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 깎는 시간

손으로 쓰는 시간

by 정이나

연필을 쓰려고 보니 하나같이 다 뭉툭하다. 내친김에 집안의 모든 연필을 모아서 한꺼번에 깎기로 했다. 몽당연필을 빼고도 20자루가 넘는다. 옛날처럼 칼로 깎는 건 아니고, 오랜 친구 '샤파'로 깎는다. 뭉툭했던 연필이 날렵해지면 그 자체로 기분이 좋다. 샤파의 연필깎은 찌꺼기를 버리고 물로 헹궈서 휴지로 물기를 말끔히 닦아냈다.


연필만 꽂는 연필꽂이에 가지런히 담으니 문득 이 많은 연필을 평생 다 쓸 수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깎지 않고 보관하고 있는 연필도 많다. 한때는 해외여행을 갈 때마다 현지의 연필을 기념품으로 사오기도 했지만 이제는 연필이 너무 많아서 따로 사오진 않는다. 미술을 하는 동생이 한번씩 보내주는 미술 연필도 무척 많다.


문제는 더 이상 필기구를 잘 쓰지 않는다는 것이리라. 연필뿐 아니라 볼펜이나 색연필, 형광펜 등도 잘 쓰지 않게 되었다. 학생도 아니고 컴퓨터나 갤탭을 주로 쓰는 이 아줌마가 종이에 뭘 쓸 일이 도대체가 없다. 가끔 스케치북에 동생에게 배운 대로 그림을 그리기도 하지만 그 빈도수에 비해 필기구나 미술용품이 턱없이 많다.


그럼에도 내 연필이 자주 뭉툭해지는 이유는 피아노 덕분이다. 피아노 곡을 배우며 악보에 뭔가를 표시하기도 하고, 빈 악보에 음표를 그릴 때도 있다. 그럴 때는 아무래도 볼펜보다는 쓰고나서 지울 수 있는 연필을 사용하곤 한다. 따라서 지우개도 잘 쓰는 편이다. 피아노 보면대나 건반 위에 지우개밥이 떨어지는 게 단점이지만.


연필로 쓰고, 지우개로 지우는 행위는 왠지 모르게 향수에 젖게 한다. 국민학생 때나 썼던 연필과 지우개이므로 그때의 순진한 마음으로 돌아간 듯 느껴지기 때문이다. 당시에도 고학년쯤 되면 '샤프'를 썼다. 그러고 보니 내 필기구 중에는 샤프도 있다. 어쩌다 손에 들어왔는데, 연필도 다 못 쓰는 마당에 샤프까지 손이 가질 않는다.


볼펜도 쓸 일이 없는데, 요즈음엔 널찍한 줄노트에 영어문장을 꽤 쓴다. 새로이 배운 표현 같은 것을 따로 정리하는 거다. 하루에 5분 정도 일기처럼 쓰나 보다.


종이에 필기구로 뭔가를 쓰는 행위를 오래 하지 않으면, 뭔가 쓸 때마다 금방 팔이 아프고 피곤해진다. 재작년쯤에 한번은 일기장에 일기를 쓰려고 펜을 들었는데, 몇 줄 쓰는데도 무척 피곤했다. 손으로 쓰는 것보다 자판을 치는 게 훨씬 쉽고 빠르며 보기도 좋고 보관성도 좋으니 앞으로 점점 필기구 수요는 줄어들 것이다.


그래도, 종이나 노트에 뭔가를 쓰는 건 참 좋다. 그 분위기가 좋고 그 노트에 정도 든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 갤탭 펜은 또 잘 안 쓴다. 나는 역시 멀티가 잘 안 된다. 사실 뭔가 하나만 집중하기도 힘든 마당에 두루두루 관심을 기울이기는 참 힘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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