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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온 Feb 02. 2021

첫 번째 인연을 만나다

늦게 잠들었지만 역시 놀러 가서 그런지 아침에 눈이 가볍게 떠졌다. 배가 고팠다. 무엇을 먹을까 생각하다 일단 ‘인도 방랑기’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해외를 여행하다 보면 한국인의 아지트 같은 곳들이 하나둘씩 있는데 인도 방랑기는 그중 한 곳이었다. 주업은 식당이지만 여행자들의 짐을 맡아주거나, 공항에서 픽업을 해주는 등 다양한 일들을 하고 있었다. 유럽이나 다른 나라를 여행을 하면서는 한인 숙소나 한인 식당에 가본 적이 없지만 인도에서는 왠지 믿을 수 있는 곳에 짐을 맡겨야 할 것 같았다. 일찌감치 씻고 체크아웃을 한 뒤 배낭을 메고 숙소를 나섰다.


밖으로 나오니 이 길이 어젯밤에 왔던 그 길이 맞나 싶었다. 활기가 넘치다 못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크로스백 입구를 꼭 움켜쥐고 걷기 시작했다. 인도 방랑기는 빠하르간지 초입에 있다. 묵었던 숙소에서 멀지 않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좁은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나마스떼……?”

그러자 주방에서 인도인 직원이 나왔고 그의 입에서는 예상치 못한 말이 나왔다.

“안녕하세요?”


‘앗, 한국어다!’

서툰 발음이었지만 대화를 나누기엔 충분했다. 메뉴판을 건네주며 그는 또박또박 말했다.

“주문하시겠어요?”

“김치찌개 주세요”


인도에서 뚝배기에 담겨 나오는 김치찌개라니. 한국에서 온 지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아주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메뉴가 나오기를 기다리는데 누군가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나처럼 혼자 여행 온 여자였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식당에 손님은 둘 뿐이었다. 밥을 같이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우리는 그날 같이 다니기로 했다. 정확한 나이를 묻지는 않았지만 나보다 한두 살 어린 것 같았다. 밥을 맛있게 먹은 우리는 짐을 맡기고 내려와 쇼핑을 하기로 했다.


그녀는 선글라스가 필요하다고 했다. 겨울이었지만 낮이면 태양이 상당히 눈부셨기 때문이다. 거리 초입에 있는 가게에서 선글라스를 하나씩 껴보던 그녀는 나를 돌아봤다. 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거나 위아래로 끄덕이며 그녀의 선택을 도와주었다. 참고로 인도에서는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것이 우리나라의 ‘끄덕끄덕’과 같은 ‘Yes’를 의미한다. 정반대의 뜻을 가지고 있으니 의사소통을 할 때 오해가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녀와 나의 의견이 일치한 선글라스를 사기로 했다. 내가 산 물건이 아니라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만 원정도 했던 것 같다.


나는 집에 굴러 다니던 선글라스를 하나 챙겨 와서 여행 내내 요긴하게 썼다. 대신 다른 것에 눈이 갔다. 현지에 가면 그 나라 옷을 사 입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인도풍(?) 옷을 쇼핑했다. 사리를 사고 싶었지만 거동이 불편할 것 같았다. 여행할 때 옷은 무조건 편해야 하는 법. 게다가 사리는 가격도 비쌌다. 옷 가게를 한참 둘러보아도 썩 맘에 드는 옷이 없었다. 한 가게에서 그나마 가장 괜찮은 바지와 가장 괜찮은 티를 하나씩 골랐다. 편해 보이는 주황색 바지와 핑크색에 알록달록 염색이 된 반팔 티였다. 문제는 따로 보면 괜찮은데 서로 그렇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이런 조합으로 샀나 싶지만 노 프라블럼이다. 나중에야 깨달았지만 이런 옷을 입고 다니는 인도인은 눈을 씻고 보아도 찾기 힘들었다. 모두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데 그렇지 않아도 눈에 띄는 외국인이 ‘나 여기 여행 왔소’하고 써 붙이고 다닌 격이었다.  


숙소가 있던 빠하르간지는 구시가를 일컫는 올드델리의 상징이다. 신시가는 코넛 플레이스라는 곳인데 식민시절 영국인들에 의해 계획적으로 만들어져서 모양이 반듯반듯한 동네이다. 가운데 있는 동그란 센트럴 파크를 중심으로 현대적인 건물들과 상점, 외국 기업들이 원형을 따라 뻗어나가며 자리하고 있다. 빠하르간지에서는 이 킬로미터가 조금 안 되는 거리이다. 나 혼자였다면 걸어갔을 거리지만, 그녀가 오토릭샤를 타자고 해서 그러기로 했다. 인도에서 처음 타보는 오토릭샤였다. 속도가 빠르진 않지만 릭샤를 타고 가며 보는 풍경은 또 다른 맛이 있었다.  


코넛 플레이스에 도착하니 인도가 아닌 것 같았다. 비교적 깨끗하기도 하고 우리가 아는 웬만한 글로벌 브랜드들은 모두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명동 느낌이다. 우선 유심칩을 사기로 했다. 원래는 인도 방랑기에서도 유심칩을 팔았는데 그날 무슨 사정이 있어서 유심칩이 없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코넛 플레이스에서 사기로 했다. 통신사 매장 안에 들어섰는데 좁은 공간에 많은 사람들이 질서 없이 뒤엉켜있었다. 번호표 같은 시스템은 있을 리 만무하다. 먼저 직원을 붙잡고 이야기하는 것이 장땡인 것 같았다. 처음엔 쭈뼛쭈뼛 서 있었으나 이렇게 있다가는 영영 유심칩을 못 살 것 같아서 그나마 가장 친절해 보이는 직원에게 말을 걸었다. 유심칩이 없다고 했다. 잠시 기다려보라고 하더니 그는 이리저리 다니며 알 수 없는 힌디어로 전화를 해댔다. 조금 지나 다시 나에게 온 그는 이게 오늘 살 수 있는 마지막 유심칩이라며 나에게 건넸다. 그 말이 별로 미덥지는 않았지만 일단 구했으니 진위여부는 크게 상관이 없었다. 서류를 작성하고 이것저것 보여주고 제출하고, 개통을 위해 매니저가 여기저기 통화를 거듭한 끝에 드디어 유심칩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통신사 매장에서 꽤나 시간을 많이 보낸 탓에 나와서 조금 걷다 보니 금세 점심시간이 되었다. 우리는 코넛 플레이스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여행 책에서 봐 둔 유명한 정통 인도 음식점으로 갔다. 이름은 ‘사라바나 바반’이었다. 외국인들이 많이 오는 식당이어서 그런지 무척이나 깔끔했다. 그렇지만 메뉴판을 보는데 도저히 끌리는 음식이 없었다. 겨우 고르고 골라 ‘도사’라는 음식을 먹었다. 내 스타일은 아니었다. 이 식당에서 먹은 음식이 인도에서 먹은 음식 중에 가장 비쌌지만 가장 입맛에 맞지 않았다.

                                                                         
 밥을 먹었으니 디저트를 먹어줘야 한다. 역시 미리 찾아뒀던 유명하다는 베이커리에 들렀다. ‘웬저스’라는 곳인데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고 했다. 이 곳에도 사람들이 바글바글 했다. 디저트로 먹을 브라우니 하나와 간단히 저녁을 때울 샌드위치를 샀다. 그리고 센트럴 파크의 잔디밭에 앉아 브라우니를 먹었다. 내가 알던 브라우니 맛과는 조금 달랐지만 그래도 버릴 정도는 아니었다. 센트럴 파크는 이름에 걸맞게 시민들의 휴식 공간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근처 대학의 학생들은 물론이고 젊은 남녀 커플들이 데이트를 하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날씨도 딱 좋고 기분도 딱 좋았다. 우리도 그곳에 앉아 한참 동안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이날 저녁 나는 기차를 타고 다른 도시로 갈 예정이었다. 웬저스에서 산 샌드위치는 기차에서 먹기 위해 고이 가방에 넣어 두었다. 그녀는 델리에 며칠 더 머무른다고 했다. 사이클 릭샤를 타고 다시 빠하르간지로 돌아왔다. 조심히 여행하라는 인사를 나누며 우리는 릭샤가 세워준 곳에서 헤어졌다. 나는 인도 방랑기에 맡겨두었던 짐을 찾아 기차역으로 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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