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80. 만날 수 없는 그러나 잊을 수 없는, 당신 마음속에 아련하게 그러나 선명히 새겨져 있는 그 사람에 대하여.
만날 수 없지만 잊을 수 없는 그 사람은 바로 할머니입니다. 5번째 질문에 대답했던 이야기 중 일부를 잠시 빌려올게요.
'어린 시절'하면 가장 많이 생각나는 것은 단연 할머니예요.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셔서 할머니랑 보내는 시간이 많았어요. 나를 '똥강생이'라고 부르며 엄청 좋아하셨어요. 할머니는 늘 머리에 비녀를 하고 있었어요. 개구쟁이였던 나는 할머니가 옆으로 돌아누워 주무실 때 비녀를 쏙 빼곤 했어요. 하얗게 새어버린 긴 머리를 돌돌 감아 비녀를 끼우는 모습이 신기했거든요.
영화 '집으로'에서 할머니가 바가지를 대고 주인공의 머리를 자르는 장면이 낯설지 않았어요. 우리 할머니도 바가지를 대고 나의 머리를 잘라주셨거든요. 어릴 땐 그래서 남자아이 같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또래 여자아이들은 예쁘게 머리 길러서 땋고 다녔는데 나는 늘 바가지 머리를 찰랑거리며 다녔죠.
할머니가 해주던 간식들이 먹고 싶어요. 세상에서 제일 맛있게 냄비에 감자를 삶아주셨어요. 냄비에 눌어붙어 딱딱해진 부분을 좋아해서 늘 그 부분 먼저 떼어먹곤 했어요.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감자에 설탕을 비벼먹으면 그것만큼 맛있는 간식이 없었어요. 여름이면 냉면그릇에 얼음을 동동 띄워 미숫가루를 타 주셨어요. 일자로 펴졌을 정도로 오래된 숟가락으로 미숫가루를 저어 주셨는데, 아직까지도 그만큼 맛있는 미숫가루 맛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할머니는 내가 배가 아프다고 하면 '할매손이 약손이다'라고 주문(?)을 외우면서 배를 문질러 주셨어요. 그럼 신기하게도 배가 안 아프고, 스르륵 잠이 들곤 했어요. 할머니 손은 진짜 약손이었나 봐요. 누구에게도 말 못 할 만큼 힘들었던 시기에 나는 할머니가 너무 그리웠어요. '할머니 약손으로 문질러주면 나 괜찮아질까?'
궁둥이를 팡팡하며 '똥강생이'라고 부르던 할머니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선해요. 지금은 곁에 없는 사랑하는 우리 할머니, 너무 보고 싶다.
사실 얼마 전 할머니를 생각하며 혼자 써둔 시 한 편이 있어요. 시를 다 쓰고 연필을 내려놓으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마구 쏟아졌어요. 할머니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이 늘 마음에 걸렸는데 그렇게 또 한 번 펑펑 울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어요.
제 마음이 할머니에게 닿기를 바라며 제가 쓴 시를 소개하며 마칠게요.
할머니의 머리카락
할머니는 백발의
긴 생머리를 고수하셨다.
머리를 감을 때면
늘 식초로 헹구셨다.
그리고는 대나무 참빗으로
머리를 정성스레 빗으셨다.
빗질이 끝나면
긴 머리를 국수처럼
돌돌 말아 올린 뒤
비녀를 꽂으셨다.
그렇게 평생 매일같이
고이고이 정리하던 긴 머리를
싹둑 자르셨다.
췌장암에 걸리신 할머니는
많이 야위고 약해지셨다.
그러나 나는 그 모습보다
할머니의 짧아진 머리를 보는 것이
왠지 모르게 더 가슴이 아팠다.
할머니는 오래전에 돌아가셨지만
아직도 방문을 열면
참빗으로 머리를 곱게 빗으며
나를 향해 웃어주실 것만 같다.
- 할머니를 생각하며 나온 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