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쪽자리 자기애, 나를 지킨다는 착각
나를 알아간다는 것, 나답게 산다는 것은 뭘까?
나를 사랑할 줄 알아야 남도 사랑할 줄 안다는 말을 대학 졸업쯤 책에서 읽었다.
그 문장이 맘에 들어 면접 때도 써먹은 적이 있다.
그렇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그땐 몰랐던 것 같다. 알 것도 같지만 무슨 말인지 정확히 알 수 있는 나이는 아니었다.
나를 사랑한다는 것, 한때는 그 말이
'나를 지킨다', '나는 예쁘다', '나는 잘하고 있다'
같은 무조건적인 "자기애"
그것이 나를 사랑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자존심을 지키는 일, 그렇게 무조건적인
자기 확신만이
남들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반쪽짜리 자기애"
지금 와서 돌아보면 얼마나 어리고 철이 없었는지
손발이 오글거리고 웃음이 새어 나온다.
그건 자존심을 지키는 일도 자존감이 높아지는 일도 아니었다.
무조건적인 자기 확신이라는 이름의
자기 방어에 불과했을 뿐이다.
어른이라고 생각했지만 성숙함과 지혜로움으로
가득 차지 못한
열정과 패기만 넘치는 어린 어른.
그래서였던 것 같다.
나의 예민함, 까칠함, FM 같은 성격.
대부분 나의 화, 그리고 나를 괴롭히는 것은 나의 성격과 성향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화의 시작은 늘 타인이었다.
"저 사람 왜 저래?"
"어쩜 저렇게 말할 수 있지?"
"내가 맞고, 너는 틀렸다."
상식이라는 말로 합리화하며
스스로를 보호하는 방식이었다.
간호사라는 직업이 가진 특수성이 나를
더 고착시켰다.
나의 실수가 연쇄반응처럼
모든 일에 영향을 주고 실수가 곧 누군가의 건강에 악영향을 끼치며 항상 나 자신의 상황보다 아픈 누군가를 보필하고 돌봐야 하는 환경 속에서 나 자신을
보호하고자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이타적인 삶을 살며 배타적으로 변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4화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타인을 이해하고자 시작했던 상담심리학에 대한 공부가 없었다면
나는 아직도 무모한 자기 방어 속에서 남들만 탓하며 살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남들을 이해해보려 했던 노력이
나에 대한 이해와 객관화로 바뀌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질문은
"나는 뭐지? 왜 화가 나는 걸까?"
사춘기 때나 할 법한 질문이라고 생각했지만
더 많은 사람들과 부딪히고, 달라진 환경과 사회적 위치 속에 더 많은 역할을 부여받은 성인이 된
나 자신에게 꼭 필요한 질문이었다.
사춘기를 지나오고 성인이 되어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고 해서 내가 '나'로서 잘 살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어른이 되면 그걸로 끝인 줄 알았는데 말이다.
"나는 뭘까? 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지?"라고
물었을 때 대답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나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을 때 참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빈 종이를 앞에 두고 적어보려는데 머릿속이 보글보글 거품이 가득 찬 느낌이었다.
생각을 하며 살았다 보다 살아지는 대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해야 할까?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졌을 때
조심스럽게 추측해 보건대 나오는 대답은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잘하는지부터 말하지 않을까 싶다.
나 역시 그랬다.
종이에 써 내려간 글은, 아니 단어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부터 채우고 있었다.
예쁜 것들, 원피스, 사진, 영화, 친구들... 등등 대부분 명사로 설명되는 것들 뿐이었다.
그렇게 몇 날며칠을 고민하다 보니 내가 싫어하는 것들도 떠올리게 되었다.
'실수하기 싫다', '완벽하고 싶다', '잘하고 싶다', '욕심이 많은 것 같다'
그렇게 써내려 가다 "왜"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나는 왜 실수하기 싫고 완벽하고 싶으며 욕심이 많을까?'
그때부터 내 속에 꽁꽁 가두었던 마주하고 싶지 않던 나의 취약함, 단점, 열등감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부끄럽지도 창피하지도 않았다. 이제까지 외면하고 마주 할 용기가 나지 않아서 내가 제대로 감싸주지 못한 모습이기에 나 자신에게 미안했다.
내가 나 자신도 포용하지 못하는데 누구를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을까?
그저 누구나 겉으로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의 취약함을 감추며 잘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 아닐까?라는 의문에 생각이 멈추니 남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저 각자의 위치에서 애쓰며 살고 있을 뿐이라는 것.
감히 누군가를 이해해서도 판단해서도 안된다는 것.
그저 이해보다 그 자체로 인정해 줘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여전히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고 포용하지 못한다.
여전히 누군가의 무례함을 견딜 수 없고 화도 난다. 하지만 그 화는 타인을 향한다기보다 나의 불편한 감정을 발산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예전처럼 누구를 탓하며 나를 소모하기보다는 그저
'저 사람은 어떤 인생을 살았기에, 어떤 마음의 짐과 취약함을 감추려 저렇게 됐을까..' 의문이 들뿐이다.
내가 내 생각과 방식대로 살아가듯 저 사람들도 그럴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은 해소되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더 이상 화낼 이유가 없는 거다.
기분은 잠시 나쁘지만
'그래.. 너는 그렇게 살아라.. 너도 참 힘들겠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이해는 안 돼도 인정은 하게 된다.
너와 나의 다름의 인정.
나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시시때때로 나를 이해하고, 인정하고, 다시 묻는다.
그렇게 나를 알아가는 법을 여전히 배워가고 있다.
10대, 20대, 30대를 지나 40대를 살아가며
아직 오지 않은 그다음의 나는 또 어떤 모습으로
어떤 생각으로 살아갈지 알 수 없지만 지금의 나에게 집중하며 답을 찾아가려 한다.
그러다 보면 더 훗날의 나도 답을 찾아가며
조금 더 '나'답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다음 글에서는 이해와 인정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까 한다.
긴 글을 함께 해 주신 모든 분들이 조금 더 나를 마주하길 바라며 오늘 하루도 평안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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