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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쥴스 Sep 20. 2023

달라진 게 없이 다른 삶을 사는 방법

 대부분의 여성은 임신과 육아로 커리어에 일시 멈춤 버튼을 눌러야 한다. 상황에 따라서는 영원히 정지 버튼을 누르게  수도 있다. 일하는 여성에게 아기는 '덕분에' 보다 '때문에' 영역에 가깝다. 슬프고 냉정한 말이지만, 오로지 커리어 개발 측면만을 두고 봤을  반박할  없는 뼈아픈 사실이다.     

 

2021년 6월, 결혼 5년 차인 우리 부부에게 새 생명이 찾아왔다. 난생 느껴보지 못한 경이로움과 기쁨 두려움의 감정을 한꺼번에 경험했다. 동시에 출산 이후 내 일의 지속 문제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를 낳게 되면 이전만큼 일에 시간을 쏟을 수 없을 텐데.', '그러면 나는 분명 뒤처질 텐데.' '복귀할 수 있을까?' 한 생명을 새로운 가족으로 맞는 축복 앞에서도 나는 일 걱정만 하고 있었다.

    

나의 불안이 유난히 더 컸던 이유는 내가 가진 직업과 직장 모두가 안정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내 직업은 마케터이다. 이 직업은 자격증이나 과거의 경력만으로 업무 능력을 인정받기 어렵다. 일상에서의 모든 경험, 인문학적 소양, 정보력의 격차가 우리의 몸값을 판가름한다. 요즘 사람들이 좋아하는 게 뭔지 누구보다 잘 알아야 하기에 트렌드를 놓쳐서도 안 된다. 직장은 설립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스타트업. 사업 전반을 넓게 보고 사업기획부터 회사운영 전반을 배울 수 있어서 일은 즐거웠지만, 복직을 보장받긴 어려운 환경이었다.

     

폭풍같은 방황의 시기를 2가지 생각 도구에 의지해 헤치고 지나왔다. 이 도구 덕분에 아기가 없던 시절보다 오히려 더 탄탄한 삶을 다질 수 있었다.  



1. ZOOM OUT - 멀리, 길게, 크게 생각하기

 첫 번째 생각도구는 멀리, 길게, 크게 내 삶을 조망하듯 바라보는 방법이다. 불안했던 나는 시야가 좁아졌다. 출산 전까지의 시간을 1분 1초도 허투루 쓸 수 없었다. 새 생명과 관계 맺기보다 빨리 현업으로 복귀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에 바빴다. 직장과 별개로 진행하는 개인 프로젝트의 종류를 늘이고, 현직 마케터들과의 네트워크를 만드는 일에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임신 초기의 내 몸은 단호하게 안정을 취하라고 외쳤다. 끝없이 쏟아지는 졸음, 당혹스러운 입덧과 감정 기복은 모든 욕심을 내려놓게 했다. '무리를 해서라도 하고 싶은 일을 모두 해내겠다.'는 의지는 맥없이 꺾였다. 그제야 미련한 나는 찬찬히 몸과 마음을 돌보기 시작했다.     


의도치 않게 내 몸과 마음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만들어졌고, 덕분에 삶 전체를 멀리서 내려다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됐다. 그간 가까운 거리에서 근접한 시선으로만 들여다봤던 것들을 한 발자국 떨어져서 바라보니 어찌나 새로운지. 한 편의 영화를 감상하듯, 자아와 멀리 떨어져서 나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바라보며 정리하기 시작했다.    


/ 과거

우선 불안정한 내 마음을 다독이기 위해, 내가 과거에 두렵고 걱정하던 일을 겪으며 무엇을 얻었는지 곱씹어 보았다. 대표적으로 임신만큼 미지의 영역이었던 '결혼'을 꼽을 수 있다. 돌아보니 나는 결혼을 앞두고도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지 못하게 될까 봐 지금처럼 마음 졸였다. 하지만, 걱정과 반대로 결혼은 나를 성장시키고 성숙시켰다. 남편의 안정적인 지지를 받으며 대기업을 그만두고, 내게 잘 맞는 스타트업에서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 현재

가끔 내가 책을 찾은 게 아니라, 책이 나에게 왔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이 시기 나에게 선물처럼 온 책은  칼 세이건과 앤 드루얀의 딸, 사샤 세이건이 부모님에게서 배운 ‘삶의 아름다움’이 오롯이 담긴  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을 위하여』이다. 샤샤 세이건은 임신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지, 매 순간 놓치지 않고 만끽해야 하는 여성의 인생에 있어서 찬란한 시절인지 깨닫게 해 주었다.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칼세이건의 영향력을 짙게 느낄 수 있었는데, 가늠할 수 없이 광활한 우주와 기적처럼 주어진 개개인의 삶을 찬미하며, 살아있다는 것 자체의 경이를 있는 힘껏 보여주었다. 나는 배 속에 아기를 온 힘 다해,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절실하게 사랑하기 시작했다.


/ 미래

회사 명함이 없으면 나를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지, 당장 1~2년 후가 아니라 장기적으로 어떤 사명을 가지고 일하고 싶은지. 차분히 스스로 묻고 답하며 진짜 내가 원하는 삶을 그려보았다. 100세 시대, 직장을 떼어놓고서도 내가 자립할 수 있는지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진단하며 나의 부족함을 직시할 수 있었다.

      

과거의 내가 점처럼 작은 일에도 얼마나 일희일비했는지. 일에 집착하느라 섬세하게 느끼지 못했던 소소한 행복이 얼마나 많았는지. 별것 아닌 상처에 하늘이 무너져 내릴 것처럼 좌절했는지. 미리 사서 하는 걱정이 얼마나 쓸모없는 짓인지. 내내 줌인만 하다 줌아웃해 본 프레임에는 완전히 다른 것들이 보였다. 천천히 숨을 고르며 내 삶을 멀리서 내려다보자 마음속에 안정과 용기가 차올랐다.         


 

2. 리프레이밍(Reframing) - 질문 바꾸기

 두 번째 생각 도구는 내가 처한 상황을 다른 프레임으로 바라보는 방법이다. 회사에 임신을 알린 이후, 장기 프로젝트의 PM이 될 수 없었다. 중간에 담당자가 바뀌면 일이 번잡해지니까. 외부 미팅이 잦은 일 역시 맡을 수 없었다. 운전할 줄도 모르는뿐더러, 이동 중에 혹여나 문제가 생길 위험이 있으니까.   

   

'왜 임신한 여자는 모든 기회에서 밀려나야 하지?'     

우리의 뇌는 질문에 답을 하게 프로그래밍되어 있다. '왜 임신한 여자는 모든 기회에서 밀려나야 하지?'라는 질문을 하면 우리의 뇌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내가 질문을 바꾼다면?  

'이 시기를 기회로 만들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지금 처한 상황에서 내가 배울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질문을 바꾸자, 불안함을 잠재우기 위해 아무 일이나 닥치는 대로 하는 참사를 막을 수 있었다. 대신, 임신과 육아휴직의 시간을 회사 밖에서 일할 수 있는 자립의 힘을 키우는 기회로 바라보기로 했다. 프레임 하나를 바꿨을 뿐인데 내가 회사 밖에서 이룬 성과들은 기대보다 훨씬 더 컸다.


-임신 후

북 큐레이션 <뉴스레터>를 기획하고 발행해 3개월 만에 800명의 구독자를 모았다.

대형 출판사들로부터 협찬을 받고 광고를 제공하며 협업했다.

-육아휴직 중

클래스101에서 크리에이터 제안을 받아 <독서법 클래스>를 론칭했다.

매월 600여명이 나의 클래스를 수강하고 있고, 잠 자면서도 들어오는 수익이 생겼다.

-육아휴직이 끝난 후

엄마로서의 경험을 활용해 일과 삶의 의미를 고민하는 여성들을 위한 <커뮤니티>를 운영 하고,

동시에 <교육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프레임이란 심리학 용어로 사고방식이나 느끼는 방식의 '틀'을 의미한다. 뭐가 안 되는 날에는 우리가 상황이 나에게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고의 틀로 세상을 바라본다. 사실 모든 일이 내 마음대로 안 되는 시기는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 모든 상황은 프레임(frame)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내 마음 같이 않은 상황을 지나가고 있는 모든 이에게 상황을 리프레이밍(reframing)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임신과 출산, 육아를 거치며 내가 얻은 것 중 가장 큰 것은 '사랑의 눈'이다. 자유의지와 의식 없이 본능만 남은 생명체를 살게 하는 것은 사랑이다. 아기가 먹고, 자고, 싸는 24시간 생존의 모든 순간에 엄마의 손길이 필요하다. 아기를 살게 하는 것은 사랑이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사랑으로 빚어진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한때는 한없이 여린 존재였던 그들의 아픔과 슬픔이 측은하고 애처롭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정상적인) 직업은 사람을 돕고, 이롭게 하는 일 아니던가. 내 직업으로 도울 수 있는 대상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아기 때문에 전처럼 빨리 달리 수는 없겠지만, 아기 덕분에 사랑으로 무장한 진정성 있는 직업인으로 거듭날 수 있다.


엄마가 된다는 건 일하는 여성의 인생에 위기가 아니다. 오히려 기회이며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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