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니와 조의 지구한바퀴, 우리가 만난 사람들
2017년 12월 23일
과테말라 플로레스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숙소도 찾아야 하는데, 우리를 태우고 온 버스기사 아저씨가 내일부터는 크리스마스 연휴가 시작되니 버스표를 미리 예매해두어야 한단다. 지금이 오후 5시인데 6시면 문을 닫는다며 재촉한다. 안 그래도 조가 며칠 전부터 우려했던 상황, 크리스마스 연휴라 버스가 운행할지 모르겠다고 했었는데 아저씨가 그 부분을 딱 건드린 것. 티칼 원데이 투어, 플로레스에서 세묵참페이, 세묵참페이에서 아티틀란으로 가는 표 3장을 한꺼번에 사면 900께찰에 해주겠단다. 검색을 해보니 비싸도 400께찰, 우리는 400께찰이면 사고 아니면 사지 않겠다고 했더니 알겠단다. 이때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여하튼 그렇게 폭풍같이 숙소에 체크인하고 버스표를 샀다.
도미토리는 좁고, 낡은 숙소였지만 호숫가 바로 앞에 위치해서 테라스에서 보는 풍경은 꽤 볼만했다.
모든 걱정거리를 해결하고 맥주를 한 병씩 주문했다.
그제야 주위가 눈에 들어온다.
그때 한눈에 봐도 스칸디나비안임이 분명한 청년이 말을 걸어왔다.
이름은 유리, 핀란드에서 왔단다. 크리스마스 휴가를 보내러 왔는데 너무 좋은 것 같다며 특히 맥주가 싸다고 너무 좋아한다. 살인적인 물가에서 살고 있는 이 녀석에겐 얼마나 놀라운 가격일까. 다음 목적지가 세묵참페이라고 했더니 자기도 세묵참페이에 간단다. 내가 깜짝 놀라며 크리스마스 휴가라 모든 버스 회사가 문을 닫았다고 얘기해주었더니 '아니야. 있을 거야.' 하며 천하태평이다.
느긋한 녀석.
12월 24일
티칼 유적지를 다녀와서, 저녁을 먹으러 KFC에 들렀다.
주문을 하려는데 낯익은 독특한 목소리가 들린다. 유리!!
같이 햄버거를 먹는데, 유리의 반응이 아주 흥미롭다. "와- 이거 너무 맛있는데- 좀 더 먹어야겠어!!"
사실 그렇게 맛있다고 할 버거는 아니었는데...
콜라도 프렌치 프라이도 없이 치킨 버거만 먹는 것도 신기한데, 또다시 버거만 두 개 더 사들고 왔다.
핀란드에는 KFC가 없나 보다. 세상 청정한 나라에서 온 유리는 먹는 것도 유기농만 먹었던 것일까.
난생처음 강한 MSG 를 맛 봤으니 맛이 없을 리가 있나.
햄버거 3개를 해치우고는 시익 웃는다. 자식, 좀 많이 귀엽다.
12월 26일 아침.
대부분의 버스가 같은 시간에 떠나는지 이 동네 외국인들은 다 거리에 나와 앉아있다.
첫 번째 버스가 한 무리를 태우고 세묵참페이로 향했다. 두 번째 버스가 왔다. 이건 우리 버스겠지 싶어서 타려고 하는데, 기사 아저씨가 표를 보더니 우리가 탈 버스가 아니란다. 그런데 바로 전날인 25일 날 표를 샀다는 유리가 버스에 오른다. 유리 말이 맞았다. 크리스마스 휴가란 것은 모두 거짓말이었던 것이다.
두 번째 버스가 가고도 우리를 포함해서 열댓 명 정도의 외국인이 남았다. 이제 정말 마지막 버스 한 대가 와야 한다. 그런데, 우리한테 표를 팔았던 아저씨가 금방 폐차해버려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12인승 밴을 하나 끌고 온다. 설마 저 차는 아니겠지 하고 있는데, 여행사 사람들 두어 명이 나와서 한 명은 먼지가 푹석푹석 날리는 밴 내부를 청소하고 나머지는 본넷을 열고 정비를 시작한다.
그제야 좀 사태 파악이 된다. 같은 운명의 동지들과 말을 트기 시작했다. 우리가 과연 오늘 안에 세묵참페이에 갈 수 있을까.
두 시간의 기다림 끝에 밴에 탑승했다. 그런데 두 명이 남는다! 표가 오버부킹 된 것!!
차에 타지 못한 커플은 F 욕설을 날리며 우리에게 표를 팔았던, 그 얼굴에 상처가 있는 사기꾼에게서 돈을 낚아채갔다. 나중에 알았다 이 커플이 오히려 운이 좋았던 것임을...
우여곡절 끝에 세묵참페이까지는 갔으나 세묵참페이에서 아티틀란으로 가는 표는 공수표였다. 사실 플로레스에서 밴을 수리할 때 우리는 이미 그럴 것임을 직감했다. 그렇지만 따져봐야 환불받기가 녹록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어느 순간 스르륵 포기했던 것 같다.
이 날이 2년의 여행 중 유일하게 사기를 당한 날이었다. 왜 바보같이 당했지?! 속이 많이 상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고 그 일을 돌이켜 봐도 많이 화가 나지 않게 되었을 시점에 되돌아봤을 때는, 어쩌면 우리의 앞선 걱정이 이런 일을 만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크리스마스니까 다들 쉬겠지?! 세묵참페이로 갈 수 있을까? '라고 지레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기꾼은 바로 그 부분을 이용한 것이고.
해맑은 유리처럼 돈워리 비해피였다면 당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 모를 일이지만 유리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들었다. 미래를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나라에서 온 아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 유리에게는 그런 여유가 있었다.
+ 에필로그
세묵참페이를 떠나 아티틀란으로 가는 날 아침.
다들 어디론가 떠나는 여행자들이 북적북적한 버스정류장에서, 우리 호스텔 주인이 사람을 찾고 다닌다.
인연도 깊지, 유리는 세묵참페이에서도 우리와 같은 숙소였다.
"유리라는 애 본 사람? 유리 없니? 왜 그 키 큰 피니쉬 가이 있잖아-"
유리가 호스텔에 여권을 두고 간 모양이다. 그러니 호스텔 주인이 친히, 정류장까지, 유리의 여권을 들고 와서는 유리를 찾고 다닌다. 천진난만한 유리는 여권을 놓고 와도 여권이 제 발로 유리를 찾아온다.
확실해졌다.
여행은 북유럽 스타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