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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니 Oct 13. 2024

풀떼기가 아무리 예뻐도 사람이 낫지

[소설] 50일의 썸머


[여름]

베트남에 살고 있는 친구를 만나러 2박 3일간의 여행을 다녀온 날,  아침 수업이 있어 새벽 비행기를 타고 돌아와 곧바로 학교로 갔다. 45리터 배낭을 둘러매고 학교 정문에 들어서자 저 멀리 앞에서 걸어오는 서우가 보였다. 나도 모르게 반가워 손을 번쩍 들 뻔했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문득 그의 얼굴에도 반가움이 스친 것을 보았다. 비 오는 날의 식사 이후 우리는 부쩍 가까워진 것 같았다.

“어디서 오는 길이예요?”

서우는 등짝을 가득 채울 만큼 커다란 배낭을 둘러맨 나를 보며 물었다.

“외국에 사는 친구 만나러 갔다가, 아침 비행기로 돌아오는 길이요.”

“공항에서 바로 오는 길이라고요? 잠은 잤어요?”

“비행기에서 잠깐 눈 좀 붙일까 했는데 기내식을 놓칠 수 없어서.”

그렇게 얘기하는 나를 서우는 특유의 표정을 지으며 내려다보았다. 처음 만난 날 버스를 기다릴 때 보았던 표정이었다. 큰 눈을 장난스럽게 뜨고 한쪽 입꼬리만 씩 올린 표정. 처음엔 왠지 기분이 나쁘던 그 표정이었는데 지금은 무언가 장난을 치고 싶어 하는 표정처럼 보인다.

“와, 엄청 피곤할 스케줄인데 전혀 안 피곤해 보이는데.”

“시차도 얼마 안 나는데 이 정도쯤이야. 너무 안 피곤해서 수업 끝나면 집에 가기 아쉬울 정도예요. 누구라도 붙잡고 여행 다녀온 이야기 실컷 하면서 떡볶이나 먹고 싶다고요.”

그는 흘깃 내 등 뒤에 있는 커다란 배낭을 보았다.

“휴양지로 여행 가는데 캐리어가 아닌 45리터 배낭을 짊어지고 가는 것도 신기하네.”

“뭐든 움직일 때 거추장스럽게 만드는 건 딱 별로라서요.”

그와 짧은 인사를 나눈 뒤 수업에 늦겠다며 강의실로 달려갔다. 피곤하지 않은 줄 알았지만 여독은 어쩔 수가 없는지 수업 내내 밀려오는 하품을 참느라 온갖 애를 썼다. 끝나면 바로 집으로 가서 침대에 뛰어들어야지 생각하면서.


 수업이 끝나고 학교 정문 앞에서 지하철역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이 징- 울렸다. 메시지의 주인공은 그였다.

[집에 가는 사람들로 붐비는 시간에 그 배낭을 메고 버스 타면 눈치 꽤나 보일 텐데.]

고개를 들어보니 횡단보도 맞은편에서 서우가 손가락으로 다른 방향을 가리키며 걸어가자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길을 건넜다.

“시간표가 겹쳐도 너무 겹치나 본데.”

“둘 다 수강신청을 열심히 할 의지가 없었나 본데.”

아는 얼굴도 별로 없는 학교에서 하루에 두 번이나 마주치다니 이젠 그가 정말로 반가울 지경이었다. 우리는 주 5일 수업을 들으러 학교에 오는 4학년은 아마 없을 거라며 같이 킥킥 웃었다. 그는 지하철 역으로 가는 길에 자주 가는 분식집이 있다고 말했다.

“지하철역까지 걷다가 배고프면 떡볶이나 실컷 먹고 가자고요.”



학교에서 지하철역까지는 걸어서 30분 정도 걸렸다. 걷는 걸 좋아하는 나는 날씨가 좋은 날이면 종종 걸어가곤 했는데 그날은 제법 더운 날씨였다. 이 날씨에 걸으면 더울 텐데 괜찮겠냐고 물으니 ‘배낭 멘 사람이 문제지’라며 대수롭지 않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지하철역까지 걷는 동안 나는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베트남 여행 이야기를 신나게 했고 그는 별 흥미도 없을 이야기에 열심히 맞장구를 쳤다. 그는 걷다가 가방에 들어있던 카메라를 꺼내 틈틈이 사진을 찍었다. 그가 자주 간다는 작은 떡볶이 가게에서 우리는 함께 이른 저녁을 먹었다.


“나도 말이 만만치 않게 빠르지만 진짜 말이 빠르네요.”

떡볶이를 먹으며 여행 이야기를 하다 잠시 말을 멈추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불편한 사람들 만날 때는 그나마 느려지는데 같이 말이 빠른 사람이랑 있으니 제동이 안 걸리네요.”

본인이 성격이 급한 편이라고 하면서도 내가 쉴 새 없이 수다를 떠는 동안 그는 한 차례도 말을 끊지 않았다.  

“제가 이렇게 빨리 말하게 된 데에는 어린 시절의 영향이 큰 것 같아요. 학교가 끝나고 집에 오면 엄마한테 하고 싶은 말이 넘쳐나는데 언니도 하고 싶은 말이 많으니까 서로 먼저 말하려고 하는 거예요. 엄마가 더 재밌게 들어주는 건 먼저 말하는 사람의 이야기겠다 싶었거든요. 엄마도 듣다 보면 지친다는 걸 눈치챈 거지. 그러고 보면 어린애인데도 눈치가 되게 빨랐나 봐요. 그래서 집에 도착하자마자 가방도 벗기 전에 서로 먼저 말하려고 하다 보니 어릴 땐 말도 많이 더듬었어요. 그렇게 말이 안 나올 때마다 나는 진짜 말하는데 소질 없는 줄 알았다니까.”

“그러게. 이렇게 숨도 안 쉬고 말하는데 말을 못 한다는 건 좀 앞뒤가 안 맞지. 자매가 서로 말하려고 하다가 말이 안 나와서 더듬는 장면. 상상하려니 웃기고 귀여운데 또 희한하다.”

그는 잠깐 허공을 보며 무언가 떠오른 듯 풉 하고 웃었다. 재밌는 상상을 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좀 쉬고 말해요. 들어줄 수 있으니까. 나는 말도 빠르지만 듣고 이해하는 속도도 빠르다고요.”







[여름]

여름이 무르익을수록 햇빛은 따사로워졌지만 멋진 날씨와는 달리 컨디션은 좋지 않았다. 어제 가게에 손님이 많아 두 시간 더 연장근무를 해서인지 수업은 귀에 들어오지 않고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눈이 감겼다. 수업이 끝나고 시간이 남아 학생회관에서 엎드려 자고 있는데 누군가 옆에 앉는 인기척에 화들짝 잠에서 깼다.

“캠퍼스가 그렇게 큰 건 아니라지만 이렇게 자주 마주칠 수도 있는 건가?”

서우가 장난기 가득한 큰 눈을 굴리며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우리는 학교에서 꽤 우연히 자주 마주쳤다. 수업 시간표가 비슷한 날 외에도 교재를 사러 가던 학교 내 서점에서, 점심을 먹고 한숨 자려 찾아낸 도서관 구석 자리에서, 날씨 좋은 날 운동장 농구대 옆 벤치에서 서우를 만났다. 키가 큰 것도, 눈에 띌 만큼 잘생긴 것도 아니었지만 자주 마주치다 보니 이젠 멀리서 뒷모습만 봐도 그임을 알 수 있었다. 처음 몇 번 마주칠 땐 인사만 하고 지나가는 식이었는데 간혹 시간이 맞으면 같이 커피를 사러 가기도 했고 밥을 먹을 때도 있었다. 서우는 나보다 한 살이 더 많았지만 우리는 자연스럽게 말을 놓게 되었다.   

“맨날 에너지 넘치게 어디서 불쑥 나타나더니 웬일로 오늘은 기절해 있네.”

“오늘은 어디 돌아다닐 기운도 없어. 진짜 피곤해.”

나는 다시 고개를 어깨 속에 파묻었다.

“맨날 피곤하다고 해도 하나도 안 피곤해 보였는데 오늘은 진짜 피곤해 보인다. 다크서클 때문인가?”

그렇게 말하던 그는 자기가 마시려고 샀다는 망고스무디를 내밀었다. 빨대의 비닐도 벗기지 않은 새 음료였다.

“입도 안 댄 것 같은데?”

“사실 오늘도 왠지 어디서 갑자기 나타날까 싶어서 미리 사놨지.”

그는 전혀 당황한 기색도 없이 말했다.

“우리 강의 시간표가 비슷하잖아. 점심 먹고 강의 하나 듣고 나면 졸릴 때도 됐겠다 싶어서.”

그는 잠깐 시계를 보더니 일어나서 내 의자를 뒤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먹는 비타민은 이걸로 됐고… 이제 비타민 맞으러 가자.”


그는 익숙한 듯 앞장서 학교 도서관 옥상으로 갔다. 나도 잠도 깰 겸 잠자코 옥상으로 가는 계단을 따라 올랐다. 입학식 이후 처음으로 올라오는 곳이었다. 사실 그때도 도서관 구경만 했었지 옥상을 자세히 본 적은 없었다. 이곳은 복학생들이 공강 시간을 때우러 오거나 하루종일 도서관에서 고시 공부를 하는 학생들이 잠깐 바람 쐬러 올라오는 곳이라 생각했었지만 오늘 보니 혼자 조용히 음악을 듣는 학생들도 있었고 왁자지껄 담소를 나누는 무리들도 보였다.

“막 학기라 학교에 친구가 없어서. 공강 시간에는 여기 옥상에 와서 시간을 보내곤 했어. 사진도 찍고 노래도 듣고 해도 다 각자 플레이야. 그리고 언제 와도 사람이 별로 없어 눈치 볼 필요 없어서 좋잖아.”

서우는 매주마다 찍은 사진들을 모아 블로그에 올리고 있었는데 몇 년간 취미로 꾸준히 해오다 보니 지금은 제법 많은 사람들이 그의 사진을 보러 블로그를 방문하고 있었다. 그는 최근 소규모의 사진 전시회도 진행했다고 했다. 매일 가방에 묵직한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걸 보고 사진 찍는 취미가 있겠구나 생각은 했었지만 블로그를 훑어보니 취미 이상의 실력이라 놀라웠다. 그는 가져온 카메라를 꺼내 난간 위에 세워놓고 몇 장 사진을 찍었다.

“나는 풍경이나 물건보다는 사람을 찍는 게 좋아. 물론 사람을 찍는 게 제일 어려워. 모델이 되어줄 사람을 구하는 것도 힘들고, 설령 구하더라도 그의 컨디션에 따라 결과물이 성공적일 수도 있지만 한 장도 못 쓰게 되어버릴 수도 있으니까. 그와 내가 같은 마음이 아니니 원하는 포즈나 표정을 이끌어내는 것도 영 쉬운 게 아니야. 나는 사진 찍는 걸 좋아하는 거지, 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건 딱히 좋아하지 않거든. 그렇게 어려우면서도 또 재밌어. 그 알 수 없는 결과물 덕분에.”

카메라를 만지작 거리던 서우는 나를 향해 자연스럽게 렌즈를 들이댔다.

“왜 이래. 나 모델해준다고 한 적 없는데?”

“테스트 컷이니 봐주자.”

“오늘 상태가 엉망이라고.”

“글쎄, 오늘은 널 찍어줘야 할 것 같기도 하고.”

내가 막을 새도 없이 그는 오늘 입은 분홍색 원피스가 잘 어울린다고 말하며 자연스럽게 몇 장을 찍었다. 카메라 앞에 선 게 영 어색했다. 렌즈 속에 비친 내 통통한 다리가 어떻게 보일지 몰라 눈치를 보며 고개를 푹 숙이니 발 근처에 무성히 핀 꽃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주위를 둘러보니 발목 높이로 자란 잡초 사이로 하얀 풀꽃들이 듬성듬성 솟아 있었다. 잡초가 너무 길게 자랐는데 옥상 관리도 안 한다며 서우가 투덜거렸다.

“잡초도 꽃이랑 같이 있으니 얼마나 예뻐.”

나는 서우의 투덜거림에 맞받아쳤다.

“여름에도 피는 꽃이 많은데 사람들은 여름 꽃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봄에 피는 꽃은 칙칙한 겨울이 지나고 피니까 반갑게 느껴지는데 여름에 피는 꽃은 초록색 이파리들에 묻혀서 잘 보이지도 않고. 날씨가 더우니 바깥에서는 발걸음을 빨리 옮기느라 지나치기 바쁘고. 그렇지만 여름에 피는 꽃도 이렇게 자세히 보니 예쁘잖아.”

그렇게 말하며 꽃과 잡초가 뒤섞인 풀숲 사이로 걸어 들어가는 발걸음 뒤로 셔터 소리가 또 들렸다. 그리고 서우의 대꾸가 들렸다.

“풀떼기가 아무리 예뻐도 사람이 낫지.”







[서우]

지루한 마케팅 수업이 진행되는 한 시간 동안 맨 뒷자리에서 여름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나도 도저히 견딜 수 없이 지루한 참이었다. 마침 교수님이 쉬는 시간을 알렸고 그녀에게 다가가 손가락으로 쿡 찌른 뒤 레몬 사탕을 꺼내 슬쩍 내밀었다. 눈을 반쯤 뜬 채 레몬 사탕 포장지를 벗기는 그녀에게 조용히 말했다.

“먹는 비타민은 레몬사탕으로 해결했고… 이제 비타민 흡수하러 가야지.”

우리는 수업 중간에 가방을 챙겨 나와 도서관 옥상으로 향했다. 내 비밀 공간을 그녀에게 뺏긴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아무도 없는 옥상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벤치에 드러누웠다.

“저 교수님 수업은 너무 별로라니까. 제대로 해줄 만한 얘기가 없으면 그냥 수업이나 진행하면 될 텐데 또 그러고 싶지는 않은지 수업의 절반이 자기 무용담이야. 그것도 정말 하나도 공감이 안 되는 얘기들 뿐이라고.”

졸던 모습이 들킨 게 괜히 머쓱했는지 투덜거리던 그녀의 말에 나도 맞장구를 쳤다.

“더 별로인 건 저 교수님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지. 지난 학기에도 수업이 너무 별로여서 강의 평가를 아주 솔직하게 남겼거든. 다른 학생들도 나처럼 남겼으면 아마 이번 학기에 저 교수님 강의는 열리지 못했을 텐데 이렇게 별로인 강의가 계속되고 있다는 건 그들이 솔직하게 평가하지 않았다는 거지. 그게 다음 학기 학점을 잘 받기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술 마시러 가야 하니 급해서였는지 몰라도.”

“더 별로인 건 수강신청에 실패해서 이번 학기에도 그 강의를 어쩔 수 없이 듣고 있는 네가 아니고?”

여름이 싱글싱글 웃으며 내 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나에게 한 방 먹이는 것을 즐거워하는 그녀였다.

“휴, 네 말이 맞아. 내가 제일 멍청이였네. 그래도 다른 대학생들은 정말 멍청이들이야.”

“다른 사람들을 왜 그렇게 말해?”

“사실이니까. 난 우리처럼 이렇게 열심히 사는 사람들을 좋아해.”

“우리도 지금 수업 중간에 나와서 땡땡이치는 일반적인 대학생들일 뿐인걸.”

그녀는 계속해서 나에게 면박을 주었다. 내가 약간 삐진 표정을 지은 걸 눈치챘는지 여름은 가방에 있던 카메라로 화제를 돌렸다.

“지난번에 찍은 사진, 블로그에 올렸어?”

나는 블로그를 열어 보여주었다. 그녀는 내가 지난번 옥상에서 찍은 사진을 [풀떼기가 아무리 예뻐도 사람이 낫지]라는 캡션과 함께 업로드해 둔 게시물을 보자마자 킥킥 웃더니 한참 사진들을 넘겨 보며 말했다.

“좋다. 다 추억이야. 나는 ‘추억’이라는 단어를 좋아해. 옛날부터 그 단어를 좋아해서 정말 많이 달고 살았어.”

“‘추억’은 예쁜 단어야. 나도 좋아했었지.”

“왜 과거형이야? 지금은 좋아하지 않아?”

“보통의 사람들은 생각보다 과거를 추억하는 것에 대해서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아. 추억은 추억일 뿐이고 추억은 아무런 힘도 없다고 말하면서 과거에 연연하지 않는 쿨한 사람이고 싶어 해. 그러면서 동시에 미래를 준비하는 부지런한 사람처럼 보이려 하지. 이쯤 되면 너무 주변 눈치를 많이 보는 것 같아 보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추억’이라는 단어가 포함된 말을 자주 하는 사람을 마치 현재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것처럼 여기는 것 같지 않아?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나도 그들처럼 ‘추억’이라는 말을 잘 안 쓰게 되었어.”

그녀는 내 말을 듣고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되물었다.

“‘심심해’, ‘불안해’라는 말을 의식적으로 안 쓰려고 하는 것처럼?”

그 말에 피식 웃음이 터졌다.

“심심하고 불안한 게 어때서?”

“그 말들을 쓰다 보면 진짜로 심심하고 불안한 사람이 되어버릴까 봐서. 의도적으로 안 쓰는 거지. 네가 ‘추억’이라는 말을 자주 쓰면 과거에 매여있는 사람으로 보일까 봐 일부러 안 쓰는 것처럼.

“그래도 ‘심심하다’, ‘불안하다’라는 말은 자주 하잖아. ‘추억한다’는 말을 실제로 쓰는 건 거의 못 봤어. 좀 오글거린다고 해야 하나.”

“단어도 너무 안 쓰다 보면 흐릿하고 어색해지는 거 알아?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이름을 부르려니 어색한 것처럼. 그러다 보니 요샌 우연히 그 단어를 만나면 읽는 소리나 단어의 생김새가 아주 낯설게 느껴져. 마치 언젠가는 아무도 안 쓰게 돼서 사라져 버릴 것 같은.. 그런 거 알아?”

“나도 알아. 음.. <구둣방> 같은 거지?”

“뭐라는 거야!”

그녀는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며 낄낄 웃었다. 생각보다 그녀를 웃기는 것은 쉬운 편이었다.

“요즘 안 쓰는 단어인데 어릴 때 동화책에서는 자주 본 단어를 떠올려보니 구둣방이 생각나네. 동화책에서 많이 봤잖아. <구둣방 할아버지>, <구둣방 소녀> 등등. 그런데 요즘에는 그 단어를 거의 쓰지 않잖아. 그러다 보니 가끔 ‘구둣방, 구둣방’ 소리 내서 읽어보면 되게 낯설게 느껴져. 모양도 이상해. 받침이 잘못 쓰인 것처럼.”

“구둣방이라, 정말 오랜만에 듣는 단어긴 하네. 어릴 때 책에 많이 나왔었는데. 나는 단어의 발음이 맛있어서 좋아했던 것들이 있어. <감자>, <고독> 이런 것들”

“발음이 맛있다고? 진짜 이상한 소리 같은데 뭔지 알 것 같아.”

“알 것 같다고? 이걸 알 것 같다는 어른이 있다는 게 나는 더 신기해!”

우리는 남들이 들으면 도통 무슨 소리인지 모를 이야기들을 계속했다. 어린아이가 얘기하면 어른들이 그냥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귀엽구나’하고 들어줄 법한 이야기들, 머릿속에만 있던 알쏭달쏭한 이야기들이 서로의 앞에서는 거리낌 없이 나왔다.  

“추억이라는 단어를 여전히 좋아하지만 나는 늘 현재를 살아. 미래를 계획하는 것도 과거를 추억하는 것도 모두 내가 너무나 잘하는 짓이지만 그래도 늘 현재를 가장 잘 살고 싶어.”

“넌 여름에 진심이고 순간을 놓치지 않는 여름이니까.”

내 말에 여름은 또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그래, 어찌 보면 당장에 즐기려는 마음을 합리화하기 위한 변명같이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오늘 가장 행복하고 싶어. 미래에는, 빠르면 몇 달 후에는 남이 되어 버릴 사람들이라도 현재 내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최대한 많은 애정을 주고 싶고 언젠가는 끝나 버릴 감정이라도 지금 내 마음이 불타오르면 불타도록 두고 싶어. 행복한 현재는 곧 행복했던 과거가 될 내 추억거리이고 행복하길 꿈꿨던 내 미래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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