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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수아 Feb 13. 2022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만들기 도전기

20220213 딸들과의 일상

현관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달짝지근한 냄새가 코를 비빈다. 숨을 한번 크게 들이켜고 중문을 열었다.

음. 방문이 열린 두 아이의 방은 언제나 그렇듯 난장판. 이제 복도를 지나 거실이 보인다. 거실은 뭐 그럭저럭.. 자, 이제 시선을 돌리면 부엌이다. 두려움이 앞서지만 차분한 남편의 음성이 나를 진정시킨다.


"어 왔어? 애들 아직 다 안 끝났어."

"아직도?"

내가 오전에 집을 나선 이후 지금은 오후 5시 30분.

장장 6시간을 넘는 초콜릿 만들기가 아직 끝이 안 났다니 부엌으로 내 시선을 두기 전 난 두 눈을 질끈 감는다.


세 모녀의 첫 초콜릿 클래스

먼저 초콜렛 안을 채울 가나슈를 만든다.
탬퍼링이 잘 된 윤기 자르르한 모습!

이 모든 시작은 단골 카페 사장님과의 오랜 약속에서 비롯되었다.

딸들에게 남다른 애정을 보내주시던 사장님께서 지난 연말 초콜릿 클래스를 제안하셨고 설 연휴 전 기대 가득한 설렘으로 나와 딸들은 원데이 클래스에 참석했다.

오래 길이 든 것 같은 사장님의 프로페셔널 느낌 가득한 도구에 탬퍼링, 가나슈, 초콜릿 몰드, 중탕, 필링, 슈가 전사지, 오렌지향 코냑, 등등 생소한 초콜릿 관련 용어들이 난무한다. 두 대의 휴대용 가스레인지에 먼저 가나슈로 쓸 화이트, 밀크, 다크, 말차를 온도계와 스파츌라를 같이 한 손에 들고 신중하게 녹인 후 짤 주머니에 각가 넣어 실외에 두고  수제 초콜릿의 화룡점정인 '초콜릿 탬퍼링'을 배웠다.

‘탬퍼링’은 초콜릿의 완성도를 판가름 내는 세심한 작업으로 초콜릿 겉면의 반짝반짝한 윤기와 쉽게 녹지 않고 따뜻한 손과 입안의 온기에 녹는 '초콜릿'의 매력을 완성하는 작업이다.

안정적인 결정을 만들기 위해 우선 초콜릿을 완전히 녹인 후 그 반 정도의 온도로 낮춰 윤기가 돌면 다시 빠른 시간 안에 천천히 온도를 조금만 높여 안정적 상태를 만든다. 이때 몰드에 액체 상태인 초콜릿을 붓거나 모양을 만들면 매끈하고 윤기가 자르르 돌며 반짝반짝한 오래 보관이 가능한 초콜릿이 된다.

무려 10년 넘게 다양한 초콜릿 선생님들의 강의를 섭렵하시며 쌓아온 노하우를 아낌없이 가르쳐 주시는 사장님의 열성에 우린 집중력 높은 학생의 자세로 보답했다.


원래 이 클래스에 가장 공을 들였던 큰아이보다 둘째 아이가 꼼꼼한 손놀림으로 사장님의 칭찬을 받았고 집중한 만큼 향긋하고 반짝한 결과물로 답을 하는 초콜릿은 최고의 보람이었다.

어찌나 열심히 만들었는지 반나절이 넘는 시간 동안 난방도 켜지 않은 카페에서 우리 셋은 엉덩이 붙일 새도 없이 중탕하고, 탬퍼링 초콜릿에 가나슈를 짜고 굳히고, 스크래퍼로 긁어내고 털어내며 완벽한 결정체로 떨어져 나오는 그 자태에 힘든 줄을 몰랐다. 장장 6시간이 넘는 원데이 클래스에 , 재료, 포장비, 도구, 장소 제공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신 사장님의 수고에 응답하듯 9구 상자 4개를 꽉 채우고 만족감으로 벅차 있는 우리에게 사장님은 남은 초콜릿 재료와 필수 도구를 나눠주시며 꼭 집에서 한 번 더 연습해서 '나만의 초콜릿 만들기'를 몸에 익히길 당부하셨다.


모솔이지만

밸런타인 초콜릿은 만들고 싶다며..


연인들의 날이자 달달 구리 스위트가 넘쳐나는 이름하여 '밸런타인데이'가 닥쳐오자 디데이를 잡은 딸들.

모두가 있는 남자 친구가 왜 너와 나는 없냐며 중학생 동생 고등학생 언니가 서로 디스 하는 현실 자매.

줄 사람도 없지만 초콜릿 만들기가 너무 재밌어서 남은 재료를 썩힐 수 없다며 전날 저녁부터 온갖 재료를 꺼내놓고 벼르더니 엄마가 바쁜 주일 아침, 아무 걱정 말고 성당 잘 다녀오라며 나를 등 떠밀고 부엌을 차지한 녀석들은 얼굴을 맞닥드리고 보니 몹시고 피곤하고 지쳤으며 의기소침해 보였다.


" 너네 싸웠어? 왜 표정들이 그래?"

"....'

" 오! 엄마는 폭탄 맞은 부엌 생각하고 왔는데 상상보다 나쁘지 않은 걸? 우리 딸들 많이 컸네~

치우면서 만들었어 오오..."

".. 그래서 힘들었어.. 그리고 우리가 좀 더 친했으면 손절했을 거야. 초콜릿은 혼자서 만들어야 하는 건가 봐"

아마도 사장님이 선생님으로 클래스를 하셨던 지난번에 비해 서로 '내가 맞다, 네가 맞다, 이건 이렇다, 이건 저렇다 하며 의견이 충돌하고 조율하다 보니 시간은 더 걸리고 결과물은 전보다 신통치 않고 맘은 상하고 그랬던 듯하다. (ㅎㅎㅎㅎ) 그러는 와중에 엄마한테 혼날까 봐 번갈아 설거지를 해가며 하고 싶은 초콜릿 만들기에 끼어들려니 언니와 동생 간의 권력구조도 작용하고 억울한 누군가도 생기며 에피소드가 많았겠지 후후후

샐쭉하고 의기소침했던 두 녀석의 짧은 냉전은 부엌을 치워주기로 한 엄마의 지원으로 금방 화해 무드로 돌입 다시 음악을 흥얼거리며 마지막 탬퍼링에 속도를 붙이더라는..


과정을 즐기는 딸들, 인정!


한 뱃속에 나왔지만 너무 다른 두 딸은 성격도 외모도 식성도 같은 게 하나도 없지만

딱 하나. 어떤 일이든 과정을 즐겁게 해내는 요령을 안다.

지구력이 좋고 무던하거나 둔한 면도 있는 큰 아이는 요철이 없는 잔잔한 즐거움의 지속을 즐기는 편이고 무엇이든 처음부터 파이팅이 넘치는 둘째는 쉽게 지치지만 끝마무리에는 정신을 차리고  마무리를 꼭 해내며 다 좋았다고 스스로를 위안하는 신기한 능력을 지녔다.

두 번의 초콜릿 만들기는 두 아이에게 결코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것을 쉽고 즐겁게 했던 첫 경험과

다시 해보니 역시 만만치 않은 작업이니 함부로 덤빌 것은 아니라는 교훈을 남긴 것 같다.

그러나 과정 내내 음악과 수다와 협동이 오간 그 반나절의 과정은 두 아이에게 잊지 못할 밸런타인데이의 기억을 만들어 냄은 충분하다.

그리고 나의 부엌은 당분간, 아마도 내년까지는 다시 초콜릿 폭탄 세례로부터 안전할 것이다. 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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