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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볼파란 Jan 01. 2018

21. 패터슨.

일상이 시(詩)가 되는 마법 같은 순간


영화 '패터슨'을 보았다. 패터슨 시에 사는 패터슨이다. 패터슨은 패터슨 시에서 23번 버스를 운행하는 버스기사다. 그리고 시(詩)를 쓴다. 아담하고 아늑한 집에는 사랑하는 아내 로라와 잉글리시 불독 마빈이 있다. 로라는 패턴에 강박증이 있지만 예술적이고 무엇보다 패터슨의 시를 사랑한다. 쿠키 굽는 것을 좋아하고 비싸게 주고 산 기타로 연주를 한다. 개 마빈은 저녁마다 패터슨과 산책하는 것을 좋아하고 패터슨이 바에 들려 맥주 한 잔 할 때 늘 밖에서 얌전히 기다려준다. 집 앞 우체통을 망가뜨리곤 하지만 그 외엔 항상 의자에 누워있다.


수컷으로 설정된 마빈은 사실 암컷이었고 영화를 찍고선 암으로 죽었다. 마빈의 명복을 빈다.
패턴 강박증의 끝을 보여주던 이 장면! 와우!

패터슨의 집 인테리어는 작은 것 하나까지 신경 쓴 티가 많이 난다. 아내인 로라의 패턴에 대한 사랑을 알 수 있는데 뜻밖에도 로라가 신고 있는 거실용 슬리퍼는 삼디다스 아닌가? 맙소사!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패터슨의 일주일을 들여다보는 이 영화는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이 어떻게 시가 되는지 그 마법 같은 시간들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얼핏 보면 매일 똑같은 일상이지만 패터슨은 그가 느끼는 감정들을 매일 적어간다. 차고지에서 차를 빼기 전에 혹은 집에 돌아와 지하실에서 시를 쓴다. 중요한 것은 매일마다 꾸준히 적는다. 그 성실함은 어떻게 일상이 마법이 되는지 보여준다. 그는 아날로그 인간이다. 핸드폰을 갖고 있지 않으며 시 또한 작은 노트에 빼곡하게 적어갈 뿐이다. 아침엔 시리얼을 먹고 점심엔 로라가 챙겨주는 도시락을 먹고 저녁엔 맥주 한 잔으로 마무리하는 그의 삶은 도시에 있지만 마치 헨리 소로의 '월든'같은 삶이다. 물론 그렇다고 다 똑같진 않다. 버스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달라지고 단골 바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달라진다.


패터슨의 저 도시락 케이스는 SNS에서 갖고 싶다는 사람들의 아우성이 있었다고 한다.


영화가 주는 미덕은 분명하다. 지루하고 따분한 삶에도 마법 같은 순간은 존재하고 그 반짝이는 순간들이 모여서 시가 된다는 것. 일상의 특별하게 반짝이는 순간들을 모아놓은 영화였다. 감정 표현이 풍부하지도 않고 아내 로라에게도 싫은 소리 하나 못하는 패터슨은 어쩌면 시를 통해 그의 내면을 고스란히 쏟아 놓고 있었을지 모르겠다. 영화는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지치거나 출퇴근길에 힘든 직장인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영화였다. 아무나 시를 쓸 수는 없지만 누구나 반짝이는 특별한 순간들은 잡아낼 수 있을 것이다. 좋아하는 따뜻한 차를 앞에 두고 책을 읽는 순간, 어느 순간 올려다본 하늘에 반짝이던 별들, 뽀송뽀송하게 빨래를 말릴 수 있을 것 같은 날씨에 손을 올려 바라보던 눈부신 햇빛, 자신을 온전히 믿고 몸을 맡기는 강아지나 고양이의 털을 쓰다듬을 때, 사랑하는 이의 손을 잡고 체온을 나누던 순간 같은 것 말이다. 그런 순간을 잡고 기록하는 일을 모두 멈추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것이 시가 되든 다른 언어가 되든 상관없다. 우리 모두 예술가가 되라던 김영하 작가의 말을 일부러 꺼내지 않더라도 우리 모두는 우리 삶을 이미 충만하게 살아내고 있다.


패터슨을 보고서야 글쓰기에 대한 끝없는 욕구의 이유를 알게 되었다. 글쓰기는 별 것 아니다. 거창하게 소설을 쓰거나 시를 쓰는 일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일상을 적어나가는 일기나 에세이, 혹은 아무 말 대잔치가 되어버리는 트위터의 타임라인이나 모든 SNS에 쓰는 글들도 이 글쓰기에 해당된다. 내가 브런치를 하는 이유도 그런 것이리라. 나는 끝없이 기록하며 나의 모든 순간들을 잡고 싶다.


마지막에 나타타 현자처럼 패터슨에게 빈 노트를 선물한 일본 시인


그러니 부디 일상의 소소한 순간들을 기록하는 일을 멈추지 않기를 바란다. 소소한 행복들이 모이면 꿈이 이뤄질지도 모른다. 마지막에 나타나 패터슨에게 빈 노트를 선물한 일본 시인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때론 빈 페이지가 가장 많은 가능성을 선사하죠.


우리가 살아갈 날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으나 그 빈 페이지들마다 어떤 글을 적어나갈지는 적어도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이라는 거친 파도 앞에서 일희일비하지 않고 덤덤하게 일상을 살아가며 성실하고 근면한 기록의 날들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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