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어의 시작은 문법이 아니라 용기

“¿Qué es esto?” 이게 뭐예요?

by 데보라

사람들이 외국어를 처음 시작할 때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이 있다.

“문법부터 배우는 게 좋을까, 회화부터 하는 게 좋을까?”

나는 단호하게 말한다. 문법보다는 ‘무조건 말하기’다. 외국어 앞에서는 아기가 되는 게 답이다.




2009년, 스페인어를 처음 배우기 시작했다. 동경하던 언어라 설렘이 가득했지만, 막상 학원 수업에 들어가니 문법 설명뿐이었다. 나는 여행지에서 자유롭게 대화하고 새로운 문화를 마주하는 장면을 상상했는데, 그 앞에 놓인 건 끝없는 문법 규칙과 동사 변화였다. 'ser', 'estar' 동사 변화표를 시작으로 1인칭, 2인칭, 3인칭… 외우고 또 외웠지만, 그 과정은 몹시 지루했다.


다음 해, 교환학생으로 페루에 가게 되었다. 하지만 문법만 배운 내가 갑자기 말문이 트일 리는 없었다. 낯선 사람들의 친절한 말에도 내 눈은 갈 곳을 잃고, 입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들의 웃음소리와 노랫소리가 마치 다른 세상의 소리처럼 멀게 느껴졌다.


그때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말은 단 하나.

“¿Qué es esto?” (이게 뭐예요?)

돌이켜보면 그게 시작이었다.

나는 여기서 살아남기 위해 배워야 한다는 절박함을 느꼈다. 말을 배우는 세 살 아이처럼 온갖 것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사람들에게 물었다. 처음엔 좀 민망했지만, 현지 친구들은 친절하게 답해주고는 했다. 그 순간만큼은 ‘그래, 이렇게 배우면 되지’라는 용기가 샘솟았다. 그렇게 "이게 뭐예요?"를 끝없이 외치며 나는 조금씩, 귀로 입으로 스페인어를 배웠다.


조금 지나고 나서는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모이는 곳에서 그들의 표현을 그대로 따라 했다. 못 알아듣는 말이 더 많았지만, 그냥 알아듣는 척 웃었다. 그리고 뜻도 모르는 말들을 흉내 냈다. 그러 보면 어느 순간 입에 붙었고, 문법책에서는 배울 수 없었던 억양과 리듬이 몸에 쌓여갔다. 생각보다 먼저 입이 움직이고, 귀가 반응했다.


그때 깨달았다. 나는 스페인어를 ‘공부’하는 게 아니라, 그냥 살아내고 있었다.


언어는 이제 책상에 앉아 외우는 과목이 아니었다. 학교 수업이 끝나고 핫도그를 먹으며 현지 친구들과 주말 계획을 짜고, 하숙집 주인에게 현지 음식을 배웠다. 때로는 외국인 친구들에게 부침개, 떡볶이를 만들어주며 한국의 맛을 전파하기도 했다. 살사 수업을 들으며 나는 춤에는 소질이 없지만, 나와 비슷한 '몸치'가 중남미 사람들에게도 꽤 많다는 걸 알게 되며 안도하기도 했다.


내가 배운 언어는 시험을 위한 공부가 아니었다.


중남미 곳곳을 여행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친구를 사귀고, 음식을 먹고, 춤을 추는 삶 그 자체였다. 많이 부족했을지언정, 언어는 단지 그 모든 순간을 온전히 느끼게 해주는 도구였다. 그리고 그 도구에 익숙해지니, 더 많은 것들을 이해하고 말할 수 있게 되면서 더 많은 것들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나에게 언어를 할 수 있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이다. 단순한 시험을 보기 위한 것이 아닌, 사람들과 새로운 문화를 만나고,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가는 도구.


이미 언어로 여태까지의 많은 모험을 해 왔지만, 앞으로 펼쳐질 모험이 아직까지도 기대되는 이유이다. 그리고 아예 모르는 것을 내 것으로 만들며 세계를 확장한 10여년의 세월을 보냈기 때문에, 잘 할 수 있으리라는 깊은 믿음이 내게는 있다. 그리고 누구라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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