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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니 Dec 15. 2020

비워내고 다시 채워야 할 이야기

ep. 40 잔나비_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


일 년을 부지런히 달려온 수플레의 마지막 호는 조금 허탈하고 슬픈 소식으로 시작해보려 한다. 바로 이 글을 쓰는 오늘 아침, 지난 몇 년간 차곡차곡 쌓아 온 플레이리스트가 날아가버린 것이다.


오랫동안 사용해오던 스트리밍 어플의 재생목록에 저장할 수 있는 곡은 총 1,000곡이다. 오늘, 꽉 찬 플레이리스트를 정리해보려다 실수로 모두 비워버렸고 나의 재생목록엔 그 1,000곡 가운데 아무것도 남지 않았고 말이다.





노래에는 저마다 각자의 이야기가 담겨 있을 것이라며 쓰기 시작한 수플레처럼, 노래는 마치 요술램프처럼 귀를 갖다 대고 비비면 아주 오래 전의 기억도 또렷하게 떠오르고야 말 것 같은 매개체이다. 1,000곡이 담겨 있는 재생목록에서는 곡을 추가한 날짜와 곡명만 보아도 이 당시 어떤 감정으로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대학교 도서관 옥상에 드러누워 함께 듣던 곡, 비를 맞으며 추적추적 걸을 때 좀 더 음울한 감상에 젖고 싶어 애써 골라 담은 곡, 낯선 나라에서 LP판 위 빙글빙글 돌며 흘러나오던 노래 등. 누군가의 취향과 이야기, 나아가 ‘히스토리’까지 담겨있는 플레이리스트를 훑어보기만 해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을 정도라 하니. 자신의 플레이리스트를 공개하기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이해가 가기도 한다.



[사진 1,000장이 날아간 것도 아닌데 뭐. 노래야 다시 좋아하는 걸로 담으면 되지.]라는 친구의 말처럼 오늘의 이 충격적인 사고가 누군가에겐 그냥 언젠가 쓰려고 쌓아둔 이면지를 한 번에 비워내는 일처럼 가볍게, 심지어 개운하게도 느껴질지 모른다. 사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하루를 망치지 않는 좋은 방법이기도 했다. 그러한 자기 위로는 저녁이 되자 그 노래에 담긴 많은 장면들이 공중에 흩어져 떠돌고 있고, 기억의 한계에 부딪힐 만큼 희미해진 곡들은 붙잡지 않으면 영영 휘발되어 버리고 말 것 같은 황당한 상상에 사로잡혀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누군가가 내 머릿속 생각을 읽으면 한심스러울 테니 절대 읽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드는 하루였다. 하루 종일 머릿속에는 허공을 배회하며 멀어져 가는 소중한 곡들이 가득했다. 외출 후 집에 돌아오자마자 곧장 지난 몇 년간의 일기장을 꺼냈다. 마주하는 순간마다 떠오르는 노래들을 플레이리스트에 주워 담기 위해서. 언제부턴가 열어보기 두려워서 읽지 못했던 나의 일기장들을 어쩔 수 없이, 실로 오랜만에 다시 펼쳤던 것이다.






처음에는 소중한 순간을 남기고 싶어 기록을 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록은 습관이 되었고 점점 지나가는 순간이 아쉬워 붙잡아 두고 싶은 마음으로, 하루도 휘발되어서는 안 된다는 마음으로 기록을 했다. 그러다 보니 깜지같이 새까만 일기장 안에는 너무나 많은 감정이 하나도 빠짐없이 담겼다. 가물가물 희미하게 남겨두었어도 좋았을 것들이, 너무나 빠짐없이.


나이가 들면서 지나간 일기장을 펼치는 일이 이전만큼 가볍지 않았다. 어느 해의 일기장이든 마지막 장을 넘길 때면 마음이 복잡하고 울렁거렸다. 기뻐하고 슬퍼하고 반짝이고 행복해하던 과거의 나와 인연들의 감정들을 한 번에 뒤집어쓰고 나면 벗어나기가 너무 힘들었다. 지금이 불행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집에 불이 나면 가장 먼저 구출할 거라며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던 일기장들을 몇 년 전부터 난 잘 펼치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일기장을 뒤지며 노래를 플레이리스트에 담는 일은 한 시간 만에 마무리되었다.




아쉬워 주워 담고 체할 만큼 꼭꼭 채워 넣다 보면 어느 순간 터지기 직전의, 비워줘야만 하는 때가 찾아온다. 의도된 일일 수도 있고 오늘처럼 사고일 수도 있다.

비워주고 보내주는 것은 언제나 슬프고 허전하지만, 조금이라도 비워내지 않으면 이미 과부하가 된 용량에는 새로운 것들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다. 마치 1,000곡만 저장되는 플레이리스트에 새로운 곡들을 넣으면 이전의 곡들이 자동으로 삭제되는 게 두려워 새로운 곡들을 마음껏 추가하지 못하던 나처럼 말이다. 이제는 무려 999곡이나 담을 수가 있다고.


왜 999곡이냐고? 가장 먼저 생각난 첫 곡을 넣었기 때문이다.



추억의 한 페이지에 갈피를 꽂고선 새로운 추억이 담긴 999곡을 그려가볼 2021년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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