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질이라도 재미있잖아요.
요즘의 직장인들이 제일 많이 하는 말 중에 '퇴사할 거야' 다음이 '나 유튜브 할 거야'라고 한다. 몇 년 전만 해도 유튜브는 나에게 그저 방송에 비해 덜 가공된, 다소 날 것(?)의 콘텐츠로 시간을 가볍게 때우는 스낵 컬처 중 하나에 불과했다. '너도나도 유튜버' 붐이 일어나기 시작하던 작년에도 유튜브는 자료를 찾을 때 정보가 굉장히 많은 플랫폼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심지어 내가 구독하는 유튜브 채널도 0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나에게 '유튜브 할 거야', '너 유튜브 안 해?'라는 말이 전혀 공감되지 않는 다짐이었던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누군가 전하는 이야기나 새로운 콘텐츠를 찾고자 할 때 아직은 영상보다 글을 더 선호하는 사람이기도 했지만, 그렇게까지 완고했던 이유는, 한 편으론 애써 거기에까지 발을 들이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이것저것 벌려놓고 제대로 하지 못하고 멈춰 있는 게 많다는 것도 나의 고민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것, 해야 할 것들이 생길 때마다 잔뜩 늘어놓고 연말에 바쁘게 겨우 매듭짓는 것을 반복하다 보니 웬만해선 꼭 지킬 수 있는 계획들만 세우고 싶었다.
올해 초 좀 더 부지런히 움직여보고자 사이드잡으로 할 거리를 찾던 중 포토샵 레슨을 시작하게 되었다. 출근 전 한 시간 동안 레슨을 하는 일정이라 아침 일찍 집을 나와 학생을 만나러 갔다. 학생은 나보다 두 살 정도 어린 친구였고 작은 스타트업을 운영하고 있었다. 준비해 간 커리큘럼대로 레슨을 진행하고 나면 늘 시간이 좀 남았고 관심사가 비슷했던 덕분에 이것저것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게 되었다.
그는 최대한 많은 채널로 발을 뻗어놓는 것이 중요하다며 그렇게 발을 뻗어놓으면 무엇을 새로 시작하고 싶을 때에도 그 채널을 발판으로 조금 더 쉽게 시작할 수 있지 않겠냐고 했다. 왜 갖고 있는 콘텐츠들을 가치 있는 결과물로 만들어내지 않고 계속 바닥에 뿌리고만 있냐고 안타까워하며 멈춰 있던 블로그도 다시 시작하고 칼럼도 써보고 유튜브도 시작하라며 나를 부추겼다.
그게 아깝다고 생각은 했었지만 그동안의 나는 개인적인 즐거움으로 기록을 해왔고 영상을 만들고 글을 썼지, 가진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글을 쓰거나 그것을 수익으로까지 연결시킬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무엇보다 또 뭔가를 시작해놓고 제대로 마무리하지도 못한 채 멈춰지는 게 싫어서 새로운 걸 시작하기가 망설여지는 것 같다고 얘기했더니 돌아온 대답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근데 정작 본인도 어디까지 해야 마무리되었다고 할 수 있는지 모르실걸요?"
돌이켜보니 그 친구와 함께 보낸 주 1회, 3주가량의 시간이 올해 나를 좀 더 달라지게 만든 시간이었던 것 같다. 가끔 이렇게 영감은 쥐도 새도 모르게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과의 접점에서 찾아온다. 그의 말을 내내 곱씹으면서 한두 달을 보내다 블로그와 티스토리에 기획자 칼럼을 쓰기 시작했고 또 한 달 뒤엔 유튜브도 시작했다. 그의 말대로 무작정 이것저것 벌려놓고 무언가라도 꾸준히 하다 보면 정말 또 다른 기회를 가져다줄 것 같았다.
나는 '사이드잡'을 하지 않는 사람이 내 주위에 없기를 바란다. 의견이 다른 사람도 있겠지만 나에게 '사이드잡'은, 수입이나 유명해질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것 보다도 자신의 내면적인 부분을 좀 더 키워주는 것이다. 사이드잡을 가지기 시작하면 나는 회사에 소속된 일원이나 하나의 직업에 얽매이는 게 아닌 또 다른 가치를 가진 사람이 된다. 꼭 많은 돈을 벌지 않아도 괜찮다. 자신이 이 회사가 아니라도, 이 일이 아니라도 가치를 인정받는 다른 무언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나의 또 다른 가치는 내가 다른 것들을 좀 더 쉽게 시도할 수 있도록 용기를 준다.
요즘 '비룡'이며 '린다G'며 부캐의 세계가 왜 인기를 얻게 되었을지 생각해 보면, 무엇 하나 예상대로 굴러가는 게 없는 지금 같은 시기에 사람들의 마음속에 잠자고 있던 또 다른 나에 대한 욕망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월드스타 '비'는 진지하고 완벽하고 존경받는 선배 가수이지만 '비룡'은 늘 찜 쪄먹어 지는 구박데기 막내 동생, 그러면서도 미워할 수 없는 장난꾸러기 같은 존재이고, 탑스타 '이효리'는 화려했던 과거에서 잠시 물러나 소박한 일상을 일궈나가는 스타이지만 '린다G'는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기라도 하듯 더 화려하고 강한 이미지를 보여준다. 늘 누구나 마음속에는 여러 가지의 '부캐'를 갖고 산다. 한창 연예인들 사이에 유행처럼 번지는 '부캐'놀이를 일반인이라고 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부캐'로 사는 인생은 조금 더 용감해질 수도 있으니까.
작가 '무루'의 [이상하지만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라는 책에는 이유도 없이 깊게 구덩이를 파다가 다시 구덩이를 덮는 한 아이의 '삽질'을 다룬 일본 그림책 이야기가 나온다. 이 그림책은 일본 작가가 쓴 책이지만 여기에 나오는 '삽질'이라는 표현은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이야기에서 주는 결과처럼 두 가지 의미로 풀이된다. 진짜 땅을 파는 삽질, 그리고 엄한 데 힘을 쏟는 삽질.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경험, 결과를 담보하지 않는 순수한 몰입, 외부의 반응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 이것이 삽질의 조건이다. 실컷 빠져들 만큼 재밌다는 점이 놀이하고도 닮았다. 이게 얼마나 재미있는지는 직접 해봐야 안다. 구경꾼은 절대로 그 맛을 알 수 없다. -무루-
어찌 보면 결과가 화려하지 않고 중간에 하다가 마는 모든 것들은 객관적으로 '삽질'이다. 그만큼 시간도 노력도 (때에 따라선 돈도) 투입된 행동에 결과가 그닥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삽질이 의미가 없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다못해 삽질을 안 하고 앉아 있으면 체력은 아낄 수 있지만 그 시간이 삽질을 한 시간보다 의미가 몇 십배 크지는 않다. 그러니까, 해봐도 괜찮은 거야.
궁금하면 해본다. 새로운 것이라면 해본다. 망할 것 같아도 일단 해본다. 하다못해 재미라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재미난 것들이 모여 재미난 인생도 될 것이다. -무루-
영감을 주는 사람이라고 친구가 지어준 '박영감'이라는 별명으로 만든 유튜브 채널에는 본캐(본업)인 기획자로의 일상, 부캐(사이드잡)인 잡다 둥둥한 것들, 그리고 수익은 나지 않지만 취미생활인 다양한 것들이 송출될 예정이다. 가끔 시간 나실 땐 들러서 구독과 좋아요도 눌러주시고 댓글도 남겨주시면, 삽질이 조금 더 즐거워질 것 같아요.
(20.0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