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여행 09
2017년 10월 12일 목요일
기초조지 역에 다다를 때쯤엔 다시 녹초가 되었다. 허리가 아파서 끊어질 것 같아서 드럭스토어고 뭐고 다 포기하고 그대로 갈까 싶다. 기치조지 역까지 걸어온 것은 드럭스토어에 들러 쇼핑을 하기 위해서이다. 이번 도쿄 여행은 가장 합리적인 소비를 하기 위해 미리 계획하고 준비한 대로 여행을 하고 있다. 내 입으로 계획적이니 합리적이니 하는 말을 써놓은 게 우습지만.
기치조지 OS드럭은 생각했던 것보다 매장이 작다. 처음엔 너무 작아서 그냥 지나칠 뻔했다. 항상 소화불량을 달고 사는 터라 외지에서 약은 절대로 사지 않겠다는 다짐을 깨고 오오타이산과 캬베진을 샀다. 그리고 내가 참 좋아하는 동전파스도 샀다. 발이 아파서 휴족시간도 사려고 했으나 OS드럭에선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는다. 젠장. 다른 곳을 더 둘러볼 여유도 없어서 포기하고 다이칸야마로 향했다.
발도 아프고 짐도 늘어나서 힘들고 츠타야에 가기 전에 요기를 하러 다이칸야마 역에서 가장 가까운 수제버거 집 SASA 에 가기로 했다. 가기로 했는데... 몸이 힘드니 머릿속 네비가 고장이 났는지 구글맵을 보고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가서 한참을 걸었다. 이렇게 먼 거리가 아닐 텐데 왜 끝도 없이 걸어가고 있지? 아뿔싸, 반대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다. 잠깐 동안 다시 돌아갈 엄두가 안 나서 이대로 택시를 잡아타고 숙소로 갈까 생각했다. 알고 보니 SASA는 정말 코앞에 있다. 다이칸야마 역은 넓은 고가 다리로 연결되어 있고 나가는 방향도 많아서 초보자들은 방향을 잘 알고 나가지 않으면 나처럼 된다.
SASA는 마치 미국의 어느 한적한 시골마을에 있는 펍에 들어온 느낌이다. 젊은 여성분들이 서빙을 하고 오픈 주방에서는 쉴 새 없이 수제버거 패티 굽는 냄새가 난다. 손님들도 젊은 층이 대부분이다. 나는 아보카도 버거 스몰과 진저에일을 시켰다. 아보카도 버거는 맛있고 진저에일은 시원하고 달콤했다. 진저에일 안 시켰으면 어쩔 뻔했는지. 배불리 먹고 쉬고 나서야 몸 상태가 좀 나아졌다. 천천히 먹고 천천히 쉬다가 다시 길을 나선다. 다이칸야마는 저녁에 왔지만 분위기가 다른 곳과는 또 다르다. 뭐랄까. 여유가 절로 느껴지는 부촌 느낌이다. 역시 쇼핑할 곳이 지천이다. 물론 이곳에도 자전거 타는 사람들은 꽤 있다. 차들도 자전거를 기다려 주고 자전거도 차들을 기다려 준다. 그러면서도 빵빵 거리는 소리 하나 없다. 일본에 오면 이상하리만큼 고요하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아마 이런 이유 때문이리라.
츠타야는 어느 순간 불쑥 나타났다. 복합 문화공간인 T-Site로 들어가 서점으로 향한다. 낮에 오면 더 좋겠지만 어두워지니 츠타야 서점을 알려주는 간판 네온사인이 하얗게 빛나고 있는데 그게 마음에 든다. 망망대해에서 불빛을 보내주는 등대를 만난 느낌이다. 츠타야 서점은 총 3동으로 나뉘었다. 3동은 서로 구름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1층은 서적을 중심으로 배열되어 있고 카테고리별로 다양한 생활 용품들과 함께 진열되어 있다. 일테면 요리책이 있는 곳에는 식료품들이 배치되어 있는 식이다. 전에 갔던 무지 북스에서 이미 봤던 구성이지만 츠타야는 무지 북스와는 규모부터 다르다. 무지 북스 훨씬 전부터 츠타야는 책뿐만 아니라 개인의 라이프스타일을 설계하는 곳이기도 하다.
각 동의 2층에는 또 다른 세상이 열린다. 각각 음악과 영화로 컬렉션을 이루는데 영화는 세상의 모든 DVD를 모아놓기라도 한 듯 어마어마한 DVD가 진열되어 있다. 음악은 종류별로 음반들이 진열되어 있다. 각 카테고리별로 앉아서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공간도 있다. 츠타야에서 조금 놀랐던 것은 구성이나 배열이 철저하게 고객에게 맞춰져 있다는 것이다. 앉아서 쉴 공간이 참 많았는데 언제 어디서든지 앉아서 책을 읽고 음악을 들을 수 있다. 오픈된 공간에도 앉을 곳이 많았지만 곳곳에 완벽한 프라이버시를 보장받으며 1인 혹은 2인 정도만 앉아서 쉴 수 있는 곳들도 많다. 나는 음악 코너에서 음반을 감상하며 앉아서 한참을 쉬었다. 어쩌다 보니 클래식 음악이었는데 차라리 잘 된 셈이다. 한결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츠타야에 오니 자연스럽게 우리나라 대형 서점들이 떠올랐는데 그중에서도 자주 가는 교보문고가 생각날 수 밖에 없다. 교보는 리뉴얼했지만 공간 구성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 갈 때마다 앉아서 책을 볼 수 있는 공간이랍시고 중앙에 커다란 원목 테이블이 놓여져 있는데 나는 그게 싫다. 단 한 번도 자리가 난 걸 본 적이 없는데 볼 때마다 사람들의 까만 머리로 가득 찬 모습은 가슴이 턱 막히는 느낌이 든다.(한 번도 자리에 못 앉아봐서 그럴 수도 있겠다.ㅎㅎ) 차라리 공간 구성은 합정에 있는 교보문고가 나아 보인다. 이건 뭐, 순전히 내 생각이다. 하지만 츠타야에 오니 그 아쉬움은 더 커 보인다.
스타벅스에 느긋하게 앉아서 책을 읽거나 2동 2층에 있는 카페 안진에서 파르페를 먹고 싶지만 너무 늦지 않게 숙소에 돌아가기 위해 다음을 기약한다. 주로 엄마와 함께이거나 혼자 여행을 즐기는 나로선 낯선 여행지에서 늦은 밤 돌아다니는 걸 경계하고 있다. 안전하다는 일본에서까지 그럴 필요 있겠냐고 하지만 언제 어디서 돌발상황이 벌어질지 모른다. 게다가 난 생각보다 잘 놀라고 겁이 많다.
시부야에서 긴자 라인으로 갈아타고 가야 하는데 정말 최악이다. 환승 구간이 그야말로 헬이다. 이런 상황은 구글에서조차 알려주지 않으니 어쩔 수 없다. 공사 중이라 한참을 돌아가야 하는 데다가 웬 공사장 계단 같은 곳을 거의 5층 이상 올라가야 했다. 이젠 허리뿐만 아니라 새끼발가락 있는 데까지 부르트고 물집이 잡혔다. 숙소에 돌아와 어제 사둔 라면과 푸딩을 꾸역꾸역 먹었다. 젓가락은 어떻게 해결했는데 맙소사, 라면에 진공 포장된 숙주나물 같은 것이 들어있다. 왜 하필 라면을 사도 이런 라면을 산 걸까.
이로 물고 뜯어도 안돼서 유심칩 넣을 때 사용한 핀으로 뜯었다. 힘들게 먹은만큼 맛있더라. 맛없으면 울뻔. 일본 편의점 라면은 뭘 먹어도 다 맛있는데 막상 사 오게 되진 않는다. 부피가 커서 몇 개 안 들어가는 데다가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집에 오면 라면은 몸에 좋지 않은 거라 잘 안 먹게 된다.(풉. 내가 나를 비웃는다)
오늘은 몸이 피곤해서 호텔 1층 로비에서 갖고 온 입욕제로 목욕했다. 이럴 땐 온천에 가고 싶은 생각이 절로 나지만 아쉬운 대로 호텔 욕조도 아늑하고 무엇보다 따뜻하다. 벌써 마지막 밤이다. 너무 짧은 여행이었다. 일본에 와본 여행 중 가장 짧았다. 그런데 가장 짧은 만큼 알차게 계획해서 즐기고 간다. 딱 내게 맞춘 여행이었다. 여행을 하면 할수록 나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다. 점점 무리하지 않게 되고 포기할 줄도 알게 된다. 하지만 안타깝지 않다. 열 명의 사람이 있다면 그 열 명의 사람 모두 다른 여행법이 있는 것이니까.
- Ps.
1. 아- 역시 여행은 갔다왔을 때 바로 써야 쓸 맛이 나는 것 같다. 한 동안 안쓰다가 쓰려니 엉망진창이구나. 어쨌든 도쿄 여행은 내가 지겨워서라도 빨리 끝내야겠다. ㅎㅎ
2. 유스베리 티 같은거 비싼 돈 내고 누가 먹나 했더니 내가 마시고 있다. 카페인 적은 걸 스벅에서 애타게 찾는 내가 우습다. 그냥 가질 말지. 물배차서 화장실만 가고 싶다.
3. 엘리베이터 안에서 대여섯살 여자 아이가 반갑게 인사를 해줬다. “아주머니 안녕하세요!” 움. 인사는 고맙고 아이는 귀여워서 “어, 안녕!”이라고 해주고 거울을 슬적 본다. 그...그..그래, 내 나이가 너한텐 아줌마 나이지. 근데 아주머니라니. 뭔가 누님이라는 소릴 듣는 느낌이다. 엉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