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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니 May 09. 2019

안녕하세요, 기록충입니다.

10년째 일기를 쓰고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기록충입니다.


나에게는 제일 친한 친구가 있다.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비밀 이야기까지 몽땅 털어놓을 수 있는 가까운 친구. 일기장이다. 손으로 뭘 끄적거리기 좋아했던 나는 18살 때부터 지금까지 매일매일의 기록들을 거의 하루도 빼먹지 않고 일기장 속에 남겨왔다.


나와 같은 90년 대생들은 아날로그의 끝과 디지털의 시작을 지켜봐 오며 자란 세대이기 때문에 어렸을 때는 손으로 많이 끄적이며 자랐고 점점 컴퓨터와 핸드폰으로 무언갈 쓰는 시간이 늘어났다. 일기장뿐 아니라 싸이월드가 유행할 땐 싸이월드에 끊임없는 기록들을 남겨왔고 페이스북으로 넘어갈 땐 눈물을 머금고 페이스북 유저가 되어 다시 그곳에 기록들을 남겼다. 또 인스타그램으로 넘어올 때도 다시 한번 눈물을 머금고 새로운 기록의 공간으로 옮겨왔다. 또 블로그에 글을 쓰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브런치에까지 무언갈 적어대고 있으니 확실히 '기록충'임이 분명하다.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을 때면 SNS에 그 순간을 글과 사진으로 남기고 그날 밤 일기장에 빼곡하게 그 날의 감정들을 글로 남긴다. 또 한 달 모음집으로 생각을 정리해서 블로그에 글과 사진으로 남기다 보니 가끔 정신을 차려보면 무슨 에너지 낭비인지 싶기도 하다. (가끔은 그림으로 그려서 남기기도 한다. 에너지 소비 끝판왕)




취미가 없는 편이다. 뭐든 금방 싫증이 나는 편이라 하나를 시작해도 꾸준히 하지 못한다. 야구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친구도 있고 달리기에 푹 빠진 친구도 있으며 서핑 중독자처럼 바다에 사는 사람도 있고 운동에 빠져 매일 헬스장에 사는 사람도 있다. 그에 비해 ‘광적'으로 좋아하는 무언가 부족해서 '취미'라고 말할 무언가가 뚜렷하게 없었다. 워낙 이것저것 찔러보기 좋아해서 다양한 걸 해보다가도 쉽게 싫증을 느끼곤 했기 때문이다. 그런 나에게 질리지 않고 꾸준히 하는 어떤 것이, 바로 '기록'이다.


여행의 기록이 될 수도 있고 일상의 기록이 될 수도 있고 글, 사진, 영상, 그림, 녹음 어떤 걸로도 도구를 삼을 수 있다. 그중에서 나는 글로 남기는 것을 좋아한다.


날씨가 좋을 땐 하루 종일 걸으며 폰으로 블로그를 쓰고 비가 오는 날엔 카페에서 노트북으로 글을 쓴다. 하지만 제일 좋은 건 밤에 침대에 누워 일기를 쓰는 시간이다. 새벽 고요한 시간에 요즘 가장 꽂힌 노래를 들으며 하루의 시간을 돌아보고 글을 쓰는 일은 꽤 오랜 시간이 걸리는 편이다. 잘 쓰기 위해 오랜 시간을 공들여 쓰는 게 아니라, 생각 속에 잠겼다가 깨어나기를 반복하며 글을 쓰기 때문에 거의 한 시간은 꼬박 걸리는 것 같다.


 



손바닥보다도 작은 한 칸에 하루를 다 풀어내려다 보니 글자가 점점 작아지는 중인데, 어릴 땐 엄마에게 일기를 읽히지 않으려고 작게 쓰다보니 독립해서 살고 있는 지금도 하루의 내용을 다 못 담을까 봐 점점 작게 쓰기 시작해 어느 순간 일기장은 빼곡한 깜지가 되어가고 있었다.


지난달 코펜하겐으로 여행을 갔을 때 에어비앤비 호스트였던 글렌과 이야기를 하다가 취미가 뭐냐는 질문에 글을 쓰는 걸 좋아한다고 했더니 "온라인으로? 오프라인으로?"라고 물어왔다. 말없이 다이어리를 가져와 쓱 내밀었더니 입을 틀어막고는 놀라워하던 글렌. 외국인의 눈에 한글은 동그라미와 세모, 네모 같은 도형들로 이루어진 그림 같았을 테지.

('못'이라는 글자를 가리키며 "이건 '남자'라는 뜻이야?"라고 묻길래 빵 터졌다.)

분명 무슨 내용인지 전혀 읽지도 못했을 텐데 그는 나의 일기장을 계속 넘겨 보며 매우 놀라워하며 말했다.


"이건 분명 아주 멋진 취미야."



글렌의 말처럼 이것은 분명 아주 멋진 취미이다. 나는 손으로 뭔가를 오래 쓰면서 꽤 많은 일들을 생각해냈고 또 해결해냈다. 아주 멋진 일이 일어났을 때에도 아주 슬픈 일이 일어났을 때에도 퇴근하고 집에 달려오자마자 제일 친한 친구에게 달려가 미주알고주알 하루의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그렇게 꼬박 저녁을 다 보내고 밤이 깊어와도 친구와 후련하게 이야기를 다 나누고 나니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너는 뭘 할 때 제일 살아있음을 느껴?"

"나? 음... 기록할 때 살아있음을 느껴!"


몇 년 전 친구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을 했더니 그녀는 아직까지도 이 대답을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었다.


얼마 전 우연한 기회로 내 이야기를 했던 강연에서 한 참가자가 남긴 후기에도 역시 이런 말이 있었다.


[좋아하는 '일'말고 '좋아하는 일'을 하라는 조언은 '일'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직업을 넘어서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자부심이 생기고 그렇게 차곡차곡 쌓인 경험이 더 나은 나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취미로 흥미로 단순히 하고 있는 일들도 어딘가에 '기록'해놓고 구체화시킬 필요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이것은 분명 아주 멋진 일이다.









재미있는 일을 하며 살기 위해 애쓰는 기획자 보니입니다.

제가 만들어 온 재미있는 프로젝트들, 그리고 여행하며 느낀 이야기들을 해보려 합니다.

재미있게 읽어주신 뒤 공감과 댓글은 작가의 큰 행복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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