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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니 May 18. 2019

여행자의 로맨스

덴마크 코펜하겐




한 달 살기를 시작하러 용감하게 혼자 떠나왔지만 코펜하겐에서 지낸 지 일주일이 지나자 새로운 사람을 만나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혼자 다니다 보니 늦게까지 밖에서 머무르며 야경을 보고 저녁을 먹은 적이 없었고 그러다 보니 펍에서 혼자 맥주를 마신 적도 없었다. 심지어 일주일 간 길에서 만난 동양인이라고는 호떡가게 사장님 뿐이었다. 혼자 낯선 곳에 똑떨어지고 나니 난 생각보다 꽤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혼자 유럽 여행을 한다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가 본다는 그 유명한 카페에 가입을 한 날, '저녁을 먹자'는 글에 연락이 온 사람들 중 한 명에게 연락을 했고 우린 함께 페리를 타고 저녁을 먹기로 했다.






“우와.. 저 이런 거 처음 해봐요, 동행!” 들뜬 내가 말했다. 그는 아이슬란드 여행에서 몇 번 이런 동행을 구해서 다녀본 적이 있었는데 여행을 더 멋지게 만들어 준 경험이었다고 했다.


낯선 나라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 여행의 순간을 함께 공유하는 것은 분명 신비로운 일이다. 그는 코펜하겐 기술대학교에서 제약 관련 연구를 하는 대학원생이었고 여행을 즐기는 똑똑한 청년이었다. 우리는 매 20분마다 출발하는 페리의 티켓을 끊어놓고 근처 벤치에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길 하다 두 번이나 시간을 놓쳐 버리고서 40분 만에 페리를 탔다.





페리를 타는 동안 날은 점점 저물었고 난 코펜하겐에 온 지 일주일 만에 처음으로 바깥에서 선셋을 보았다는 걸 깨달았다. 누군가와 함께 있으니 시간이 더 잘 흐르는 것 같았다. 해가 뉘엿뉘엿 질 때가 되어서야 페리 투어는 끝이 났고 우리는 저녁을 먹으러 코펜하겐 시내로 향했다.


이곳에 온 뒤 일주일 내내 샌드위치만 먹다가 중심가에 있는 식당의 테라스에 앉아 커다란 잔에 나오는 칼스버그 생맥주 한 잔과 해산물 파스타를 먹었더니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파스타 면발이 짜릿했다. 누가 여행은 굶으면서 눈동냥하는 거라 했던가. 먹는 것만큼 오감을 충족시켜줄게 어디 있다고.





우리는 잠시도 쉬지 않고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덴마크와 북유럽의 문화, 각자의 여행 이야기, 심지어 어릴 때 갖고 있던 망상 같은 것 까지도. 낯선 곳에서 만난 조금 친숙한 (한국인이라서)이에게 평소 드러내기 어려웠을 나의 생각들도 가감 없이 다 고백하게 되는 게 여행지의 마법.


저녁을 먹고 이대로 헤어지기가 아쉬워 맥주를 한 잔 더 하기로 하고 그가 안내하는 수제 맥주 가게로 향했다. 덩치가 큰 북유럽 사람들, 그리고 그 속에 낀 동양인 둘. 수 십 개의 맥주 중 제일 눈길이 가는 녀석으로 골라 현지인이 된 기분으로 그 시간을 즐겼다. 일요일 밤 열한 시, 영업을 끝낸 가게에서 나와 은은히 빛나는 가로등을 빼곤 아무것도 없이 텅-비어버린 거리를 이야기하며 걷다 보니 거짓말처럼 날이 밝아왔다.



여행 중 마주친 이 하루는 마치 비포 선라이즈처럼, 낯선 설렘이 가져다준 끝없는 세계의 공유와 확장이었다.



추억을 그려줄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북유럽에서의 한 달을 보내는 동안 동행과는 꽤 자주 만나 시간을 보냈다. 함께 보낸 인연과의 마지막 인사를 하던 공항에서 나는 자꾸 가슴 한쪽이 쎄해져 머뭇거리게 되었다.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나누고 점심을 먹은 뒤 헤어지는 플랫폼에서,


"언젠가 한국에 오면 다시 만나! 안녕!"

씩씩하게 말하고 뒤돌아 에스컬레이터를 올라가면서 나는 왠지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는 그는 다시 한국으로 올 것이고 우린 다시 만날 수 있지만 서로 이 여행에서의 인연을 이대로 남겨둘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더는 인연이 이어지지 않아도 서로가 그곳에서의 인상 깊은 기억이었다는 마음만 같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해.'

공항의 의자에 앉아 '왠지 마음이 허전해 발걸음이 안 떨어진다.'던 나에게 언니가 해주었던 이 말처럼, 이 신기하고 새로운 인연은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






일상으로 돌아와 사람들을 만나며 이 인연에 대한 이야기를 깊게 할 수 없었던 이유는 쉽게 이해받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때 들었던 잔나비의 노래를 들으며 종일 침대에 누워있다는 내게 사람들은 '너의 여행이 그 사람과의 로맨스로 점철되어 버린 게 아니냐'라고 말했다. 스쳐간 인연과의 추억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쯤으로 생각했겠지만 나는 그가 그리웠던 게 아니었다.


'가서 글을 써야지, 그림을 그려야지, 뭔가 엄청난 영감을 얻고 와야지!'라고 출발했지만 나는 여행자답게 현실의 나와 내 욕심을 버리고 꿈속의 여행에 꽤 충실하게 한 달을 보냈다. 언어란 단지 마음을 나누기 위한 도구 중 하나일 뿐이지 큰 장벽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느꼈고 언어로 더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은 충분히 다른 어떤 걸로도 대체가 가능하단 것도 알았다.

혼자인 나에게 사람들은 더 친절히 길을 알려주고 자신의 모임에 초대해주고 따듯한 식사를 대접하고 자신들의 도시를 안내해주었다. 혼자 있었지만 결코 혼자가 아니었던 시간을 지나면서 내가 언제 어느 상황에 있든 역시 혼자가 아닐 거란 무한한 긍정을 갖게 하는 여행이었다.



그리고 혼자 떠난 그 여행을 더 아름답게 만들 수 있도록 함께 해 준 '자전거 탄 잔나비'가 그리웠던 것뿐이다.



 



미드나잇인 파리에서 자정만 되면 도착하는 마차에 몸을 싣고 꿈같은 시대로 떠났다가 현실로 돌아오면 그곳은 그저 코인 세탁소였던 것처럼 나의 현실 역시도 이 비행이 끝나고 나면 다시 빽빽한 도심 속 오피스텔에 머무를지 모르지만


주인공이 꿈속의 그들에게서 영감을 받아 현실에서 더 과감하고 멋진 선택을 할 수 있었듯

나의 꿈 역시도 내 현실의 선택과 과정들에 큰 보탬이 되어주리라 믿었다.


결국 그 주인공에게도 꿈속의 로맨스는 없었고 나 역시 그랬다. 나에겐 현실의 로맨스가 있을 뿐이다.



이 이야기는 여행자의 로맨스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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