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니 Jun 05. 2019

그리움을 그리워하는 여행의 마법

스웨덴 스톡홀름


 북유럽 한 달 살기를 다짐하고 떠나 온 이후 2주가 흘렀고 나는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스웨덴 스톡홀름으로 기차를 타고 넘어왔다. 마침 그 당시 유럽은 부활절 휴가 주간이라 코펜하겐에서 만난 동행도 휴가를 스톡홀름에서 보낼 겸 함께 국경을 넘어왔다.


거리가 깨끗하고 낮에도 사람들이 아이를 안고 여유롭게 걸어 다니고, 길에 차보다 자전거가 더 많으며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 5위 안에 드는 코펜하겐. 게다가 그곳에서 지내는 내내 즐거운 일들이 가득했기에 코펜하겐을 떠나는 게 못내 아쉬웠다. 그래도 스톡홀름에도 조금 더 다른 무언가 있겠지 하고 도착한 첫날. 우리는 이상한 에어비앤비 엘리베이터를 맞닥뜨렸다.

엘리베이터 내부에서 열쇠를 꽂아야 가고자 하는 층의 버튼을 누를 수 있는 건 여느 호텔도 마찬가지니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도착층에 서고 엘리베이터 자동문이 열리자 바로 앞에 두꺼운 철문이 등장했다. 동행과 나는 그 문을 열려고 낑낑대다가 다시 쾅! 매정하게 닫히는 엘리베이터 자동문에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서야했고 무정한 엘리베이터는 다시 1층으로 향했다.


"뭐야? 뭔데. 왜 안 열리는데?"

다시 도착층의 버튼을 누르고 올라가 엘리베이터 앞 철문을 열려고 몸 씨름을 벌이자 또 실패하고야 말았다. 이번엔 오가지도 않는 엘리베이터 내부에 갇혀 자동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기를 반복하다 같은 층 주민이 바깥에서 철문을 열어주어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

게다가 집 대문은 또 왜 그렇게 안 열리고 안 잠기던지... 내내 이 상황이 웃겨 깔깔거리고 배를 잡고 웃던 나와 옆에서 진땀을 흘리며 대문과 씨름하던 동행의 한 밤 대소동이었다.


'아, 진짜 화나네....'


봄이 막 오고 있었지만 그래도 아직은 쌀쌀한 날씨였음에도 당황함과 용씀이 섞여 땀이 삐질 삐질 흘렀다. 속으로 약간 짜증도 치밀어 올라 지난 코펜하겐에서의 행복했던 시간이 몽글몽글 떠오르기까지 했다.




옷을 갈아 입고 저녁으로 먹을 식재료와 맥주를 사러 스웨덴의 대형마트 ICA에 갔다. 각종 싱싱한 먹거리들과 소스들, 빵과 라면(짜파게티, 너구리)을 팔고 있었다. 브로콜리와 파프리카를 골라 담고 파스타 면과 소시지도 샀다. 그런데 맥주를 사러 찾은 코너에서 나는 도수가 3.5도 이상의 술을 찾을 수가 없었다. 와인도 맥주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혹시 주류 매장에는 팔까 싶어 구글맵에 검색을 해보았으나 오후 7시에 모두 영업 종료.


술을 물처럼 마시는 북유럽 사람들이기 때문에 유독 간암 발병률이 높다는 북유럽 국가들. 그 때문에 나라에서는 건강을 위한 조치로써 오후 일곱 시가 넘어가면 주류를 파는 매장의 문을 닫도록 한다. 또 일반 마트에서도 도수가 높은 술은 살 수 없으며 길에서 술을 마시는 것 역시 금지되어 있다.


같은 북유럽 국가임에도 이렇게 술에 대해 엄격한 스웨덴과 달리 덴마크는 매우 관대하다. 덴마크인들은 북유럽 사람들 사이에서도 흥이 많고 유쾌하고 잘 노는(?) 사람들로 인식되어 있다고 한다. 덴마크인들은 보통 12살부터 술을 마신다고 하는데 다리만 건너면 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스웨덴은 왜 이렇게 엄격하게 주류를 제재하는 걸까? 어쨌든 그 날 우리는 2.5도의 맥주와 함께 직접 만든 바질 파스타를 먹었다. 아, 코펜하겐이여...





그럼에도 마음에 들었던 건 17층에서 내려다보는 스톡홀름의 풍경이었다.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집들의 창문 사이로 북유럽 특유의 은은한 오렌지색 전열등과 함께 홈파티가 열리는 광경도 보였다. 저 사람들은 미리 맥주와 와인을 사서 쟁여둔 걸까? 궁금해졌다.




스톡홀름의 벚꽃길



부활절 휴가 주간에 스웨덴까지 휴가를 와 놓고도 내내 연구 과제를 하느라 왕립도서관에 있었던 동행 덕분에 나는 혼자 스톡홀름을 돌아다녔다.


그중 내가 가장 많이 갔던 곳은 감라스탄이라는 이름의 구시가지와 그 앞의 강가였다. 강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바와 펍에 모여 있었고 정박된 보트 위에는 디제이 부스와 함께 신나는 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강을 따라 어깨를 들썩이며 걷다 보면 어느새 감라스탄 입구에 도착해 있었다.






스웨덴은 미트볼이 유명하다기에 '나랑 미트볼 좀 먹어줘.'라고 동행을 꼬셔내어 도서관에서 엉덩이를 떼게 만들었다. 미리 예약을 해둔 식당에 가기 전 커피를 마시러 들른 카페에 앉아있는 동안 시야에 세 남자가 포착되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들어와 한 명은 내 동행의 뒤로 의자를 끌고 와서 앉았고 맞은편에 다른 남자가 소파에 앉아 나를 응시했다. 다른 한 명은 화장실로 들어갔다. 나는 의심의 여지 없이 다른 두 명의 남자가 화장실 간 일행을 기다리고 있겠거니 생각했다.


 잠시 후 동행의 뒤에 앉아 있던 남자가 슬그머니 허리를 숙이더니 바닥에서 무언가 꼼지락거렸다. 그 광경을 보고서도 신발끈을 묶는건가하고 별 생각이 없던 나는 세 명의 남자가 조용히 카페를 다시 빠져나갈 때 바닥에 세워둔 가방이 툭 하고 쓰러지는걸 보고서야 아차 싶었다. 소매치기였던 것이다.


 그때 맞은 편 소파에 앉아 있던 중년의 남자 두 명이 우리에게 달려와 "저들이 물건을 훔쳐간 것 같은데 뭔가 없어진 게 없는지 확인해보라"고 다급히 말했다. 동행이 놀라 가방을 살펴보자 정말로 앞 주머니의 지퍼가 열려 있었다. 그 안에 뭐가 있었는지 생각하는 틈에 둘 중 한 남자는 그 소매치기들을 잡으러 밖으로 뛰어 나갔다.

 다행히 그 주머니에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아 없어진 건 없었다. 그 두 남성은 다시 자리로 돌아갔고 우리를 도와주기 위해 나서 준 그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스케치북을 주섬주섬 꺼내 둘의 모습을 그려 선물로 내밀었다. 그들은 당황하다가 이내 자신들의 모습을 그린걸 눈치채고 매우 기뻐했다.





 저녁을 먹고 밤거리를 따라 걸으며 집으로 향하던 중 공연을 하고 있는 듯한 재즈클럽을 발견했다. 재미있을 것 같아 들어선 그곳에서 맥주를 시켜 놓고 바에 앉았다.


 그때 누군가 재즈클럽으로 들어섰다. 우린 서로 놀라며 "왜 여기에 있어?"라고 외쳤는데 낮에 카페에서 우리를 도와준 중년 남성을 만났기 때문이다. 우연히 목적지가 같았던 것도 놀라웠지만 알고 보니 이 재즈클럽에서 공연을 하는 뮤지션이라는 사실도 놀라웠다. 오늘은 공연을 하지 않고 관람을 하러 왔다던 그는 이 공간과 연주자들에 대해 우리에게 소개를 해 주었고 익숙하다는 듯 연주자들과 이야길 나눴다.





 북유럽에 온 뒤 신기한 일들이 정말 많이 일어났기 때문에 '마법에 걸린 것 같다'는 말을 입에 달고 지냈다. 그리고 스웨덴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는 이 날은 피날레로 장식하기에 아주 좋은 우연의 마법이 일어났다.


 그와 나는 나란히 앉아 재즈 공연에 발을 구르며 춤을 췄다. 그러다 때론 감동적이라며 눈물을 흘리던 그를 놀리기도 했다. 음악에 빠져들어 있는 나와 눈이 마주치면 그는 흐뭇하게 웃어 보였다.





 스톡홀름의 밤은 마치 마법이 펼쳐지는 곳 같았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 곳에 와서 '마법 같아'라는 말을 자주 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일도 있었지만 충분히 일어날 법한 일도 있었다. 일상에서 일어났다면 '우연'이라는 말로 넘겼을 만한 일도 '마법에 걸렸다'라는 말로 조금 더 멋지게 이 여행을 포장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여행이 길어질수록 나는 빨리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었다. 여행이 지겹거나 힘들어서가 아니었다.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잊지 못할 기억을 만들면 만들수록 현실로 돌아가기가 점점 힘들어질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더 깨어나기 힘든 멋진 꿈을 꾸려고.'


 예상처럼 나는 한국에 돌아오고 2주 가까운 시간 동안 꿈에서 깨어나지 못해 발버둥을 치며 보냈다. 긴 여행 이후에는 이 같은 후유증이 꼭 따라오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그 여행이 끝내주게 좋았다면 더더욱.

 그러한 그리움이 지속되다 보면 왜 그리운지 이유도 불투명해지지만 그저 그리워하고 싶고 그리움이 옅어지는 것이 아쉬워지는 때가 온다. 정말 무어라고 콕 집어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마주하는 때.






 울렁울렁한 감정을 안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우연히 이 글을 만났다.


'실체가 없어도 그리운 것이 있다. 내 앞에 있는데도 보고 싶을 만큼 사랑한 것도, 잊지 못할 추억을 남긴 것도 아닌데 그리운 것이 있다. 모든 상황이 맞아떨어져야 할 것 같고, 공교롭다고 해야 할 만큼 우연한 상황이 되어야만 할 것 같은. 그래서 더욱 애틋하고 반가워 눈물 나는 것'


 적당한 타이밍에 나의 마음을 오롯이 표현해 줄 수 있는 이 글을 찾았다는 것도 마법 같은 한 순간이 아니었나 싶다.










작가의 이전글 여행자의 로맨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