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여행 11
2017년 10월 13일 금요일
타박타박 걸어서 녹차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스즈키엔'으로 간다. 가는 길에 관광버스 한 대가 막 출발하려는 참이다. 센소지 상점가에 흩어져 있던 검은색 교복을 입은 일본 학생들이 타고 온 버스다. 앞에 한문으로 쓰여있지만 읽을 줄 모른다. 아마도 어느 학교라는 말 같다. 고등학교 때 경주 불국사 간 일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고등학교 때 경주의 기억은 경주에 있지 않았다. 기억의 전부는 날라리들이 가져온 술, 장기자랑, 댄스 타임 등에 있었다. 한참 후에 다시 경주에 갔을 때에야 오롯이 경주를 다시 보고 왔다. 아마 저 일본 학생들도 오늘의 기억은 아사쿠사에 있지 않을 것이다.
오픈 시간 얼마 되지 않아서 사람들이 없으려니 하고 들어간 스즈키엔은 이미 사람들로 북적인다. 이렇게 흐리고 추운 날에도 아이스크림을 먹겠다고 일찍부터 찾아오는 사람이 나만이 아니어서 반갑다. 스즈키엔의 녹차 아이스크림은 맛의 진함에 따라 7단계로 나뉜다. 제일 진한 7단계도 거뜬할 것 같지만 6단계로 시켰다. 한쪽에 길고 하얀 테이블이 놓여 있다. 의자는 없고 서서 먹는 곳이다. 이미 젊은 중국 여학생들과 일본 아줌마들이 차지하고 있지만 나도 한쪽에 서서 먹었다. 중국 여학생들은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 거울을 들여다보며 꽃단장을 하느라 여념이 없다. 가방에 달려 있는 캐릭터 인형이나 손거울로 얼굴을 들여다 보고 입술을 다시 바르거나 서로 얼굴을 지적하며 까르르 웃는 게 귀엽다.
아이스크림은 쌉싸름한 녹차 맛과 아이스크림이 절묘하게 배합되어 있어 맛있었다. 좀 더 달달한 아이스크림을 원한다면 단계를 낮추면 된다. 난 7단계 먹어도 될 걸 그랬다. 천천히 먹는다고 먹었는데도 다 먹고 나자 입안이 얼얼하다. 목욕탕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것처럼 차가운 아이스크림을 먹었으니 이번엔 따뜻한 커피를 마시러 가야겠다. 사실 센소지를 생각보다 빨리 구경해서 시간이 한참 남는다. 그냥 다시 다이칸야마 츠타야를 한 번 더 가볼까 하다가 그만둔다. 시간에 쫓겨서 다니기 싫다. 차라리 느긋하게 아사쿠사에 남아있는 쪽을 택했다.
커피는 봐 둔 곳이 있다. 아사쿠사 안제라스. 1940년대 문을 연 쇼와시대 풍의 카페다. 첫날에 갔던 카페 드 람브르도 생각나는 곳이다. 직접 만든 케이크와 더치커피가 특히 유명하다. 1층의 구석자리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주문을 한다. 오랜 세월만큼 유명한 예술가들도 이곳을 많이 찾았는데 아톰을 만든 데츠카 오사무도 단골이었다.
젊은 직원은 레스토랑에서나 볼 법한 검은색 양복 조끼까지 입고 서빙을 해준다. 나는 커피와 초콜릿 케이크를 주문했다. 손님이 많지 않고 일하는 사람들끼리 담소를 나누는 소리가 들리지만 신경이 거슬리진 않아서 여행 내내 가방에서 잠자고 있던 책을 꺼내 들었다. 여행에 가져간 책을 읽을 때가 거의 없었는데 이번엔 성공했다.
커피는 부드럽고 케이크는 맛있다. 케이크는 부드러운 편은 아니고 되직하고 묵직한 맛이다. 안제라스의 커피나 케이크는 아주 맛있는 편은 아니다. 안제라스를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건 맛보다는 70년 내공에서 나오는 고전적인 멋스러움과 숨을 내쉬며 편안해질 수 있는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에 있다. 혼자 들어가서 책을 봐도 좋은 공간이다. 여행지에선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를 비상 상황에 늘 긴장하게 마련이다. 낯선 언어와 낯선 공간이 주는 설렘은 있지만 힘든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안제라스는 편안했다. 물 흐르듯이 편안한 분위기가 마치 집 앞 카페에 와서 커피를 마시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혼자 온 사람들이 꽤 많다. 한국 사람은 없고 내 앞에 비즈니스맨으로 보이는 일본 아저씨가 식사를 하고 건너편에는 일본 젊은 남자가 혼자 커피를 마시며 담배를 피운다.
언제까지고 있을 순 없어 안제라스에서 나와 아사쿠사 골목을 걸었다. 우리나라 포장마차 같은 가게들은 이른 시간에도 가게 문을 열고 나와서 어김없이 호객 행위를 한다. 밤에는 이곳도 꽤나 북적이고 화려하겠다. 아침부터 계속 뭔가를 먹고 있어서 밥 생각은 없었지만 일본까지 왔는데 라멘은 꼭 먹고 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다시 먹으러 간다. 내 위장이 탈 나지 않기만 바랄 뿐이다. 라멘도 라멘이지만 교자만두 먹고 싶어서 맛집 '요로이야'에 혹시나 해서 가봤지만 줄이 서있다. 줄이 길진 않지만 라멘을 줄 서서 먹고 싶진 않다. 다행히 '라멘테이'에는 자리가 있다. 라멘테이는 자판기에서 먼저 계산을 해야 하는데 미리 메뉴를 보고 간 게 아니어서 대충 자판기에 있는 작은 사진만 보고 차슈멘을 주문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영어 메뉴판이 자판기에 걸려 있더라.
내가 시킨 차슈멘은 돼지고기와 버섯 등이 올려진 라멘이다. 차슈가 꽤 많이 올려져 있고 맛도 나쁘지 않다. 가게는 일본식 작은 라멘 가게다. 바 테이블에 빙 둘러서 앉아서 먹는다. 바로 앞에서는 주인을 비롯한 몇 명의 직원들이 계속 라멘을 삶아 내고 있다. 직원 한 명이 나를 뚫어지게 쳐다봐서 같이 한참을 쳐다봤다. 내 어디가 신기한 건지, 아니면 첫눈에 반한 건지, 그것도 아니면 누구를 닮아서인지 알 수 없는 눈빛이라 나도 계속 쳐다봐 줬다. 먼저 눈을 피하길래 속으로 외쳤다. '내가 이겼지!'
라멘을 다 먹고 나서도 시간이 남아서 결국 스타벅스에 갔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켰는데 오늘 하루 정말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메뉴 선정이다. 내 옆에 기모노를 곱게 차려입은 여자 두 명이 있어서 처음엔 일본 사람인 줄 알았다. 알고 보니 한국 젊은 여성들이다. 기모노 입은 자기들 모습이 예쁜 걸 알아서 한시라도 카메라를 놓지 않고 셀카를 찍고 있다. 사실 한국 사람들 아니면 나도 몰래 찍고 싶을 정도로 기모노도 예쁘고 얼굴도 예쁘다. 참, 곱다! 맞은편에는 백인 가족들이 앉아 있는데 그중에 십대 소년 하나가 엄청난 미소년이다. 엘프 같은 얼굴과 기럭지라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는데도 마음이 한결 따뜻해졌다.
2시가 넘어가서 호텔에서 짐을 찾고 공항으로 출발했다. 모바일 체크인을 미리 하고 와서 수화물만 부치고 출국 심사 후 면세 코너로 들어왔다. 입구에 있는 로이스는 줄이 엄청나다. 한 가지 팁은 입구에 있는 로이스에서 안 사도 안에 들어가면 또 있다. 여기서 줄 서서 사지 말고 안에 가서 사자. 나는 이 줄 때문에 기분 나쁜 일이 벌어졌다. 일본에서 돈을 아껴서 남은 돈은 가족들 갖다 줄 로이스를 사기로 하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한국 남성들이 우르르 몰려와 새치기를 한다. 내 앞에 중국인 커플이 어리바리 한 사이에 그 앞으로 새치기를 해서 줄을 섰다. 새치기를 한 것도 기분이 나쁜데 한 명은 줄 서있고 다른 사람들은 느긋하게 물건을 고른다. 차라리 멋모르는 젊은 애들 같았으면 그러려니 했을 텐데 30대 남성들이다. 계속 째려보며 새치기 좀 하지 말자고 큰 소리로 말했는데 나를 흘깃 쳐다보고 그걸로 끝이다. 기본적인 매너도 개념도 없는 사람들 정말 싫다.
아시아나는 30분 지연되어 출발했다. 자꾸 내 자리를 넘어오는 옆 좌석 남자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서 잠을 못 잤다. 그런데다 괜히 수화물은 부쳐서 짐 찾는데도 한참 걸려서 완전 녹초가 되었다. 공항에서 나오니 밤 10시가 넘었다. 이 피곤함이라니. 여행 내내 계획한 대로 알차게 여행해서 좋았는데 돌아오는 공항부터 꼬였다.
그때는 힘들어서 다신 비행기 타지 말아야지 했는데 한 동안 떠나지 못할 것을 알아서 이렇게 쓰면서 다시 여행하는 기분이었다. 여행은 세 번 한다. 한 번은 준비하면서 한 번은 떠나서 한 번은 쓰면서.
도쿄, 마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