와이프 와 있어"남자분의 한마디에 물리치료를 받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불륜녀는 계단을 뛰어 내려가 주차장 쪽으로 달아났다.
아쉽게도, 정말 아쉽게도 부인은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조금 있다 2층에서 내려온 남자분은 부인 쪽으로 가더니 자기는 일이 있어 먼저 간다고 치료 잘 받고 가라고 하고 주차장으로 나갔다.
뭔가 큰일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 일 없이 막장 드라마가 끝나 버렸다. 허망했다. 반전도 없이 드라마는 끝났고 정의의 사도가 되고자 했던 우리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 남자 환자분은 지금도 가끔씩 진료를 받으러 온다. 그 불륜녀도 아주 가끔씩 온다. 그 부인도 아주아주 가끔씩 온다. 우리에겐 알면서도 알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알면서도 말하지 못하는 것들도 있다. 그 남자의 사생활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