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안팎의 풍경을 놓치지 않기 위해 두 눈은 쉴 새가 없었다. 머릿속도 연신 대답은 알 수 없는 질문을 해대느라 분주했다. '오, 저건 뭘까? 엇! 저긴 뭘 하는 곳이지?' 호기심에 가득 찬 내가 눈과 머리를 열심히 굴리는 사이 버스는 바퀴를 열심히 굴려 어둠을 헤치고 시내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니 다시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한국에서 출발해서 그곳에 떨어지기까지 모든 것이 눈 깜짝할 새에 벌어진 것 같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인도 델리의 빠하르간지. 그곳에 배낭 하나 메고 서있는 나. 숙소는 하나도 예약하지 않았다. 그냥 발길 닿는 대로, 마음 따라 다닐 작정이었다. 혼자 여행을 여러 번 했지만 여행의 처음부터 끝까지 숙소도 예약하지 않고 간 것은 처음이었다. 인도에서는 왠지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그날 밤의 마지막 미션은 숙소를 구하는 것이었다.
빠하르간지는 인도 델리를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꼭 한번은 들르게 되는 곳이다. 태국의 카오산로드와 같은 곳. 가장 큰 골목의 이름은 '메인 바자르 로드'. 그 곳에는 수많은 상점과 게스트하우스, 식당이 즐비하다. 낮에 간다면 정신 없이 모든 것이 사방에서 움직이는 광경 속에 혼자만 멈춰있는 느낌을 받을 수 있지만 늦은 밤 도착했기에 거리는 조용했다. 어디나 그렇듯 뒷골목으로 갈수록 숙소는 저렴하다. 허나 시간도 늦었고 새벽부터 집에서 나온 터라 얼른 숙소에 들어가 긴장된 몸과 여독을 풀고 싶었다.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다가 가장 눈에 띄는 간판을 가진 한 게스트하우스로 들어갔다. 이래서 간판은 눈에 띄게 만들어야 하나 보다.
프런트에는 아무도 없었다. 내가 인기척을 내자 뒤쪽 공간에서 한 직원이 나타났다. 하룻밤에 얼마냐고 물어보니 600루피라고 했다. 시간도 늦었고 처음 인도에 갔을 때는 숙소 값을 깎아야 한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거기다 그날은 숙소 내부도 확인하지 않고 알겠다고 했다. 그러나 숙소를 구할 때는 꼭 내부를 보고 정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는 내게 여권을 달라고 하더니 복사한 뒤에 돌려줬다. 결혼식장 방명록보다 더 커다란 낡은 공책을 꺼냈다. 공책을 펼치는데 잘 익은 수박이 갈라지는 듯한 쩍- 하는 소리가 났다. 평소 크고 작은 소리에 깜짝깜짝 잘 놀라곤 하는 나는 순간 흠칫했지만 그는 아무일 없다는 듯 조용히 왼손으로 입실 정보를 적어 내려갔다.
그가 열쇠를 가지러 간 사이 로비를 둘러보았다. 카운터 옆에 냉장고가 있었다. 아침까지 마실 물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에 생수를 한 병 샀다. 인도에서는 꼭 생수를 사서 마셔야 한다. 심지어 양치를 할 때도 생수로 입을 헹구라는 조언들도 많았다. 이를 닦을 때 수돗물을 조금 먹어서 배앓이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이다. 나는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다. 인도여행 전 장티푸스, 파상풍, 말라리아 등 예방접종도 꼭 맞고 가야 한다고 했지만 그 역시도 하나도 맞지 않았다. 급하게 출발하기도 했지만 평소 이런 것에는 조금 둔감한 편이다.
장이 튼튼한 것인지 다행히 인도에서 아팠던 적이 없다. 후에 한국에 돌아와서 물갈이(Traveler's diarrhea. 위와 장내에 발생하는 감염병의 하나이다. 여행자에게 가장 흔한 질병의 하나)를 했는데, 갑자기 너무 깨끗한 물이 들어와서 몸이 놀란 게 아닐까 생각했다. 아니면 몸이 주인을 생각해서 그래도 가족이 있는 집에서 아프게 해야겠다고 참고 있었던 걸까. 아무튼 양치하는 물은 그렇다 쳐도 마실 물만큼은 늘 사서 마셔야 했다. 여행 가이드북에서 보고 외워 갔던 힌디어 문장 중 이 말을 여행 중 가장 많이 써먹었다. "엑 빠니 끼뜨나 루피야?"(생수 한 병 얼마에요?) 생수는 어디를 가나 거의 15루피였다.
드디어 열쇠를 받아 방으로 올라갔다. 방 상태도 확인하지 않고 계산을 했지만 다행히 더블침대가 있는 상태가 꽤나 양호한 방이었다. 나의 기대치가 낮았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으나 나름 TV도 있고 창문도 있었다. 물론 창문을 열거나 창문 밖을 내다 본 기억은 없지만. 따뜻한 물이 잘 나오는 것도 좋았다. 따뜻한 물이 잘 나오지 않는 숙소도 많기 때문에 숙소를 고르기 전에 잘 확인을 해야 한다. 이날은 아무것도 확인하지 않았지만 다행히 잘 나왔다. 푹푹 찌는 폭염에도 절대 찬물로는 샤워하지 못하기 때문에 찬물만 나온다면 그 핑계로 그냥 바로 자버릴까도 생각했다.
문을 걸어 잠그고 가방을 내려놓은 뒤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몸에 힘을 빼고 뒤로 푹- 하고 누웠는데 매트리스가 놀랍도록 딱딱했지만 그래도 못 잘 정도는 아니었다. 여러 감정이 섞인 깊은 숨을 뱉았다. "하......." 드디어 이날의 모든 미션을 완수했다. 침대에 누워있자니 긴장이 풀려 그 자세 그대로 몸이 녹아 내리는 것 같았다. 노곤해져 잠시 정신줄을 놓고 있다가 잊고 있던 것이 퍼뜩 생각이 났다. 휴대폰을 꺼내 와이파이를 연결한 뒤 가족들에게 생존신고를 했다. 잘 도착했다고. 인도의 시간은 한국보다 3시간 느리다. 이미 다들 잘 시간이지만 아침에 확인하고 답장이 오겠지. 내일은 나가서 유심칩을 사야겠다고 생각하며 침대에서 일어나 가방을 풀었다.
건조한 겨울 날씨였지만 이상하게 침대 이불이 무척 꿉꿉했다. 침낭을 챙겨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도의 겨울은 우리나라만큼 춥지는 않지만 더운 여름이 더 힘들기 때문에 건물 자체에 방한과 난방이 잘 되지 않았다. 내가 저렴한 게스트하우스만 다녀서 그럴 수도 있다. 어떤 게스트하우스는 더운 여름에 공기를 통하게 하는 구멍인지 천장 벽에 알 수 없는 큰 구멍이 뻥 뚫린 곳도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방안에 박쥐가 들어와있었다는 한 여행자의 후기가 떠오르는 곳이었다. 아무튼 여행 전 찾아본 바로는 인도를 여행할 때는 보온을 위해서도 그렇지만 위생적인 측면에서도 침낭에서 자는 게 좋다고 했다. 아주 얇은 봄가을용 침낭이었지만 그 속에 들어가서 자니 그렇게 따뜻하고 안락할 수가 없었다. 신문지라도 덮고 자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침낭에 들어가 엎드려 일기장을 펼쳤다. 하룻동안 만났던 사람들, 일어났던 일들을 떠올렸다. 일본공항에서 대기하는 동안 얘기를 나눴던 여행사 가이드 아키코부터 델리공항에서 나를 태워가려던 택시기사까지……. 기내에서 무심코 봤던 외국 영화도 생각이 났다. 제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실연의 아픔을 가진 한 남자가 여행을 하며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 이야기였다. 실연의 아픔은 없었지만 혹시 나도 인도에서 인연을 만나게 될까 하고 잠시 상상해보았다. 그러나 이내 머리를 절레절레 좌우로 내저으며‘에이 무슨!’이라 생각하며 다이어리를 덮고 불을 껐다. 침낭 속에서 꼬물거리며 누워있는데 어째서인지 피곤한데 잠이 오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이나 지렁이처럼 꼬물거리다 새벽 3시쯤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