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여행 08
2017년 10월 12일 목요일
에비스 역에서 미타카로 가려면 신주쿠에서 주오선으로 갈아타야 한다. 신주쿠가 얼마나 복잡한 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던 터라 걱정했지만 별 어려움 없이 탈 수 있었다. 그리고 보니 이번 여행에서는 시부야나 신주쿠는 환승경로로만 다녔을 뿐 구경을 못했다. 크게 아쉽지는 않다.
미타카 역에서 지브리 미술관으로 간다. 내게 있어 지브리는 오랫동안 잊고 지낸 꿈의 단어 같은 거다. 오다이바도 진보초도 포기하고 망설임 없이 지브리 미술관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내가 꿈꾸던 세계로 돌아가는 마법의 단어, 지브리.
미타카 역에서 걸어가고 싶었지만 이미 나카메구로에서 걷다가 햇살에 녹아내릴 뻔했으므로 노란색 고양이 버스를 탔다. 사람들을 어찌나 꽉꽉 채우고 가는지 문가에 간신히 서서 갔다. 하지만 가는 길도 예쁘고 무엇보다 지브리 미술관에 가고 있다는 사실에 들떠 있어서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역에서 미술관까지는 거리도 멀지 않아서 금방 도착한다. 미술관은 하루에 4번 입장하는 시간대가 있고 나는 2시부터 입장하는 표다.
버스에서 우르르 내려 줄을 서면 직원이 예약한 표를 일일이 여권과 함께 검사를 한다. 시간이 되면 몇 명씩 끊어서 미술관 안으로 들여보낸다. 안에서 교환권을 정식 필름 티켓으로 교환해준다.
지브리 미술관은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이루어진 건물로 미야자키 하야오가 직접 디자인을 했다. 특유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미술관은 보는 곳마다 신기하고 재미있다. 유리 창문 하나 입구 하나, 어느 것 하나 할 것 없이 모두 다르고 재기 발랄하다. 정해진 경로가 없으니 이곳저곳 둘러 다니며 마음껏 즐기면 된다. 좁은 나선형 계단과 독특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로 올라갈 수도 있다. 그러다가 밖으로 나가 정원을 즐기며 잠시 쉬어도 좋다. 미술관은 이노카시라 공원 안에 위치해 있어서 자연과 함께 잘 어우러져 있다. 곳곳의 작은 디테일까지 신경 써서 화장실만 가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들고 밖에 나가 우연히 창문을 바라봐도 멋진 캐릭터들이 맞아준다.
지브리 캐릭터들로 애니메이션의 원리를 직접 만지면서 체험할 수 있다. 처음 들어가서 볼 때는 그 황홀함에 눈물이 울컥 났다. 뭔가 잊고 지냈던 따뜻한 어린 시절을 마주하고 난 느낌이었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퍽퍽하게 삭막하게 살아왔는지 안에 들어가서야 느꼈다. 그래, 나도 이런 거 엄청 좋아했지! 한 때는 지브리 애니메이션들을 얼마나 많이 보고 좋아했던가!
지하에 있는 극장에선 단편 애니메이션도 상영해준다. 내가 본 것은 '고로 이야기'로 강아지와 소녀의 우정을 그린 이야기였다. 일어로 진행되는 자막도 없는 짧은 단편이었지만 언어를 잘 몰라도 충분히 전달되었다. 음악만이 만국 공통어가 아니었다. 만화도 마찬가지다. 미술관에는 가족 단위로 많이 왔던데 아이와 어른이 함께 좋아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위층에선 애니메이션이 어떻게 탄생하는지 작업실을 그대로 재현해 놓거나 지브리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음식들을 모형이긴 해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눈앞에 직접 재현해 놓은 것을 보니 내가 마치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 속으로 들어와 있는 것 같다. 얼마 전 지브리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음식들을 직접 만들어 인스타그램을 하는 일본인을 알게 되었다. 모형이 아니라 음식으로 만들어 놓는데 정말 똑같아서 감탄했었다. 일본인들은 이런 디테일에 참 강하다.
천공의 성 라퓨타에 나오는 거신병을 만나러 옥상으로 올라갔다. 생각보다 좁은 정원에 덩그러니 거대한 거신병이 혼자 서있다. 관광객들이 의무적으로 그 앞에 줄 서서 사진을 찍고 있다. 사람이 없는 틈을 타 잽싸게 사진만 찍고 내려왔다.
기념품 숍에 들려 지름신 강림을 막아내며 신중하게 몇 가지만 골랐다. 토토로 열쇠고리와 배지, 그리고 볼 때부터 마음을 뺏겼던 귀여운 손수건까지.
갈 때는 이노카시라 공원을 가로질러 기치조지 역까지 걸어간다. 날도 많이 선선해졌고 무엇보다 이노카시라 공원을 가보고 싶었다. 이노카시라 공원에 들어가니 시원하고 습한 숲의 냄새가 났다. 공원은 크고 넓었다. 탁 트인 공원 한가운데서 주민들이 나와 저마다의 방법으로 즐기고 있었다. 나는 벤치에 앉아 잠시 쉬면서 가지고 온 초콜릿과 간식을 먹었다. 배가 촐촐해졌다.
펑크족 머리를 한 남자가 돗자리를 펴고 책을 읽고 있다. 그 옆에는 윗도리를 벗어젖힌 할아버지가 가만히 서서 박수를 치고 있다. 멍하니 한 곳을 바라보는 시선엔 표정이 한 개도 없다. 그 주위를 역시 윗도리를 벗은 채 한 남자가 달리고 있다. 암만 봐도 운동선수도 아닌데 필사의 다짐을 한 듯 이를 악물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말이다. 벤치에 앉아서 이 기묘한 조합의 사람들을 보자니 웃음이 났다. 그런데도 어느 누구 하나 옆에 있는 사람을 신경 쓰지 않았다. 펑크족 머리도, 손뼉 치는 할아버지도, 이를 악물고 달리는 남자도 모두 자신만의 일을 열심히 할 뿐 누가 옆에서 뭘 하는지 관심이 없다. 오로지 나만 그들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다.
'참 좋은 모습이야'라고 생각했다. 저마다 각자의 일에 빠져 하루의 어느 순간을 보내는 그들을 감싸줄 수 있는 이 공원이 있어 부럽다. 가끔 나도 호수공원에 나가 돗자리를 펴고 책을 읽고 잠을 자다가 왔지만 역시 버스를 타고 나가야 하는 곳이라 가기 힘들다.
기치조지 역까지는 내 걸음으로 대략 3~40분은 걸리는 듯하다. 지브리 미술관에 있을 때는 너무 신나서 미친 듯이 다녔는데 아무도 없는 숲길을 혼자 걸으려니 지쳐갔다. 다시 고질적인 허리 통증이 시작되었다. 공원 안에 동물원이 있다는 표지판을 보고 잠시 가볼까 생각했지만 엄두가 안 난다. 왜 젊고 건강할 때 여행을 다니라고 하는지 알겠다. 정말 걷기만 하는데도 이렇게 허리가 아플 일이니.
천천히 걷다 보니 이곳 1차선 도로에 신기한 표시가 되어있다. 사람이 자전거를 타고 가는 모양의 일종의 아이콘이 도로 한쪽에 계속 그려져 있다. 보니까 그곳으로 끊임없이 자전거가 다니고 있다. 1차선 도로에 자전거 표시까지 있다니. 그런데도 쌩쌩 달리는 차들 옆에서 수많은 자전거들이 유유자적 가고 있다. 또 한 번 놀랬는데 어느 누구 하나 자동차 클랙션 울리는 소리가 없다. (하긴, 일본 어디에서도 자동차 클랙션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구나) 좁은 도로를 자전거가 다니게 만들어 준 것이 신기해서 걸으면서 사진을 찍었다. 일본의 자전거 사랑은 자연스럽다. 차들과 자전거가 알아서 서로 피해 주고 기다려준다. 이런 환경에서라면 자전거를 타고 어디든 다닐 수 있겠다. 공원과 차가 없는 곳에서만 자전거를 타는 쫄보인 나로선 일본의 자전거는 신기하기만 하다.
나도 이젠 제법 자전거를 만나도 오른쪽 왼쪽 헷갈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피해줄 수 있게 되었다. 그나저나 나도 자전거 타고 가고 싶다. 어디 카페라도 찾아들어가나 싶을 때쯤 기치조지 역에 다다랐다.
***젠장, 이 글을 다 쓰고 날려버려서 며칠을 쓰지 않고 있다가 이제야 다시 썼다. 한참 신나서 쓸 때와는 전혀 다른 글이 된 것은 사실이다.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지브리 미술관과 이노카시라 공원은 여행 중 가장 좋았던 곳이다. 심지어 그렇게 고대하던 츠타야보다 더.