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니 May 14. 2019

남들 다 하는 '한 달을 살아보러' 갑니다.

덴마크 코펜하겐 한 달 살기 



잘 다니던 회사를 갑자기 때려치우겠다고 했을 때 주변의 반응은 두 개로 나뉘었다. 나라는 사람을 잘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이제 드디어 니 길 찾아가는구나'라는 반응이 압도적이었고, 내가 국제회의 기획자라는 직업에 굉장히 만족하며 잘 지내고 있는 줄 알았다는 사람들은 '왜 갑자기? 이제 뭐하게?'라는 반응이었다. 

사실 많은 퇴사자들이 공감하겠지만 퇴사를 하기로 마음먹는 순간은 엄청난 사건이 일어나는 순간이 아니다. 켜켜이 묵혀오던 오랜 고민들이 쌓이다 못해 넘쳐흐를 것 같이 아슬아슬한 시점이 '떠나야겠다'라고 다짐하게 되는 때인 것 같다. 회사 생활을 꽤 열심히는 했던 건지 나가는 날 모두 모여 '퇴사 축하파티'를 열어주었다. 그들이 준 선물과 편지들을 품에 안고 돌아와 집에서 편지를 읽으며 펑펑 울었지만 꽤 행복하게 잠들었던 기억이 난다. 


문제는 그다음 날부터였다. 평소에 워낙 머리 굴리는 일을 멈추지 않던 나였기에 가만히 있는 동안 무얼 해야 할지에 대한 조급함이 퇴사 1일 차부터 떠올랐다. 그래도 딱 하나, 퇴사하고 꼭 해야지 하고 다짐한 건 있었다. 퇴사한 사람들이면 너도 나도 다 한다는 '한 달 살기'였다. 


한창 한 달 살기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기도 했고 2015년에 언니와 3주간 유럽으로 떠난 ‘현지인처럼 살아보기’ 여행을 이번 기회에 다시 한번 해보고 싶었다. 여러 도시를 두고 고민을 하던 중 발리로 결정하고 티켓팅까지 했지만 롬복 지진, 인도네시아 홍수 등으로 뒤숭숭할 듯하여 목적지를 변경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발리에서 한 달 동안 요가와 서핑을 배우며 나에 집중하는 시간을 가지는 모습을 상상하던 게 좌절되자 다른 곳을 어딜 가야 할지 의지가 조금 사라져 갈 때쯤 보게 된 ‘국경 없는 포차 - 코펜하겐 편’.





방송을 보며 덴마크의 아름다운 풍경 때문에 목적지로 정하게 된 건 아니었다. 포차를 찾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행복’이란 단어가 너무나 명확하고 확실하게 느껴졌다. 왜 덴마크가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 모여사는 나라라고 하는 걸까요?라는 질문에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아홉 시에 출근해서 오후 네시면 퇴근해요. 대부분의 덴마크 사람들은 퇴근 후 운동을 하고 가족들과 저녁을 먹으며 시간을 보내죠. 그러고도 물가에 친구들과 앉아 맥주를 마실 4시간이 남습니다. 완벽하게 일 이후에 나의 생활이 있는 거죠. 덴마크인들은 대부분 자전거를 타고 다녀요. 그래서 누가 좋은 차를 타고 잘 사는지 알 수 없고 건물들은 다 비슷한 높이로 지어져 누가 좋은 집에 사는지 알 수 없죠. 그래서 서로 비교하지 않고 나에게 더 집중하고 내 삶을 행복하게 하는데 더 관심을 가질 수 있어요.



이년 전쯤 우연히 피카(FIKA)라는 단어를 접하고부터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나의 주요 관심사는 라곰, 피카, 휘게 등 북유럽의 라이프스타일이었다. 단순히 ‘휴식’, '여유'라는 단어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그 단어들에 대해 더 알고 싶어 많이 찾아보고 공부했다. '저들은 뭔데 여유롭게 살면서도 현실에 쫓기지 않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라 자부할 수 있는 거지? 그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오는 거지?'와 같은 질문들이 계속 생겨났다. 

그러던 중 퇴사 후 나에게 스스로 쥐어 준 한 달의 시간이 생겼다. 나는 그렇게 노래 부르던 북유럽으로 드디어 떠났다. 




꼭 가봐야 할 곳 몇 개를 구글맵에 입력하고 항공권과 숙소, 기차(덴마크-스웨덴)만 예매한 뒤 정말 가벼운 짐(보통 사이즈 백팩+기내용 캐리어1)만 꾸려 떠나는 3주간의 여행이었다. 


떠나기 하루 전 날 밤, 이렇게 긴 여행을 혼자 떠나는 건 처음이라 많은 생각들에 꼴딱 밤을 새 버렸다. 일 년 전 부담을 안고 멕시코로 출장 가기 전날 밤과 같은 느낌이었다. 왜 그렇게 부담이 가득한지 생각해보니 내가 이번 여행에서 너무 많은 걸 느끼고 얻어오려 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잠을 못 이루고 누워서 4년 전 휴학을 하고 3주간 유럽으로 떠났을 때 남긴 블로그 포스팅들을 밤새 읽었다. 그 속의 나 역시 뭔가 영감을 얻으려 애쓰다가 여행의 중간쯤부터 많은 생각을 내려놓고 순간의 행복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때 남긴 나의 글들은 굉장히 솔직하고 재밌고 매력적이어서 당장 원고로 내고 싶을 정도였다.) 

순간의 행복에 집중하는 22일간의 여행을 위해 난 장황한 글을 쓰거나 멋진 그림을 그리자는 계획 대신 딱 하나를 나의 목표로 정했다. 



북유럽의 휘게, 피카, 라곰 문화에 대해 완벽하게 느끼고 오기! 
(그 와중에 남자 친구는 ‘완벽하게’도 빼라고 했다. 그냥 느끼기만 해도 된다며)





인천공항에서 밤 비행기를 타고 도하로 향하던 시간. 타기 전에 혼자 많은 다짐을 하고 출발해서인지 

비행기에 타자마자 왠지 모르게 순수한 즐거움이 피어올랐다. 평소 비행기를 탈 때는 창가 자리를 예약했어도 이미 많이 봐서 더 볼 것도 없단 것처럼 그냥 잠깐 들여다보다 말았던 창문에 바싹 붙어 손으로 그늘까지 만들어가며 어두운 바깥을 바라봤다.


왜 늘 아래의 불빛들만 내려다봤을까? 문득 그 생각이 들어 캄캄한 하늘을 올려다봤더니 바로 내 눈앞에 망원경으로 확대한 듯이 커다란 카시오페이아 자리가 보였다. 스물두 살에 첫 해외여행을 떠난 이후로 일 년에 두 번씩은 꼭 비행기를 탔는데, 난 왜 비행기에서 밤하늘의 별을 가까이 볼 수 있다는 생각은 못했던 걸까? 생각의 전환이 가져다준 소중한 순간이었다. 




북유럽에 관한 에세이를 읽으며 커피를 마시다가 우연히 고개를 돌려 바깥을 봤을 때 구름인지 설산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새하얀 풍경이 펼쳐졌다. 카메라를 들고 ‘우와..’ 혼잣말을 하며 찍고는 혼자 보기가 아까워 기내 와이파이를 연결했고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사진을 공유해주면서 새삼 세상이 좋아졌다 싶었다. 순간 느끼는 이 감동을 비행기 안에서 바로 내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다니.

*카타르항공은 1시간 무료 와이파이를 제공하고 필요하다면 10달러에 계속 사용할 수도 있다.


긴 비행 끝에 드디어 코펜하겐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니 과연 내가 생각해왔던 맑고 깨끗한 북유럽의 이미지답게 푸르른 녹지가 한가득 펼쳐졌고 투명해서 바닥까지 비치는 푸른빛의 바다도 보였다.





북유럽의 4월은 아직 겨울이라 춥다고 들었는데 따뜻하고 쾌청한 날씨에 온갖 꽃들이 마구 피어나는 시즌이었다. 추우면 좀 더 걷지 뭐! 하는 생각으로 겨울 옷들을 덜 챙기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나의 숙소는 매드라는 호스트의 가족이 모여 사는 굉장히 아름다운 집이었다. 그중 계단을 반층 내려가면 나의 일주일간의 행복을 책임질 넓고 아늑한 방이 있었다. 





매드는 여느 덴마크인들처럼 오후 4시에 퇴근을 하고 5시쯤 집으로 돌아왔다. 매드가 없는 동안 나는 햇살이 드는 욕실에서 샤워를 하고 빈 집을 돌아다니며 구경을 했다. 마당에는 트램펄린과 그네가 있고 거실에는 기타와 예쁜 가구들이 있었다. 그리고 내 방, 거실 등 집 안 곳곳 어디에나 양초가 있었다. 


덴마크인들의 양초 사랑은 그 소비량에 있어 세계적인 수준을 보인다. 휘게(Hygge), 편안하고 아늑한 느낌을 주는 공간을 위해서 양초를 피우는 것이 휘겔리(Hyggeling)하다고 생각해서 언제나 그들의 공간에는 양초가 있다고 했다. 



다섯 시가 조금 넘어 도착한 호스트 매드는 미스터 선샤인에서 유진초이의 상사로 나온 배우 데이비드 맥기니스를 닮은 꽃중년이었다. 빨래를 걷다 말고 서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자신의 딸의 엄마가 한국인이라고 하길래 사진에서 봤던 부인은 서양인이었는데 무슨 소리지? 싶었는데 ‘입양을 했어~’라고 했다.


인구 대비 한국인 입양국 세계 3위인 덴마크. 얼마 전 방송에서도 덴마크의 한국인 입양에 대한 걸 봤던 터라 그 이유가 궁금해져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한국인 아이를 입양했어?”

“굳이 이유를 꼽자면 전 여자 친구가 한국인이었어. 근데 덴마크에서 그 비율이 높은 이유를 생각해보자면 아마 가난 때문에 입양을 보내야 하는 사람들이 한국에는 많기 때문이 아닐까?”

그의 말에는 전혀 나쁜 의도가 없었다. 많은 세금을 내지만 또 그만큼 국가에게 지원을 받는 최고의 복지국가인 만큼 이 곳의 사람들은  ‘돈’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살아간다. 이들에게 가난 때문에 혹은 어떤 이유 때문에 아이를 키울 수 없어 입양 보내야 하는 게 여기선 흔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인 듯했다.


그날 밤 이불마저 휘게리한 침대에서 파묻혀 푹 자고 눈을 떴다 낯선 풍경에 잠시 멈칫했다. '아, 나 여기 왔었지' 하며 정신을 차리고 씻기 위해 2층 욕실로 향했다. 북유럽의 겨울은 해가 일찍 진다기에 좀 우중충한 느낌을 상상하고 왔었는데 어젯밤에 해는 8시가 조금 넘어서 졌고 아침햇살은 눈이 부시게 밝았다. 햇살을 받으며 목욕을 하고 무작정 길을 나섰다. 



맥주 X 소시지 X 아이스크림 X



버스를 타서 기사님에게 목적지를 말하고 현금을 지불하면 티켓과 함께 거슬러 준다. 어리바리하고 있는 내게 웃으며 친절하게 동전 기계를 열어 보여주며 ‘예에~~!’라던 유쾌한 드라이버 아저씨였다. 손바닥에 동전이 떼구루루 떨어졌다. 매드에게 '여기는 모두가 친절한 것 같아. 버스 드라이버조차도!'라고 했더니 눈썹을 씰룩거리며 '글쎄... 아마 네가 운이 좋았던 것 같아.'하고 껄껄 웃었다. 


제일 앞자리에 앉았더니 앞 유리에 ‘맥주, 소시지, 아이스크림 안돼요’라는 픽토그램이 있었다. 덴마크인들은 맥주를 무척이나 사랑하고 그래서 유명한 맥주 브루어리도 많다고 하더니 이런 픽토그램에서조차 읽을 수 있었다. (귀여워)


코끝에 살랑 스치는 바람을 맞으며 목적지 없이 버스를 타고서야 구글맵을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오늘은 어디를 가볼까?








재미있는 일을 하며 살기 위해 애쓰는 기획자 보니입니다.

제가 만들어 온 재미있는 프로젝트들, 그리고 여행하며 느낀 이야기들을 해보려 합니다.     

재미있게 읽어주신 뒤 공감과 댓글은 작가의 큰 행복이 됩니다. :)

작가의 이전글 게으른 여행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