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여행 10
2017년 10월 13일 금요일
마지막 날은 하늘이 잔뜩 흐렸다. 오늘은 아사쿠사 관광만 하고 바로 공항으로 떠날 거라 느긋하게 일어났다. 느긋하다고 해도 아침 7시가 넘으니 저절로 눈이 떠졌다. 아, 여행지에서 느지막이 일어나 이불에서 뒹굴거리다가 눈곱도 안 떼고 내려가 조식을 먹는 게 내 로망인데 눈은 왜 이렇게 일찍 떠지는 걸까. 그래도 할 수 있는 만큼 뒹굴거리다가 8시가 넘어서야 씻고 조식을 먹으러 내려갔다. (결국 씻었다. 지금은 세수도 안 하고 동네 커피숍이니 마트에도 잘만 다니는 엄청 게으르고 더러운 사람인데 여행만 가면 부지런해지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창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우산을 쓰고 있다. 흐린 날씨에 비까지 오나보다. 비가 오고 몸도 힘들어서 할 수 있다면 그냥 호텔에 머무르고 싶지만 오전 10시에 체크아웃을 하고 짐만 맡긴 채 거리로 나선다. 비가 꽤 많이 오고 심지어 춥다! 그렇게 덥더니 이젠 춥다. 숙소에서 멀지 않은 센소지로 천천히 걸어간다. 가는 길에 남들은 다 보고 간다는 아사히 빌딩의 황금똥(?)을 보려고 했으나 이런! 공사 중인지 천막으로 가려놓고 심지어 하늘에 먹구름까지 잔뜩 끼어서 전혀 보이질 않았다. 그래, 다음을 위해 이런 건 남겨놓자. 다음에 보자. 황금 똥덩어리.
궂은 날씨에도 사람들이 많다. 거리에서는 못 만났던 사람들이 죄다 이곳에 와있다. 한국 사람들도 많고 백인들도 많고 견학 온 일본 학생들도 많다. 센소지는 붉은색 제등이 있는 입구 가미나리몬으로 시작한다. 가미나리몬의 오른쪽은 풍신, 왼쪽은 뇌신을 모시고 있다. 모두 풍년과 태평 연월을 주관하는 신이다. 대부분은 이곳에서 사진을 많이 찍는다. 아사쿠사라고 치면 수없이 나오는 붉은색 제등이 이곳이다.
가미나리몬을 지나면 나카미세 도리라는 상점 거리가 나온다. 이 길엔 언제나 사람들로 넘쳐난다. 먹거리, 기념품 등 아기자기한 상점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사지 않겠다는 결심은 무너지고 엄마의 부채와 내 가방을 여기서 사버렸다. 내 마음에 쏙 드는 튼튼하고 귀여운 도트백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일본을 상징하는 여러 가지 캐릭터들이 패턴으로 그려져 있었는데 그중에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후지산 패턴을 골랐다. 지금도 그 가방은 잘 쓰고 있다. 호텔 조식을 든든히 먹고 온 데다가 후식으로 아사쿠사 녹차 아이스크림을 먹을 거라 블로그 후기들에 있는 맛집들은 다 패스했다. 게다가 대부분은 안 먹어도 맛을 알 것 같은 먹거리들이었다.
상점들을 지나면 그 끝에 호조몬이 서있다. 호조몬을 지나면 관음상이 안치되어 있는 본당, 석가모니의 사리가 안치되어 있는 5층 석탑, 센소지 창건 관련 인물들을 모시는 아사쿠사 신사로 나뉘어있다. 센소지는 서기 628년에 어부 형제가 관음상을 주워 안치한 것으로 시작했다. 이후 1950년대에 재건축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호조몬엔 거대한 짚신이 걸려 있다. 이 짚신은 10년마다 장인 8명이 모여서 한 달에 걸쳐 만드는 것으로 거인이 이 짚신을 신고 지켜준다는 미신이 있다. 사람들은 본당으로 가기 전에 물로 정결하게 손을 씻고 아픈 몸을 정화시켜 준다는 연기를 쐬이고 들어간다. 본당에 놓여있는 커다란 시주함에 돈을 넣고 서서 기도를 한다. 사실 나는 일본 신사에 오면 재미가 없다. 어떤 감흥도 없고 물로 씻거나 연기를 쐬지도 않고 점괘를 보지도 않고 부적을 사지도 않는다. 내가 주로 보는 건 건축과 자연 등인데 여긴 그런 것도 없다. 건축미도 느낄 수 없고 자연은 더군다나 없다. 그래도 본당의 시주함에는 기도 대신 동전 몇 개를 던져 넣었다.
세 개의 건물을 돌아보고 나오는 길에 다리 밑에 커다란 잉어 떼를 발견했다. 크기가 크고 하얀 몸에 빨간 무늬가 있다. 비단잉어인가? 잉어들이 사람들만 있으면 입을 뻐끔거리며 입질을 해댔다. 사람들이 서있으면 먹이를 주는 걸 귀신같이 알고 사람만 있으면 입을 벌린다. 징그러운데 나도 모르게 영상을 찍고 있다. 저기에 빠졌다가는 어쩐지 몸이라도 다 뜯겨 먹을 것 같다.
잉어에 쫓기듯 나오고 보니 어디선가 비명 소리가 들린다. 한쪽에 생뚱맞게 자이드롭이 서있다. 흐린 날씨에도 운행을 해서 쉴 새 없이 비명소리가 들린다. 서기 600백 년대에 지어진 절 한쪽에 자이드롭이라니. 신구의 조합인가?
더 이상 비는 오지 않는데 구름은 더 많이 껴있다. 구름이 점점 밑으로 내려와 땅을 집어삼킬 듯 낮게 떠있다. 높은 건물들은 구름 속으로 사라져서 이곳이 땅위인지 하늘 아래인지 잘 모르겠다. 비만 오지 않는다면 습하지 않은 흐린 날이야 말로 내가 좋아하는 날씨다. 날씨까지 선선해져서 다니기는 더 좋았다. 센소지를 돌아보고 나오는데 앞에서 일본인 가족들이 비명을 질러대는 여자 아이 하나를 안고 걸어온다. 조용한 골목 안에 대여섯 살 아이의 비명에 가까운 울음소리로 가득 찼다. 아빠가 안고 옆에서 엄마와 할머니가 오는데 중간에 아이를 내리고 엄마가 조용한 목소리로 타이른다. 아이가 울음을 그치는 듯하다가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다시 울음을 터뜨린다. 엄마는 체념한 듯 걸어가고 아빠는 다시 울부짖는 아이를 안고 터벅터벅 걸어갔다. 왜 나는 일본은 아이들조차 조용하고 차분할 거라고 생각했는지 지금 생각하니 어이가 없다. 아이는 아이일 뿐 만국 공통으로 아이들의 떼는 어디서나 똑같구나.
잔뜩 떼를 쓰며 우는 아이의 비명을 뒤로하고 기분도 전환할 겸 녹차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