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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볼파란 Nov 30. 2017

20. '러빙 빈센트'

나의 고흐 이야기

반 고흐를 만나다

고흐를 좋아하기 시작한 건 고등학교 1학년 무렵이었다. 고등학교 미술 선생은 얼굴이 잘 생긴 총각 선생님이었다. 하얀 피부에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항상 단정하게 하얀색 와이셔츠를 양복바지에 넣어서 입었다. 얼핏 봐선 미술 전공한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다. 성격은 까칠했지만 당연히 여학교였던지라 인기가 많았다. 어느 날 운동장에서 미술 수업을 하던 도중 계단에 앉아있는 나한테 던진 한 마디 때문에 잠시나마 가졌던 연모의 정을 뗄 수 있었다. "넌 다리도 안 예쁘면서 뭘 그렇게 요염하게 앉아있냐?" 지금은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때만 해도 남자 선생들의 성희롱 발언들이 난무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이 글은 여고 시절 겪었던 변태 선생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쯤에서 그만두자. 나는 그 후로 문학 선생님만 좋아하기도 벅찼으므로 미술 선생 따위야 어찌 되든 내 알바 아니다. 더군다나 그 후로 미술 선생은 교생으로 온 가사 선생과 결혼까지 골인하게 되어 인기가 급락했다. 가사 선생이 암만 봐도 예쁘지가 않아서 아이들의 실망감이 더 컸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어쩐지 통쾌했다. '다리 예쁜 것 찾더니... 고작...'


암튼, 그 미술 선생이 미술 시간에 발표 수업을 시켰다. 조를 나눠 미술사조와 유명한 화가들을 칠판에 쓰고 가위바위보로 선택하게 했다. 내 기억이 맞다면 나는 왕따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인기가 있거나 힘이 있던 타입도 아니었다.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주위의 몇몇과 친하게 지내는 타입이었다. 반에 한 두 명과는 친해지게 마련이었는데 어쩐 일인지 그 당시에는 친한 애들이 없었다. 조를 자유롭게 짜는 분위기에 나는 낄 곳이 없었다. 그렇다고 딱히 서러울 것도 없이 남은 애들끼리 한 조가 되었다. 뭐, 남은 애들이다 보니 은근히 따돌림을 받던 아이와 반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던 몇몇이었다. 그제야 다들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너는 왜 거기 껴있니?라는 눈빛이었다. 


나는 그 조에서 자연스럽게 조장이 되었고 나가서 당당하게 '반 고흐'를 골랐다. 고른 이유는 딱히 없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이니 인상파니 하는 미술 사조나 다른 화가들 보다는 그래도 한 번이라도 더 들어본 반 고흐가 나을 것 같았다. 반 고흐를 골라 들고 와서 자리에 앉으니 우리 조 아이들의 눈빛이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도서관에 가서 종일 자료를 찾고 자료를 복사했다. 내 성격상 다른 조에 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그야말로 자기주도적 학습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시대를 나누고 반 고흐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에게 할 수 있는 분량을 나눠줬지만 어려워하고 해오지 않아서 나중에는 나 혼자 거의 다 조사하고 발표 자료를 준비했다. 복사한 양이 어마어마해서 나는 고등학교 발표 수업이 아니라 마치 대학 논문을 쓰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었다. 쉽게 할 수 있는 일도 일을 만들어서 하는 편이다. 그래서 이득을 본 기억은 이 미술 발표 수업과 중학교 방학 숙제 중 영어 과제를 사전 분량으로 해가서 상을 받았을 때 딱 두 번이었다. 하지만 발표는 성공적이었고 까칠한 미술 선생은 칭찬을 했다. 이때의 경험이 큰 자산이 되었는지 대학에 가서 발표 수업에 A+을 받았다. 교수는 발표한 사람 중 유일하게 대본을 보지 않고 자연스럽게 발표를 잘했다고 칭찬했다. 그때 나는 알았다. 내가 실전에 강하고 남 앞에 나서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미술 발표 수업은 작은 별 하나를 내게 주었다. 




영화, 러빙 빈센트


반 고흐에 대한 유화 애니메이션이 나왔다는 소식은 이미 알고 있었다. 보러 가야지 하면서도 우리 동네 CGV에서는 하지 않아서 추운 날씨에 이불속에서 나오기가 힘들었다. 영화의 다양성은 왜 보장되지 못하는가 투덜대며 그나마 영화관에서 아예 내리기 전에 큰 맘먹고 집을 나섰다. 오후 1시 영화라 시간이 없는데도 나는 자꾸만 꾸물거리고 밥까지 배불리 먹었다. 그게 탈이었다. 밥을 잔뜩 먹고 시간에 딱 맞춰 들어간 따뜻한 영화관에서 식곤증에 머리가 상모 돌리기를 했다. 심지어 메가박스 부티끄라 일반 상영관보다 값도 더 비싼데 내가 잠이나 잘 때냔 말이다!


이렇게 주절주절 쓰면서도 솔직히 말하자면 '러빙 빈센트'의 중반부터 상모 돌리기 하느라 내용이 띄엄띄엄 기억된다. 극장 가서 잔 적은 없는데 이게 무슨 망신살인가. 하지만 영화는 빈센트에 관련한 어떤 영화보다 황홀하고 멋졌다. 진짜다. 내가 아무리 조느라 띄엄띄엄 봤지만 영화의 기법과 제작 과정에는 감탄이 절로 든다. 


기획부터 만드는데 10여 년이 걸리고 반 고흐의 유화 기법으로 만드느라 100명이 넘는 화가들이 참여했다. 화면 비율은 요즘의 와이드 화면이 아니라 4:3 비율이다. 배우들이 연기를 하면 그 위에 화가들이 유화로 입혔다. 화면 가득히 반 고흐의 붓 터치가 살아 움직인다. 탕기 영감이나 가셰 박사 등이 작품 속에서 살아 나온 것 같다. 작품 속에서만 보던 인물들이 살아 나와 이야기를 하고 움직이는 장면들은 보기만 해도 황홀하다. 빈센트 반 고흐를 좋아하는 이들에겐 선물 같은 영화가 될 것이다. (그러면서 잠은 왜 잤니!)


배우들의 연기
배우 위에 유화를 덧입히는 작업을 한다
화가들의 작업
화가들의 작업(와와!)


작업이 결코 쉽지 않았던 이 작품은 화면 가득 반 고흐의 작품뿐 아니라 스토리도 흥미롭다. 빈센트가 죽은 지 1년 후에 아르망을 통해 빈센트의 죽음을 파헤쳐나가는 미스터리를 표방하고 있다.(응? 미스터리인데 잤니? 잠이 오니?) 

언젠가는 내 작품을 선보이고 싶다. 이 보잘것없고 별 볼 일 없는 내가 마음에 품은 것들을


예술이란 무엇일까.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데 죽어서야 자신의 작품이 인정받고 그 이름을 영원히 남길 수 있게 된 것을 고흐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살아서는 보잘것없고 별 볼 일 없어 괴롭고 절망스러웠던 그의 뒷모습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내가 좋아하는 그림

네덜란드 반 고흐 미술관에 가서 그의 그림을 볼 기회가 있었다. 2002년에 처음으로 갔던 배낭여행이었고 첫 해외여행이었다. 실제로 본 그의 작품은 숱하게 화면으로 보던 것과는 천지차이였다. 생명력을 갖고 요동치는 붓 터치는 황홀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좋았던 그림은 '까마귀가 나는 밀밭'이었다. 1890년 7월에 그려진 이 그림은 고흐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유독 붓의 터치가 강렬하다. 본 순간 숨이 턱 막힐 정도였다. 환각이 일어나 밀밭에 바람이 불고 까마귀가 그림 밖으로 날아오를 것 같다. 하늘이 어둡게 깔린 황금빛 밀밭 위로 불길하게 까마귀가 날고 있다. 밀밭 사이로 구불한 길이 나있다. 절망스럽고 고독했던 그는 죽음 이후에 어떤 길로 나가고 싶었을까. 밀밭 저 너머에 무엇이 있었던 것일까. 


'까마귀가 나는 밀밭'


좋아하는 또 다른 그림은 '별이 빛나는 밤에'다. 별이 빛나는 항구 아래로 숨어 있는 한 쌍의 남녀 모습이 나를 사로잡았다. 내 멋대로 낭만적인 상상을 덧입혀 여기저기 프로필 사진으로도 많이 사용했고 한 때는 모작을 해보려고 노력도 했었다.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에'


고흐가 많이 그렸던 아몬드 나무는 처음부터 좋아했던 건 아니었다. 한참 전에 죽은 큰 외삼촌 때문이었다. 삶이 고통스러워서 고독하고 힘들게 살다가 절망스러운 선택을 한 삼촌은 마치 고흐처럼 살다가 갔다. 외삼촌의 죽음은 느닷없고 힘겨웠다. 엄마는 덤덤했는데 그게 더 가슴 아팠다. 큰 외삼촌은 엄마 바로 밑 동생이었고 젊어서 농사일을 돕다가 다리를 크게 다쳐 젊은 시절 내내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한쪽 다리는 성치 않게 되었지만 나는 큰삼촌을 가장 좋아했다. 어려서 시골에 내려가면 늘 나를 붙잡고 차근차근 재미난 이야기들을 많이 들려주었다. 크게 화를 내는 법도 없고 성품이 온화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젊어서는 성치 않은 다리 때문에 힘들었고 나이가 들어서는 결혼 생활 때문에 힘들었다. 큰 그릇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제대로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해보고 갔다. 어쩐지 삼촌의 죽음이 너무 억울해서 엄마가 떼어낼까지 영정 앞에서 엉엉 울어댔다. 


화장을 하고 돌아와서 고흐의 '아몬드 나무'가 생각났다. 찾아보고서 밝은 블루빛의 배경에 구불구불 온화하게 뻗어 나온 아몬드 나무가 삼촌 같아서 다시 엉엉 울었다. 아몬드 나무에 꽃이 피어 있어서 이 그림을 예쁘게 액자에 넣어서 납골당에 가져가야지 생각했었다. 그 뒤로 고흐의 아몬드 그림은 내겐 늘 큰 외삼촌을 떠올리게 한다. 


'아몬드 나무'



빈센트 반 고흐는 여러 가지로 내 삶에 깊숙이 들어왔던 화가였다. 처음으로 좋아한 화가였고 그의 수많은 그림은 내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조용한 위로를 주었다.


'Loving Vinc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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