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물도 아니고 두물 간 MBTI에 대해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 전쯤 우리는 희한한 이론 하나에 빠져있었다. 인간을 단 네 분류의 유형으로 나눈 뒤 성격, 연애 스타일, 심지어 패션 스타일까지 분석하는 이른바 혈액형 이론.
B형 여자는 어떻고 A형 남자는 어떻고 둘의 궁합은 좋고 나쁘고 하는 테스트들을 찾아보며 수긍하기도 하고 새로 연애를 시작할 때마다 상대방과 나의 궁합을 혈액형으로 점쳐보기도 했더랬다.
개성이 다양한 수많은 사람들을 네 가지로, 심지어 몸속에 흐르는 피로 구분한다는 건 지금 생각해보면 귀여운 이론이지만 그 당시에 우리 모두는 혈액형 이론에 꽤 진지했었다. '어려서 그랬나?' 하기에는 우리 언니 오빠들도 진지했고 이모 삼촌들도 진지했던 것 같다.
다시금 이번에는 사람들을 16가지 유형으로 구분하는 게 유행이다. (유행이라기엔 제법 오래 지났지만) 바로 MBTI테스트.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테스트는 공식적이지 않다는 얘기도 있고 스스로가 고르는 응답들이 실제 성격이라기보다는 되고 싶은 이상향을 고르게 된다는 얘기도 들었지만, 몸안에 흐르는 B형의 피로 나를 까칠한 여자로 규정해야 하는 것에 비하면 스스로 매긴 응답이 말해주는 성격 유형은 제법 받아들일만하다.
매번 테스트해보지만 언제나 나는 ENFJ, 정의로운 사회운동가 형이 나온다. 특징을 읽어 보면 대부분 꼭 맞다. 혹시 다른 유형들을 읽어봐도 똑같이 공감하는 마음이 들까 의구심에 확인해보면 전혀 나와는 거리가 먼 내용이 많은 걸 보면, 확실한 ENFJ임에 틀림없다.
MBTI 맹신론자는 아니지만 사람을 궁금해하는 나에게 이 테스트는 꽤 유용하다. MBTI 유형이 보여주듯 이렇게나 사람들의 성격이 천차만별인 걸 진작 알았더라면 조금 더 인간관계가 수월했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같은 상황에서 나는 하늘이 두쪽이 나도 이렇게 생각하는 게 상식적인데, 왜 너는 그런 생각이 안 든다는 거야?'같은 물음을 던지기 전에 그의 MBTI를 먼저 물어보았더라면, 방에 혼자 앉아서 그 유형에 대해 꼼꼼히 분석해보았더라면, 지나온 여러 관계들에서 나는 그들을 좀 더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성격은 타고난 부분도 있지만, 환경을 통해 후천적으로 형성될 가능성이 더 크다'라고 내가 좋아하는 오은영 박사님은 얘기했다. 가정환경, 학교 생활, 사회생활 등 많은 경험과 관계를 거치면서 나의 성격은 특정한 방향으로 굳어져 왔을 것이다. 가끔 '나는 왜 이런 성격을 못 고치지?' 하는 생각이 들 때 억지로 스스로 불만인 부분을 바꿔보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 오랜 시간을 거쳐오며 만들어진 내 성격을 바꾼다는 건 무척이나 어렵다.
하지만 남들은 그렇다는 걸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나는 사랑과 관심을 주는 걸 좋아했고 또 그만큼 받는 걸 좋아했다. 100만큼 관심을 주면 100만큼 돌려받고 싶었고 때론 200만큼 욕심도 냈다. 200을 받을 때는 당연해 보였지만 가끔 50을 주는 사람을 만나면 기대감에 부풀었던 마음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었다. 100만큼 받고 나면 100만큼 돌려주는 게 왜 어려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늘 그들은 성격 탓이라고 했지만 성격도 노력하기에 따라 바뀔 수 있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고나면 내 머릿속에서는 '이 사람은 나를 100만큼 사랑하지 않는것 같아'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대화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하고 싶은 대화의 깊이가 지하 100m인데 상대방은 늘 50m도 못 내려가고 끝이 날 때면 나는 지쳤다. 매번 '우리는 대화를 많이 했으면 좋겠다'라고 얘기하다 끝내 섭섭함을 이기지 못하고 작별을 고할 때 그는 말했다. "너는 나한테 늘 대화가 부족하다고 했지만 나는 너랑 있을 때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제일 깊은 마음들을 얘기했어. 그런데 너는 늘 대화가 부족하다고 하네. 늘 노력하고 있었는데 너는 부족하게만 느끼니 더 어떻게 해야 네가 만족할지 자신이 없다."
얼마 전 친해지고 싶은 사람을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MBTI를 묻게 되었고 내 성격과는 정반대 유형인걸 알게 되었다. 헤어지고 집에 가는 길, 그를 더 알고 싶은 마음에 인터넷에 그 유형의 특징, 성격, 인간관계 등을 검색하는 나를 발견했다. 그리고 친구로 잘 맞을까? 하는 궁금증에 유형별 최적의 궁합도 찾아봤다. 마치 예전에 그들과 나의 혈액형 궁합을 찾아보았듯이.
그러다 문득, 예전의 내가 상처를 주고 또 상처를 받았던 상대방의 MBTI는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요즘 만나는 사람마다 MBTI를 묻다 보니 이젠 대화를 몇 번 나누면 그가 어떤 유형인지 맞추는 정답률이 꽤 높은데 그 노하우로 과거의 관계들의 성격 유형도 추측해볼 수 있었다.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방향으로 사고하고 느끼던 그들의 생각을, 그렇게 궁금했던 그 마음 속을, 한참 지난 지금에서야 이 유형 검사로 조금씩 이해해보고 있는 것이다.
혈액형과 마찬가지로 MBTI 테스트 역시 재미로 보는 테스트로 여기고 너무 몰입할 필요는 없음을 안다. 하지만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궁금해하고 무슨 생각을 갖고 사는지, 같은 상황에서 상대방은 어떤 생각을 할지 알고 싶다. 특히 상대방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미치게 궁금하다. 그리고 그의 유형을 분석하며 얕게나마 상대방에 대한 궁금증들을 해소해간다. 그리고 그의 행동을 이해해간다. 유형별 규정된 그 특징이 그 사람의 살아온 모든 날과 경험을 대변하지는 않을지라도.
(21.1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