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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니 Jun 09. 2019

실패하지 않는 여행

미국 로스앤젤레스



요즘의 내가 유일하게 챙겨보는 예능은 ‘대화의 희열’이라는 프로그램이다. 왕년에 그리고 지금 ‘대세’라고 불리우는 각 분야의 사람이 출연해 네 명의 엠씨들과 쿵짝을 맞추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토크쇼이다. 나는 볼 때마다 이 프로그램의 편집을 누가 하는지가 궁금해진다. 마치 한 편의 잘 만들어진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아서.


이 글의 요점은 어제의 ‘대화의 희열’엔 김영하 작가가 나왔다는 것이다. 그의 책을 읽어보진 않았지만 그가 출연한 방송은 종종 봤기에 ‘풍부한 지식을 담백하고 재미있는 입담으로 풀어내는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작가이기 때문에 문학이나 예술 이야기를 할 줄 알았는데 그의 이야기의 대부분은 바로 ‘여행’이었다.


그는 ‘실패한 여행’의 정의를 ‘너무나 순탄하게 계획대로 흘러간 나머지, 다녀오고 난 뒤 기억에 남지 않는 여행’이라고 했다. 누군가는 계획이 틀어지는 것에 대해 불안감을 갖기 때문에 이 말에 동의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작가라는 점을 감안하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순탄하고 아무런 어긋남이 없는 여행을 다녀오는 건 작가들에겐 시간낭비와도 같아요. 그 여행에 대해 쓸 게 없거든요.”




스스로를 기록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그와 같이 자칭 ‘기록충’인 나도 ‘순탄한 여행에선 남길 게 별로 없다’는 그의 말에 매우 공감했다. 여행 중 길을 잃거나 낯선 사람을 자주 따라가는 여행자인 나에게는 그만큼 기억에 남는 일도 많아 에피소드도 많이 생겼기 때문이다. (운이 좋아서라는 걸 부인하지는 않는다.) 나는 길을 자주 잃는다.




스물 여섯의 여름, 멕시코로 해외출장을 간 김에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친구를 만나고 오려고 출장 이후 휴가를 냈다. 그러나 5일간의 해외출장 업무가 끝난 뒤 체력도 정신도 나가버린 나는 휴가고 뭐고 한국행 비행기를 타고 돌아가고 싶었지만 기다리는 친구의 얼굴이 생각난 덕분에 멕시코 공항에서 로스앤젤레스로 가는 비행기 티켓팅을 했다.

공항까지 마중을 나와 준 친구 덕분에 차를 타고 편안하게 친구의 집까지 도착했고 친구는 쉬는 주말 동안에 나를 데리고 LA의 주요 명소들을 구경시켜 주었다. 유명하다는 그리피스 전망대도 가보고 블루보틀도 처음 가보고 하모사 해변에서 핑크빛 노을도 봤다.


그러나 이틀쯤 지나자 혼자서 길을 찾아 헤매고 싶은 충동이 스멀스멀 피어 올랐다. 비록 스스로도 잘 아는 길치이지만 말이다. 다음 날 친구는 출근을 했고 나에겐 온전히 혼자 보낼 반나절의 시간이 주어졌다.



네가 좋아할 것 같다며 ‘아트 스트릭트’에 가보라던 친구의 말에 그 곳을 도착지로 설정하고 우버를 불렀다. 우연히 한국인 기사님이 배정되어서 신나게 이야기를 하며 달리던 도중 우버는 ‘Highway’ 표지판이 보이는 고속도로로 들어섰다. 맞게 가고 있는 건지 여쭤보고 싶었지만 그 때 기사님은 한창 사업이 어려워 미국으로 가족들과 오게 된 속상한 이야기를 하고 계셨다.


시내 어디쯤에 있다던 친구의 말과는 달리 왠 허허벌판에 도착해 목적지라며 세워주신 기사님은 다음 콜이 있다며 매정하게 가버리셨고 나는 공장 같은 건물들 틈 골목에 홀로 남겨졌다.


[야, 너 거기서 뭐해? 위험하니까 당장 우버타고 돌아와.]


내가 있는 곳 좌표를 찍어 줬더니 날아 온 친구의 메시지였다. 어리둥절하지만 일단 위험하다고 하니 우버를 잡아보려 했지만 호출 가능한 차량이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도시 외곽의 어느 조용하고 심심한 동네 같았다.


도보로 삼십분 정도 거리에 스타벅스만큼이나 유명한 ‘블루보틀’이 있었다. 정체 모를 공장 사이에 가만히 서 있을 수 없어 일단 거기까지 걸어가 보기로 했다. 골목으로 걷기는 무서워 도로를 따라 걷는데 스포츠카를 탄 미국 형아들이 창문을 내리고 소리를 질렀고 갑자기 좀 무서워졌다.


마침 데이터도 잘 안터져 음악을 들을 수가 없었다. 낯선 곳의 두려움을 이겨내기엔 음악만한 것이 없는데 이 30분을 어찌 걷는담 하고 있을 때 폰에 저장된 음성메모들이 떠올랐다. 친구와의 술자리 대화, 직장 동료들과의 만담, 혼자 튕겨 본 어설픈 기타 연주, 아빠의 조언, 면접 전날 연습한 영어 인터뷰....



LA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파란색이어서 걷는 내내 발걸음을 활기차게 만들었다. 고요함 속에 어깨를 움츠리고 걷던 나는 어느새 음성메모 속 다정한 사람들의 소근거림과 함께 기운차게 걷고 있었다.




6월의 LA는 맑은 하늘만큼이나 햇살도 너무나 뜨거웠다. 블루보틀에서 아이스 커피를 한 잔 마시며 더위를 식혔다. 친구와의 약속이 있는 저녁까지 무얼 할까 고민하다 할리우드 사인이 가까이 보인다는 레이크 할리우드 파크에 가기로 하고 또 다시 우버를 잡았다.


이번 우버 기사는 멕시코가 고향이라고 했다. 며칠 전 출장으로 들른 멕시코시티라는 도시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깔깔 웃다 보니 어느새 레이크 할리우드 파크에 도착했다. ‘즐거운 여행 하길!’이라며 인사를 하는 우버기사와 헤어져 공원에 앉아 음악을 들으려는 순간, 이어폰을 두고 내린 걸 알았다.

‘아, 젠장...’



공원에 앉아 시간을 보내다 햇살이 뜨거워 이제 내려가야겠다며 우버를 호출했으나 왠걸, 몇 번을 호출해봐도 근처에 우버가 없다고 했다. 가까스로 잡은 우버는 오는 길에 새로운 손님을 만났는지 계속 취소되었다.

산 중턱에 위치한 곳이라 근처에 대중교통 수단이 있을리는 없고 하는 수 없이 걸어내려가보기로 했다. 팔 다리가 햇살에 익어가고 있어 뜨거웠지만.



20분쯤 걸었을까 계속 내리막길을 걷다 보니 다리가 아파 주택가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으니 차를 몰고 산 위로 올라가는 부러운 일행들이 보였다. 그들은 창문을 내리고 나를 향해 ‘레이크 할리우드 파크가 이 쪽으로 가면 되니?’라고 물었고 나는 그렇다고 그 방향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내려가는 길에 나 좀 태워가줬으면 하는 마음을 뒤로 한 채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고요한 주택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이어폰도 잃어버린 나는 어느 집 앞 돌계단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가끔 새소리가 찌익 나기도 하고 한 줄기 바람이 불기도 했다. 앞으로 한 시간은 더 걸어내려가야 할 것 같은데 어쩌지 하는 생각보다 지금 그 순간이 자유롭게 느껴져 좋았다. (한국에서는 입기 힘들 것 같은) 옆구리가 깊게 파여 속옷이 드러나는 민소매를 입고 있는 내 모습도 좋았고.




다행히 내려오는 도중 우버를 잡아 한 시간을 걷는 사태는 면했지만 하루종일 이리저리 길을 잃는 여행이었다.



여행 중엔 ‘왜 이렇게 자꾸 꼬이는 거야.’하고 입으로 한숨을 내뱉게 되는 상황임에도 여행에서 돌아오고 나서 생각해보면 한번 더 기억에 남는 순간이 된다.


만약 정확히 우버를 타고 ‘아트 스트릭트’에 내려서 아티스트들의 작품을 구경했다면? 레이크 할리우드 파크에 앉아 이어폰으로 노래를 듣고 다시 우버를 딱 맞춰 잡아타고 시내로 돌아왔으면? 편안하게 친구의 차를 타고 돌아 다녔으면?

나름의 알찬 즐거움도 있었겠지만 나는 내가 갔던 곳에 할리우드 사인이 있었다는 것만 기억하고 그 공원의 이름은 잊었을지 모르며, 음성 메모 속 정다운 목소리와 함께 고요한 골목을 걷는 경험을 해보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모든 여행 매 순간마다 이렇게 헤매는 건 아니다. 하지만 간혹 스스로가 한심할 정도로 길을 헤매거나 겁도 없이 낯선 사람을 따라 나섰을 때 나는 두고 두고 이야기할 수 있는 모험담이 생겼다.

그렇다고 해서 인도에서 낯선 사람이 주는 짜이를 받아 마시거나, 김영하 작가님처럼 시가를 팔겠다는 하바나의 남자를 따라 판잣촌을 걸을 용기는 없다.



그럼에도 나에겐 모험을 할 조금의 용기가 늘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음을 인지하고 있는 것은,


여행을 실패하지 않도록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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